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개혁주의 설교 ④ 개혁되어야 할 설교

청중 즐거움에 초첨 맞추면 하나님 슬프게 하는 설교로 전락 … ‘하나님 영광’ 집중해야
무너진 강단을 수축하는 일이 급선무 …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설교 힘쓰자


 

▲ 최기채 목사(광주동명교회 원로)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계 11:1,2)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연상되곤 한다.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짧은 시간에 놀라운 부흥성장을 온 세계에 과시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양적성장의 경쟁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참된 개혁의 정신으로 재도약의 새 출발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1. 무너져 가는 강단수축

엘리야가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던 선지자들과 대 결전을 앞두고 맨 먼저 한 일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는 작업이었다.(왕상 18:30) 각종 우상과 또한 불의한 세력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신무기 개발이나 병력증강을 서두르지 않고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는 것만이 승리의 지름길임을 엘리야는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도 사신우상과 각종 이단사설과 악의 세력들과 싸워 이기려면 무너져가는 개혁주의 제단을 수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보수교단이라고 자부하지만 주님께서 진단하실 때에는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탄식하실 것이다. 다소의 예외는 있겠지만 오늘날 교회의 강단은 중세교회의 암흑기처럼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는 말씀은 자취를 감추고 세속화와 부정부패와 물량주의와 교권주의에 깊이 빠져서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이 쉬도록 외치던 개혁자들의 설교는 자취를 감추고, 이른바 설교의 달인이요 유명세들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코미디언처럼 TV와 교회의 강단을 넘나들면서 원맨쇼를 벌이며 기복주의 사상으로 비틀거리는 영들을 마취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어디 그뿐이랴! 오늘날 각종 이단들의 준동으로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근본 원인은 강단이 무너지고 설교가 본연의 사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설교가 회복되고 강단이 견고해지려면 무엇보다도 설교가 그의 원형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말씀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실에 구슬을 꿰서 목걸이나 반지를 만드는 것처럼 성경을 난도질해서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씩 따다가 설교자의 의도대로 끌고 다녀서는 아니된다.(사 28:10)

설교문을 작성할 때에는 적어도 칼빈주의의 5대 교리, 즉 인간의 전적 타락,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인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 혹은 견인의 골격의 틀을 짜 놓고 그 안에서 설교를 다듬어 나아가야 이단 사상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
 
2. 개혁주의 설교의 원형

설교의 형태는 다양하다. 즉 제목 설교, 주제별 설교, 혹은 어느 성경 한권을 선정하여 강해하는 연속 설교 등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며 명령하시고자 하여, 구별 된 문장까지 다 읽은 다음에 해석하고 가르치며 권하는 것이 주해 설교요, 설교의 원형이라고 한다.

작고하신 어느 선배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경 66권의 어느 부분을 찌르든지 그리스도의 피가 흐른다”고 하셨다.

그렇다! 신·구약 성경의 어느 부분, 어느 구절이나 그리스도의 혈맥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증거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 기자들은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설교자가 마치 광부가 광맥을 찾고, 우물을 파는 자가 수맥을 찾아 파고들어가듯 성경을 파고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피가 솟구칠 것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 흘린 그리스도께서 흐뭇해하실 것이다. 이와 같은 설교의 원리와 방식이 사도 시대에 많은 청중들의 가슴을 치고 통곡하게 했으며,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의 설교의 원형이었으며 종교개혁을 전후한 영적 거성들의 설교의 모형이었다.

오늘날 개혁주의 교단인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불리는 14세기의 존 위클리프의 말씀운동과 개혁자 마틴 루터와 재개혁의 선구자인 요한 칼빈의 말씀운동을 회복하기 위해 제단을 수축하는 일이다.
 
3. 개혁주의 설교의 핵심

성경은 말씀하기를 설교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라고 했다. 이를테면 설교자는 자기의 사상이나 자기의 지식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대언자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는 철학이나 과학적 지식이나, 세상의 다양한 학문을 전하기 위해서 그 거룩하고 엄숙한 강단에 세워진 사람들이 아니다.

더욱이나 성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단한 예화 한가지씩은 말할 수 있겠으나 상스럽고 야비한 욕지거리나 심지어 음담패설을 토설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 오직 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또 선택 받은 자는 누구나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 단순하고 명확한 소식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설교자임을 망각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타락, 거듭남의 필요성, 속죄를 통한 의롭다 하심을 받음, 그리고 믿음의 결과인 구원. 이러한 명제들이 우리가 영적전투에서 사용할 무기이며 화살이며, 다이너마이트다.(행 1:8)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라. 물론 복음에다가 문학의 옷을 입혀서 전하되 지나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덧 입혀서 복음이 가리어지는 일이 없도록 언제 어디에서나 영원토록 그리스도만 전하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복음의 전부요, 설교의 핵심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사명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바였다. 왜냐하면 자기들을 보내시고 세우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재림하실 것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메시야임을 증거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개혁주의 설교의 재료는 신·구약 성경이요, 신·구약 성경의 핵심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시다.
 
4. 개혁주의 설교의 목표

무슨 일에나 성공하려면 목표, 즉 푯대가 뚜렷해야 한다. 활을 쏘는 궁수(弓手)의 목표는 과녁이다. 과녁을 조준하여 활을 당기다가 화살이 목표물인 과녁을 명중하지 못하고 빗나가면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헬라어에서 죄에 ‘하말티아’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이 낱말은 “빗나간다”는 뜻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라고 했다.

바울이 평생토록 달리고 또 싸웠던 목표는 택함 받은 성도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설교를 듣는 자의 구원만으로는 개혁주의 설교자의 소임을 다 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자가 감사하며,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주께서 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했던 다윗이 찬양하기를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시 21:5)고 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소요리문1:1)고 했다. 다시 말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또는 농사를 짓든지 목회를 하며 설교를 하든지 그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에 다 포커스를 맞추라는 것이다.

만약 설교자가 설교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지 아니하고, 청중들의 구원과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설교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설교의 대가인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했다.
개혁주의 신학의 모토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gloria)’이다.
 
5. 성경이 말하는 설교의 유형들

① 말과 혀로만 하는 설교 - 우리 인간은 말과 문자를 가진 피조물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어를 주시고 이 언어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하도록 하셨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다.
오늘날은 설교의 홍수시대이다. 언론매체를 통하여 쏟아져 나오는 달변가들의 설교나 논리적이고 수사학적인 설교들은 청중들의 귀를 간지럽히고 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가 말과 혀로만”설교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고 했다.
② 가슴과 심장으로 하는 설교 - 설교는 청중의 귀만 울리지 말고 가슴이나 심장을 울리는 설교라야 한다. 심장으로 하는 설교라야 행함과 진실이 묻어나고 사랑과 뜨거움이 방출되며, 간절성이 나타난다.(리차드 벡스터)
③ 생활로 본보이는 설교 - 오늘날 안티계열의 신자나 불신자들의 상투적인 반응은 설교자들에게 “말은 잘한다” 혹은 “너나 잘해라”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하셨다.

④ 눈물로 하는 설교 -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3년간이나 섬기면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에게 훈계하고 설교했다.(행 20:31) 그리고 주 예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 나사로가 죽은 초상집에 가셔서 그 어떤 말씀이나 위로의 설교대신 실컷 울어 주셨던 것을 기억하라.(요 11:25)
 
맺는말

우리가 염원하는 초대교회의 특징은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말씀이 흥왕했던 것이었다. 기도가 충만하니까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니까 말씀의 권능이 있어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하리이까”하는 절규가 터져 나오며 하루에 3000명 혹은 5000명이 뒤집어졌다.

우리가 바라는 능력 있는 설교, 다이너마이트처럼 사탄의 진을 폭파시킬 수 있는 설교는 오직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하는 설교이다.(행 2:4) 이 폭발력 있는 설교는 듣는 자마다 다 살아나며(요 5:25), 거꾸로 가던 세상을 다시 뒤집어 놓을 것이고 세상에 오염되어 흙탕물에 잠겨버린 강단이 정화되어 만물이 소생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에스겔이 본 환상대로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큰 강이 되어 시들어버린 모든 생물이 소생하고 물고기가 헤엄치듯 할 것이며, 마라 같이 쓰디쓴 우리의 강단이 단맛을 내는 샘물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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