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손과 발의 순종’을 경험하라
 

본문 주해에 있어서 문맥이 중요한 만큼 본문의 장르(genre) 역시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감된 책인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책이다. 성경은 특정한 문학 형식을 지닌 다양한 장르로 기록되어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시편, 아가서, 애가서와 같은 시가서가 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한 네 개의 복음서, 바울과 사도들의 많은 편지들인 서신서, 그리고 다양한 상징어들로 기록된 요한계시록과 같은 계시문학서가 있다. 본문 주해에서 설교자가 장르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특정한 문학 형식을 이해하고 본문을 읽을 때 비로소 올바른 주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장르를 혼동하면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없다. 시적인 표현으로 기록된 글을 사실들로 구성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글로 읽는 것은 장르를 오해한 것이요, 올바른 이해의 틀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징적 언어로 쓰인 글을 쓰인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성경해석학>을 저술한 벌코프는 성경해석의 세 가지 원리들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강조한다. 그는 일차적으로 문법적 해석에 이어 역사적 해석과 신학적 해석의 필요성을 서술한다. 역사적 해석이 필요한 까닭은 성경 기록자가 기록한 내용들은 모두 기록자 자신이 처한 역사적 환경을 배경으로 기록된 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 기록자에 대한 연구, 성경에 소개되는 화자(話者)와 본래의 독자들에 대한 연구, 책이 기록된 시대 상황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다. 성경의 역사적 해석을 위해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한 본문 연구도 필요하다. 혹은 성경에 기록된 관습들을 연구하는 일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룻기 4장 7절에 기록된 것처럼, 신을 벗어 상대방에게 주는 이스라엘의 관습에 관한 연구다. 이런 관습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것을 확정하기 위하여 신을 벗어 상대방에게 줌으로써 법적으로 증명하는 풍습이었다. 또 다른 예로, 성경 외의 가치 있는 작품인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를 읽는 것은 유대인들의 역사를 또 다른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이해의 지평을 열어 줄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주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20세기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신앙의 외적 원리인 성경계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의 내적 원리인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할 수 있으며,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는다”고 지적한다(고전 2:13~14). 그러므로 신실한 성경해석자는 17세기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이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이 얼마나 타당하고 필요한 것인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성경의 어떤 부분이라도 하나님께 간구함 없이 또는 하나님의 성령의 교훈과 지시 없이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반드시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 주해에 있어서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구체적인 까닭은 성경의 독특성과 연관된다.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전체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내용상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소개하는 구약성경이 자신을 증거한다고 말씀하신다(요 5:39), (눅 24:27), (눅 24:44). 따라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짝을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구약과 신약은 구분될 수 있을지라도 결코 분리될 수는 없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배경 열쇠를 제공한다. 동시에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대한 주석으로서 예언의 성취를 보여준다.

필자는 이러한 개혁주의 성경해석학의 엄밀한 과학적 해석원리의 바탕 위에 ‘경험적 이해’를 덧붙이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 혹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몸소 고난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경험적으로’ 배웠다고 고백한다(시 119:71). 동방의 의인 욥도 역시 많은 고난을 통해 주님을 경험적으로 배웠다고 고백한다(욥 42:5).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아는 길은 오로지 우리의 손과 발의 순종을 통해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런 성경 해석을 ‘경험적 해석학’ 혹은 ‘순종의 해석학’이라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경험적 깨달음은 단지 머리만의 지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온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아니 목숨까지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주님께서 먼저 십자가 위에서 친히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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