6. 개혁주의 설교 ⑥ 성령의 역사가 있는 설교

설교의 중심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전하는 것 … ‘오직 성령으로’ 돌아가야
회개와 믿음, 삶의 변화를 결단케 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설교가 강단에서 회복되길


 

▲ 김경원 목사(서현교회)

설교는 목회자의 가장 큰 영광이며 동시에 가장 무거운 짐이다. 또한 목회 사역의 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 사역이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이라고 말하였다. 오늘의 한국 교회 강단의 설교를 보면서 조금은 안타깝고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거의 모든 설교자는 “내가 제대로 설교 사역을 하고 있나?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수없이 한다. 과연 설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주제를 성령의 역사와 결부하여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무엇을 설교하는가? - 성령의 감동된 말씀
 
설교의 정의는 다양하다. 가장 간단하게 ‘말씀봉사’ 인데 설교의 대가인 필립 브룩스는 “인간에 의한 인간에게 전해지는 진리의 전달” 이라고 했다. 설교 신학자 정성구 박사는 해릭 존슨(Herrick Johnson)의 설교 정의를 채용하여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선택된 설교자가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법 있는 종교적 강화라고 정의한다.<(개혁주의 설교학> P.195) 성령의 역사와 관련지어서 설교를 정의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성령에 감동된 설교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설교하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66권)이며 그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졌다.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의 중심은 기록된 말씀, 즉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에서 하나님의 감동이 곧 성령의 감동이다. 그 의미를(God-breathed) 헨드릭슨(William Hendrickson)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기원과 내용이 신적인 감동,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시사한다. 인간 저자들은 성령에 의하여 강력하게 인도되고 지도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기록한 것은 오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최고로 귀중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부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신앙과 행위의 무오한 법칙이 된다.(<목회서신> 주석 P.402)

소위 개혁주의적 신학 입장에서 성경의 영감은, 유기적이며 완전 축자 영감 된 말씀임을 믿고, 그 말씀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기에 오직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①완전 영감 ②축자 영감 ③유기적 영감, 이 사상은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 아주 중요하다. 부끄럽게도 오늘 강단에서 먼저 성경이 아닌 다른 것들을 설교(?)하는 경우를 본다.

어느 작은 개척 교회에 그 동네 유지인 부자 의사가 출석하게 되었다. 그 교회 목사는 의사가 출석하자 그 사람의 귀에 맞는, 수준이 있는(?) 의학적 상식을 가지고 멋진 설교를 준비하여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배 후에 그 의사가 나가면서 하는 말 “목사님 나는 교회에 와서 의학적 지식을 들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의학을 이야기하면 아무리 해도 목사님이 저를 따라올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하더란다. 이 목사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이 멍해지더라는 이야기를 오래 전에 그 목사님께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된 말씀을 제쳐두고 자신이 받은 또 다른 계시- ‘꿈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는데’ 하면서 성경의 권위보다 자신이 받은 말씀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자기의 개인적 신비한 체험을 설교의 주재료로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국교회 강단은 개혁주의 신학 사상인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완전, 유기, 축자 영감 된 절대적인 하나님 말씀을 강단에서 선포해야 한다. 성경 없이는 설교가 없다.

2. 설교자는 성령에 감동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많다. 즉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나온다. 그래서 설교와 설교자는 분리될 수 없다. 설교자의 자질 또는 자격에 대해 여러 조건들을 볼 수 있다. 먼저 인격적으로 진실함이 있어야 하고, 설교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영혼구원을 해야 하기에 구령-영혼구원의 열망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성경을 이해하고 주석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도 필요하다. 설교자는 다른 사람과는 또 다른 경건성이 필요하고 동시에 이것은 기도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삶에서도 성령께 의존할 뿐 아니라 특히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감동 속에서 준비되어야 한다. 물론 설교 준비에 있어 본문의 선택과 그 본문을 묵상하는 것,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고 관련된 사전이나 주석들을 참고하고 적절한 예화를 찾는 등의 과정이 있다. 구체적 전개도 통일성과 전진성 그리고 균형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도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많은 경우 설교자는 자기 자신을 의존한다. 자기중심적이 되어 때로는 자기의 실력, 의지, 주장이 앞선다. 설교 준비 과정에서 성령의 개입을 무시한 채 한편의 설교가 완성되기도 한다. 아니다. 설교 준비 과정에서도 자신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임재와 감동, 역사를 기대해야 한다. 설교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무능하고 무지하오니 말씀하소서” 하는 자신의 내려놓음이 필요하다.

한편의 설교를 다 준비했다고 해서 이제는 다 되었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겸손히 “주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령이여 도우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내 원고의 완벽함을 믿지 말고 지속적인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하고 지속적인 성령의 사역과 감동의 여백을 두어야 한다. 즉 최선의 준비와 동시에 성령의 역사와 감동을 의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로이드존스)

3. 전달과정에서의 성령의 감동을 기대하라.
 
성령의 감동된 말씀을 성령의 감동 속에서 설교자가 최선의 준비를 하고 강단에서 설교(preaching) 할 때도 역시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설교는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가 주된 요소이다. 설교의 전달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무리 잘 준비된 설교라도 잘못 전달이 되면 그 의미는 없어지게 된다.

전달은 곧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인데 전인격적으로 하는 것이다. 필립 브룩스(P. Brooks)는 “설교는 한 사람에 의해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진리의 전달” 이라고 했다.

커뮤니케이션에는 크게 언어적 요소와 비언어적 요소가 있다. 좋은 언어는 설교에서 가장 중요하다. 음성의 정확성이나 좋은 표현(구어체) 문학적 소질을 가지고 흥미성을 유발하는 호소력 있는 표현 등이 필요하다. 동시에 비언어적 요소로서 태도, 얼굴 표정, 제스처 등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설교 전달에서 이런 것들이 다 갖추어져도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요소를 갖추고 그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신약교회의 시작인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자.

설교자 베드로의 경우 모든 설교에 성령의 충만과 감동이 있는 설교였다. 특히 구체적 표현이 된 사도행전 4장 8절 “이에 배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10장 44절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그리고 스데반의 설교도 그러했다. 6장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게 행하니”, 6장 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이 외에도 구체적 표현은 안 되어 있으나 바울의 설교에서도 성령의 감동으로 한 말씀들이다. 16장 14절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에서 주께서, 곧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고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했다. 이 같이 어떤 지식이나 커뮤니케이션 방법보다도 성령의 감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이 너무 지성적 또는 사변적이 아닌가 하는 우려와 동시에 성경보다 개인체험 위주의 오순절적 신학적 바탕의 설교가 많지 않은가 하는 우려를 가진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 우리의 정체성이니만큼 단순히 신학교의 강단에서만이 아니라 목회 현장, 특히 설교에서도 개혁주의 신학적 바탕에서 나타나야 된다. 설교가 단순한 강의와 다른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설교가 단순한 언어적 유희에 불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평양 대부흥 사건 역시 성령의 강한 역사가 말씀가운데 나타남으로 되어진 것이다. 성령의 감동이 있는 설교는 지성적 요소와 더불어 감성적 요소, 그리고 결단이 따른다. 회개와 믿음, 삶의 변화가 있다. 오늘 그런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오직 성경, 성령의 감동과 역사가 우리 강단에서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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