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묵상 통한 적용이 설교되게 한다
 

선택된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하여 본문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본문 주해는 앞서 살핀 대로 각종 도구들(사전, 문법책, 고고학서적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본문 주해는 가능한 한 편견 없이 객관적 작업이 가능하도록 힘써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각기 개인적인 전제와 주관적 경험을 갖고 있기에 본문 이해를 위한 완벽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 본문의 외적인 요소를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주해가 아니다. 오히려 정직한 주해자는 본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를 교정한다. 혹은 주해자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본문조차도 다시금 엄밀하고 꼼꼼한 주해를 통해 저자의 의도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에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 이 단계까지 주해자는 스스로 본문(원어와 번역본)을 읽고 저자의 의도와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여 확정하게 된다.

‘이후에’ 비로소 우리는 주석책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후에’라는 말은 설교자가 본문을 연구하기 전에 주석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주석책은 설교자에게 본문 이해를 위한 필수 도구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주석책이라 할지라도 설교자가 본문을 연구하기 전에 앞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부득이 주석책의 생각의 선(線)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결국 주석책의 노예가 되고 만다.

따라서 설교자는 주석책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주석책은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적어도 두세 가지 정도가 되어야 좋다. 서로 다른 신학적 배경을 가진 주석책을 사용함으로써 설교자 자신이 파악한 본문의 의미 이해에 새로운 사고의 자극을 받는 것도 유익하다.

주석책이 설교자의 주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듯이,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교회의 신앙고백서를 반드시 자신의 주해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신앙고백서는 탁월한 신학자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의 주해를 마친 후에 신앙고백서가 가르친 교리에 비추어 점검하는 일이 필요하다. 설교의 근간이 되는 본문 주해는 교회 공동체가 수용한 신앙고백서로부터 결코 탈선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가 주해를 통해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였다는 것은 본문의 석의주제와 석의대지들을 파악했다는 뜻이다. 이제 설교자는 가장 어렵고도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설교자 앞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본문 주해의 실천적 적용이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가 석의주제와 석의대지들을 ‘묵상함으로써’ 회중들에게 전달할 설교주제와 설교대지들을 얻는 일이다. 트림프(C. Trimp) 교수는 이 과정을 소위 ‘설교학적 주해’라고 부른다. 설교자가 본문과 동시에 본문이 의도하는 저자의 관점에서 회중을 바라보는 것이다. 본문에 대한 ‘묵상’ 혹은 ‘설교학적 주해’를 거쳐야 비로소 설교문 작성이 가능하다.

설교자는 묵상을 통해 석의주제와 석의대지들이 설교주제와 설교대지들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 적용을 위한 묵상은 창조적 과정이다. 설교자의 신앙과 신학, 목회 환경 전반에 걸친 성령 안에서의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창조 행위이다. 이 창조적 행위의 묵상 과정을 통해 설교자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께서 묵상 가운데 있는 설교자에게 본문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 결과 설교자는 하나님의 이 음성에 사로잡혀 확신있게 회중들에게 설교할 수 있게 된다. 성경 본문이 처음에는 설교자의 주해 대상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설교자의 묵상을 통해 설교자에게 말하고, 또한 설교자를 통해 회중들에게 말한다. 결론적으로 본문의 석의주제는 설교자의 묵상을 통해 회중들에게 적용된 설교주제로 바뀌어 설교자의 확신 가운데 선포된다.

설교자의 묵상을 통한 본문의 적용은 주해 작업과는 전혀 다른 성격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과거에 기록된 성경 본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작업이 주해라면, 이렇게 파악된 의도를 현재의 회중들의 삶에 연결시키는 작업이 적용이다. 따라서 참된 설교는 회중을 고려한 설교자의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적용이 빠진 설교란 더 이상 설교라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중대한 적용을 주관하는 체계가 있는가? 필자의 확신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회중들의 유익을 추구하는 열망 가운데 엄밀한 본문 주해를 통해 획득된 석의주제를 회중을 위한 사랑으로 녹여내는 ‘설교자의 영성’에 달려 있다. 여기서 설교자는 반드시 창조주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것을 취하여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성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요 16: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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