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일 목사(대구 범어교회)

희락은 주를 가까이 하는 성도의 열매
참된 희락은 마음과 영, 육체까지 연결시키는 전인적 요소 지녀야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희락(喜樂)의 삶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 두 번째로 언급된 것이 희락입니다. 희락은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세 가지 징표 곧,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 중 하나입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며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희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입니다. 희락이 없는 생활이라면 성경적으로 볼 때 성령의 역사함이 없는 상태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지옥의 생활임을 의미합니다. 부자나 고관이나 명예를 누리는 상황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상태가 오히려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을 증거하는 순간입니다.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도,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구경하는 여행을 다녀도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희락이 단순한 물질적인 여건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의미일 것입니다.

물질적인 여건보다는 성령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있는 자는 희락을 누립니다. 요즘 세간에 뇌졸증에 관한 간단한 진단 방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어지럽다고 하며 순간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면 뇌졸중의 증상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세 시간 안에 처치하지 못하면 생명을 잃거나, 지켜도 반신불수가 되는 것이 뇌졸중입니다. 혹 주변에 그런 증상을 일으킨 사람이 있으면 다음의 세 가지를 물어보라고 합니다. “웃어보세요”(Smile), “말해보세요”(Talk), 그리고 “두 팔을 올려보세요”(Raise)로 긴급 진단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안 되면 급히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이송하여 속히 처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 회복이 가능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하면 이후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세 시간이 골든타임입니다. 여기서 이 세 가지 행동(Smile, Talk, Raise)은 곧 웃으며 노래하며 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생명력입니다. 희락은 생명력의 증거입니다.

 
희락이 없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생명력을 잃은 채 삽니다. 웃음이 없고, 노래도 안 부르고, 손 하나 올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기쁨을 잃고 우울한 상태의 희락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실제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다윗은 사선(死線)을 수 없이 넘나드는 환난 가운데서도 희락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그 이유를 암시해줍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절)

다윗이 여호와를 항상 그 앞에 모셨던 것은 주 밖에는 자기의 복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2절) 그렇기에 그는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라고 불렀고,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니 부족함이 없었으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았던 것입니다.(시 23:1 참조)

희락의 길은 여호와를 따르는 길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희락을 잃어버린 이유는 여호와를 멀리한 탓입니다. 세상 열락을 좇아 살다가 쾌락은 얻었으나, 희락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전인적(全人的)인 희락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흔히 성경의 희락은 영적인 희락이지, 실제 우리의 삶과 무관한 것이라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9절은 세 가지 차원에서 희락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기쁨’, 둘은 ‘영의 즐거움’, 끝으로 ‘육체의 안전’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참된 희락은 이렇게 ‘전인적(全人的)인 요소’를 지녀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희락은 분명 육체의 쾌락은 아닙니다. 대신 마음과 영의 기쁨과 즐거움이 육체의 안전까지 연결시켜줍니다. 육체의 안전은 소망의 기운이 솟는 중에 얻어지는 육신의 감성적 기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를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부른 노래(눅 1:46)를 알 것입니다. 이 노래에서 희락은 비천했던 인생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느끼는 행복감입니다. 그 순간 영혼이 노래하고 마음에 기쁨으로 충만한데, 그 이유는 이후로 복된 사람이 되리란 확신과 소망으로 가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육체는 모든 무거운 짐을 벗는 감성적인 안락함을 충만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락입니다.

 
충만하며 영원한 희락을 얻으려면

끝으로 생각할 것은 참 희락은 부족하거나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충만하며 동시에 영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그런 희락을 노래했습니다. 다윗의 노래에서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11절) 그러니 우리도 주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 스바냐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심을 이렇게 보여주셨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더 기뻐하시고 우리로 인하여 즐거워하시며 노래 부르십니다. 그렇기에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 앞’이란 어떤 자리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입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렘 15:16)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들으러 주야(晝夜)로 부지런히 나아갑시다. 시편의 첫 편에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고 했으니, 이것이 곧 기쁨과 즐거움의 열매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말을 듣는 자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요 15:11)

말씀을 듣는 자는 곧 겸손한 자입니다. 이사야는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라고 했습니다.(사 29:19)

 
마무리하면서

주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행 13:52) 자들입니다. 희락은 성령이 충만한 성도에게 나타나는 징표(열매)입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희락을 찾으려다가는 쾌락에 빠질 수 있습니다. 희락은 오직 주를 가까이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으로 사시는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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