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100회기 특집-복음과 함께, 겨레와 더불어] 100회 총회 역사적 의미

정초와 발전 독노회 5년 만에 총회 조직 … 복음전파 넘어 민족 선도하는 중심기관으로
분열과 위기 전쟁 거치며 잇따른 대립과 분열 … 총회가 앞장 강력한 회개운동 전개하다
재건과 도약 거듭된 교단 탈퇴·합동 진통 속에서도 민족복음화·해외선교 충실히 감당


 

▲ 박용규 교수(총신대·역사신학)

2015년 광복 70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00회를 맞았다. 1912년 9월 1일 제1회 총회가 평안남도 평양 경창리 여자성경학원에서 창립된 후 오늘날까지 총회 역사는 한 마디로 수난을 통한 영광의 역사였다.

총회는 일제의 감시와 견제와 핍박을 받아야 했고, 결국 43년부터 45년까지 3년 동안은 총회마저 열리지 못했다. 해방을 맞았지만 남과 북의 교회들은 또 다시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북한의 교회들에는 공산주의 핍박으로 형극의 나날이 계속되었고 남한의 교회들은 이념적 혼란, 정통과 이단, 자유주의대 보수주의, 신사참배문제로 대립과 혼란을 맞았다. 1950년 제46회 총회는 전쟁으로 그 이듬해 가서야 속회할 수 있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교회가 복구되는가 싶더니 총회는 1952년 고려파, 1953년 기장, 그리고 1959년 합동과 통합 세 차례의 대 분열을 맞으며 불과 7년 만에 넷으로 나뉘고 말았다. 확실히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총회 역사는 분열과 위기의 역사였다.

1960년 이후 총회는 분열의 아픔을 극복하고 교단과 신학교를 재건해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교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지난 반세기가 넘는 동안 우리 총회와 교단은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주역으로 한국교회 성장과 해외선교의 기적을 견인했다. 확실히 지난 총회 100회의 역사는 민족적 수난과 위기를 극복하고 일어선 영광의 역사였다.

지난 100회의 총회 역사는 크게 정초기와 발전기, 혼란과 분열과 위기의 시대, 그리고 재정비와 도약의 시대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1. 정초기와 발전기 총회 역사(1912-1945)

1884년 9월 20일 호러스 알렌이 제물포에 입국한 후 정확히 28년 만인 1912년 총회가 조직되었다. 한국장로교 총회 조직은 모 교회 미국장로교와 비교할 때 상당히 빠른 것이다. 미국 장로교는 1706년 첫 노회가 조직되고 무려 83년이 지난 1789년에 가서야 총회가 조직되었지만 한국은 독노회가 조직되고 불과 5년 만에 총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다음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총회 직전 수년 동안 대부흥이 일어나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00년 불과 9364명이던 교세가 1910년 한국장로교만 14만 470명이 되었다.

둘째, 한국교회에 리더십을 속히 이양하겠다는 선교사들의 의지가 분명했다. 독노회 조직 후 5년 동안 마포삼열, 긔일, 원두우, 긔일, 이눌서가 노회장을 맡았고, 1912년 총회 조직 후 첫 3년 동안 원두우, 왕길지, 배유지가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연속 8년 동안 선교사들이 노회장과 총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 후 선출된 총회장은 1919년을 제외하고 모두가 한국인들이었다. 처음부터 선교사들은 자립 자치 자전을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채택하고 실천하여 왔다.

셋째, 그동안 사경회, 성경학원, 평양신학교, 그리고 5년간의 노회를 통해 훌륭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양성되어 총회 조직과 운영을 위한 인적 자원이 충분히 준비되었다. 게다가 언제든지 노회로 전환할 수 있는 대리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총회는 전국적인 망을 가진 유일한 기구였다. 자연히 총회는 복음전파를 넘어 나라와 민족을 선도하는 중심기관이었다. 1912년 총회가 설립되고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 한국장로교회는 우리 민족과 한국사회 발전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한국장로교는 일제 식민통치 속에서도 부흥의 주역이었고, 민족운동의 선구자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절제운동, 물산장려운동, 사회계몽운동, 농촌운동을 견인하는 중심세력이었다.

하지만 1938년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총회는 배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평양대부흥의 땅 평양이 하나님께 배도한 것이다. 1938년 이후 총회는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학교를 자진폐교하고 한국에서 철수하면서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고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이기선 주남선 박관준 백인숙 등 적지 않은 이들이 생명을 바쳐 신사참배에 맞섰다. 이들이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도태되었을 것이다. 터툴리안의 증언대로 순교는 교회의 씨가 되었다. 

2. 혼란과 분열과 위기의 총회역사(1945-1960)

1945년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았지만 그것은 반쪽만의 자유였다. 가장 기독교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서북지역이 김일성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되었다. 다시 북한교회는 형극의 길,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김일성 정권에 맞서다 생명을 잃었다. 남한교회는 다시 돌아온 선교사들과 미군정의 도움을 받으며 교회재건을 시작했다. 하지만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사회적 혼란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1950년 제36회 총회는 전쟁으로 속회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 1951년 5월에 가서야 부산에서 속회되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신사참배문제로 고려파가, 성경관 문제로 기장이, 다시 WCC문제로 통합과 합동이 분립되었다. 확실히 이 시대 한국장로교 총회역사는 대립과 분열과 위기의 역사였다.

하지만 영적으로 전쟁은 또 다른 기회였다. 1951년 5월 27일, 제36회 총회 셋째 날 총대들 모두가 국난극복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특별 금식기도를 실시했다. 총대들은 6.25 전쟁이 신사참배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였다. 총회가 앞장서서 회개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한국교회에 기회를 주셨다. 북한에서 박해를 받던 수많은 목회자들과 교우들이 1.4후퇴 때 자유를 찾아 남으로 피난을 왔고, 1952년 제 37회 총회는 이북노회(평양 평북 안주 평동 용천 황해 황동 평서 함남 함북) 총대들이 참석해 남북 총회가 실현될 수 있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회개운동에 앞장서고 빌리 그래함과 밥 피얼스를 비롯한 미국의 부흥사들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남한에서는 회개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1954년 제39회 총회가 과거 27회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하는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수와 민족의 위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용하신 것이다.

1959년 9월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 44회 총회에서는 WCC를 찬성하는 에큐메니칼 측과 WCC를 반대하는 NAE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표면적인 문제는 경기노회 총대문제였지만 실제적으로는 해리 로즈와 캠프 벨이 증언한대로 WCC와 에큐메니칼 문제였다. 에큐메니칼 지지자들은 1959년 총회가 정회한 후 그날 대전에서 기차를 대절 서울로 올라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였다.
 
3. 재건과 도약의 총회 시대(1960-2015)

총회 결정대로 1959년 11월 승동교회에서 속회한 우리 총회는 WCC를 영구 탈퇴하기로 하였고 교단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NAE에서도 탈퇴하기로 결의하였다. 총회장 노진현 목사와 그 후임 양화석 목사는 총회의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통합측과 다시 하나 되지는 못했다. 북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선교회, 호주장로교선교회 등 세 장로교 선교회가 예장통합에 합류한 상황에서 우리 총회는 미국 CRC와 전국교회의 기도와 후원으로 신학교와 교단을 재건할 수 있었다.

1960년 12월 총회는 신학과 노선이 같은 고려파와 역사적인 합동을 이룩하였고, 1966년 제 51회 총회에서는 고신, 예성과 함께 보수교단연합기구를 조직하였으며, 1967년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968년 제53회 총회에서는 합동원칙에 따라 통합측과의 합동을 선언하였으나 통합총회가 거부하는 바람에 합동이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총회는 1만교회 운동을 전개하며 민족복음화와 해외선교의 주역이 되었다. 1975년 3084교회 85만 9429명이던 교단교세가 불과 7년 후인 1982년 4230교회 173만 8310명으로 거의 배가 성장했다. 그 결과 1976년 우리 교단은 2484교회 66만 8678명으로 통합의 교세(2675교회 63만 9587명)를 앞질렀다. 우리 총회가 한국교회 해외선교를 주도하면서 1979년 93명이던 선교사 수는 1986년 511명으로, 1989년 1178명으로, 1996년 4402명으로 그리고 1998년 5948명으로 급증했다. 다시 2000년 8200명이 되었고 2010년 169국 2만 445명, 그리고 2012년 1월 기준으로 2만 3331명이 되었다. 우리 총회는 가장 많은 선교사를 배출한 교단이 되었다.

이 기간 총회는 또 다시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79년 소위 비주류가 분열되어 방배동에 총회신학교를 설립했고, 그 이듬해 1980년에는 몇몇 총신교수들이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분립된 방배동 총회신학교는 다시 여러 차례 분열을 맞아 수많은 군소교단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2005년 90회 총회에서 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1979년 분열되어 나간 형제교단 개혁 측과 역사적인 합동을 이룩하였다.
 
맺는 말

앞으로 총회는 역사적 칼빈주의 장로교 전통에 굳게 서서 통일의 그날을 앞당기며 아시아와 세계선교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총회 산하 교회들이 하나되어 물량주의적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고 건강한 연합운동을 실천하면서 교회의 본질과 거룩성을 지속적으로 회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총회는 향후 10년, 20년, 30년의 중장기 로드맵을 만들고 전국교회와 노회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일관되고 지속적인 정책을 수립·집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주일학교 회복과 공신력 있는 신학교 정책 구현을 통해 다음세대를 이끌고 나갈 인재양성과 훌륭한 목회자 양성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주님이 공생애 동안 보여주신 대로 교회는 복음전파의 사명, 가르치는 사명, 그리고 치료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기름 부으심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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