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개혁주의 설교 ③ 목회자 자세와 설교 준비

설교는 반드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며 예증하는 것 … 입체적 방향설정 필요
준비과정서 ‘착상의 영감’ 중요 … 원고화 된 문자 아닌 살아있는 말씀 전달해야

 

▲ 장차남 목사 (온천제일교회 원로)

목회자는 지교회의 담임자로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가 위임한 양무리를 먹이고 가르치며, 섬기고 보살피며, 이끌고 지도하는 목자를 일컫는다. 목회자의 업무는 예배와 교육, 심방과 구제, 선교와 봉사, 행정과 치리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이 모든 분야들 보다 더욱 목회자가 전무해야 할 사역이 있으니 곧 기도와 설교이다. 사도행전 6장 4절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기뻐하였다고 했다. 과연 목회자는 자기와 양무리를 위해, 그리고 맡은 업무를 위해 항상 기도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 사역에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목회자가 오로지 힘쓰야 할 설교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견지하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개진코자 한다.

1. 목회에서 설교의 위치와 중요성

목회의 범위는 다양하고 방대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팔방미인이 되려기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 더 중한 것과 덜 중한 것을 가려 선별적으로 집중하는게 중요하다. 무릇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는 설교사역이다. 설교는 목회업무 중 예배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대다수 목회자가 가장 자주 상시적으로 직면하며,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 분야이다. 반세기 전만해도 한국기독교에서는 교회 건물을 일컬어 예배당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목회자가 서는 설교강단을 성도들이 앉는 회중석과 별개로 여겨 마치 지성소와 성소의 경우처럼 구별하기도 했다.

물론 목사에게는 설교하는 강단이 최고의 자리이다. 그 강단은 담임 목사만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전하는 성역이다. 다른 목사의 경우 그 교회 담임자가 허락할 때에만 그 강단에 설 수 있다. 세상에서 아무리 정상급 정치인이나 인기 연예인이어도 그 사람만이 고정적으로 서는 연단이나 무대는 없다고 볼 때 목회자로선 이것이 얼마나 큰 특은(特恩)이요 영광인지 모른다.

지교회 위임목사에게 가장 두드러진 특권이 있다면 당회장권과 강단권이다. 대체로는 당회장권을 선호하나 사실은 강단권이 더욱 중요한 특권이라고 본다. 여기서 당회장권이 가시적 권력이라면 강단권은 신령한 권력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강단권을 잃는 것은 그의 영적 권위에 치명적 손상이 된다. 목회자가 강단을 내어주고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은 목회자에게 파문과 다름 아니다. 제43회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부산에 몰렸을 때 부산의 중심에 있는 교회로서 피난 온 목사들이 그렇게 많았어도 주일예배만은 반드시 직접 설교했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급박한 전시상황이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담임한 교회의 강단을 사수해야겠다는 설교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설교가 중요한가?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말하고 목사는 설교를 통해 말한다”고 할만큼 설교는 목사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다. ①설교는 목회사역의 본무이며 예배 의식의 중심이다. ②기독교는 말씀의 사역을 제일로 여기며 교회 부흥은 말씀의 부흥을 의미한다. ③목사는 말씀의 수종자요 해석자요 선포자로서 걸출한 목회자가 되려면 뛰어난 설교자가 되기를 요한다. 그러므로 목사 청빙에 첫째로 검증하는 것이 설교능력이다. 여타의 조건은 추가적인 것일 뿐이다.
 
2. 목회자로서 설교의 정의와 방향성

설교의 의미를 어원적으로 찾아보면 신약성경에서 4가지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①‘케루그마’로서 ‘사자의 알림’이란 뜻으로 복음의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선포함이다. ②‘디다케’로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강론, 설명하는 것이다. ③‘파라클레시스’로서 권설, 훈계의 뜻으로 권면하는 설교이다. ④‘호밀리아’로서 생의 어떤 부면이나 문제를 기독교 복음에 비추어 논평하는 것이다.

설교는 이 4가지 사실을 다 포함한다. 곧 기독교 복음의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고 그 사실의 의미와 적절성을 설명하며 그에 따라 살 것을 권고하고 인생의 모든 활동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다룸이 설교인 것이다.

또한 설교의 정의에 대하여는 많은 학자들의 정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1901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에서 1902년부터 무려 36년간 설교학을 교수한 곽안련 박사(Rev, C. A Clark)의 ‘설교학’ 책에 나오는 헤릭 존슨(Herrick Johnson)의 정의를 따르고자 한다. 그는 이르기를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법있는 종교적 강화이다”라고 했다. 쉽게 말하여 ‘성경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구원의 목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설교이다.

따라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성경적 설교여야 함을 원칙으로 한다. 성경과 설교가 서로 무관하거나 전혀 별개일 때 그것은 설교라고 말할 수 없다. 비록 설교형식은 본문 설교, 제목 설교, 강해 설교, 주해 설교 등 각기 달라도 그 설교가 참으로 성경에 충실한 설교인가를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설교내용에서는 교리 설교, 윤리 설교, 생활 설교, 상황 설교 등 각각 달라도 그 설교가 반드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예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설교의 목적과 방향설정에서 구령적, 양육적, 치유적, 지로적 입장이라는 입체적 방위설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① 구령적 입장이라 함은 그야말로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설교를 말함이다. ② 양육적 입장이라 함은 교회의 기존 신도들이 영적으로 보다 성장하고 성숙해지도록 교리와 윤리적 차원의 설교를 강화한다는 입장이다. ③ 치유적 입장이라 함은 현대인이 가지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제반 문제들을 바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싸매어주고 고쳐주려는 입장이다. ④ 지로적 입장이라 함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 성도들의 삶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길을 보여주려는 입장이다. 설교자는 길을 인도하는 목자이기 때문이다.
 
3. 목회자로서 설교준비와 강론실제

목회자에게 설교준비는 평생의 과제이다. 그것이 설교 분류상 어떤 형식의 설교이건 상관없이 설교 한편을 작성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설교 대다수가 남의 것을 베끼거나 표절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설교 초년생의 경우 본인이 설교 구상과 내용 구성, 원고 작성에 소양이 없거나 미숙하다고 하여 처음부터 설교 도용의 유혹에 빠져서 안된다. 자신 없고 어렵더라도 직접 설교 준비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목사가 한편의 설교를 만들기까지는 누구든지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본다. 먼저 설교의 착상인데 곧 ‘이것이다’ 하는 영감의 불빛이 섬광처럼 반짝하고 와야 한다. 그것은 기도하는 중일 때도 있고, 성경을 묵상하는 중일 때도 있고, 사색하고 명상하는 중일 때도 있다. 강해 설교나 주해 설교일 때는 본문의 연속성이나 특정 본문에 대한 해석을 중심하기 때문에 착상의 부담이 덜하나 본문 설교와 제목 설교의 경우 직관력과 상상력, 조직력과 분석력이 받쳐줘야 하므로 착상의 영감이 아주 중요하다. 강해 설교가 아닌 제목 설교와 본문 설교일 때 그 설교의 본문을 정하고 전체 구성에 따른 제목을 짓게 된다. 제목은 가급적 무난하면서도 품격과 개성이 돋보이도록 작명하는게 좋다.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는 우선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성경, 혹은 주석서와 사전류를 보게 되며 그 바탕 위에서 내용 전개를 하되 평소의 독서와 삶의 현장이 밑거름 되게 해야 한다. 또한 설교에서 창문과 같은 예화의 경우, 이것이 너무 없으면 통풍이 안되므로 답답하게 느껴지고 이것이 너무 많으면 외풍이 너무 세서 예화가 본문을 몰아내는 꼴이 된다. 예화는 양념이나 조미료와 같아서 이것이 적당할 때에 제 맛이 나는 법이다.

이렇게 해산의 진통을 경과하여 작성된 설교가 매주일 강단에서 선포되므로 설교는 원고화된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으로 청중의 심령에 전달되는 것이다. 말씀의 선포와 전달이 없는 설교문은 작문이요 저작일 뿐이지 설교가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직접 기록을 남기지 않으셨으나 진실로 권위있는 설교자이셨다.(마7:28-29) 영국의 청교도 설교자 리챠드 백스터는 ‘죽어가는 사람이 방금 죽어가는 사람에게 설교하듯이 했다’며 긴박하고도 절실한 심정으로 설교했음을 고백했다. 미국교회의 대각성운동 지도자 요나단 에드워즈는 코네티컷 엔필드에서 1741년 7월 8일에 ‘진노하신 하나님의 수중에 놓인 죄인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바 미국의 종교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로 평가받는다. 그의 설교는 쉼 없는 성경탐구와 경건훈련 및 절제의 삶 때문에 넓고 심오한 깊이가 있어 당시 원고 설교였지만 모두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두려워 기둥을 부여잡은채 살려달라고 매달리며 더러는 바닥을 구르면서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조지 휫필드는 메소디스트로 출발했으나 미국인 요나단 에드워즈의 칼빈신학 전수로 감화를 받아 칼빈파 메소디스트가 된 인물로 설교의 전달 능력에서 누구보다 탁월했다. 그가 광부들에게 설교했을 때 ‘그들이 은혜 받았다는 첫 번째 증거는 석탄 가루로 얼룩진 검은 뺨 위로 눈물이 주체 할 수 없이 흐르면서 생긴 흰 자국이었다’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할 정도였다. 그는 교회들이 그에게 설교의 기회를 막자 예수님의 경우처럼 야외설교를 택하였고 때로는 2만명, 혹은 3만명이 모여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고 했다.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하여 영국, 스콧틀랜드, 미국의 많은 유력자들이 휫필드의 놀라운 설교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56세로 임종하기까지 34년간 오직 설교에 충성하여 1만 8000번이나 공중앞에서 설교한 것으로 추산한다. 과연 목사의 직무는 오직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이어서 이 일에 전무해야 한다

끝으로 제네바의 개혁자 존 칼빈의 설교사역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 위대한 개혁자는 오직 말씀에 충성한 주의 종이었다. 이는 그가 27세에 쓴 ‘기독교강요’를 통해 성경의 진리를 신학적으로 체계화 했고 신구약 성경을 주석해 ‘주해의 왕’이라 일컬음 받았으며 설교사역에 진충갈력(盡忠竭力)하여 엄청난 설교문을 남겼다는 사실을 보아 자명하다. 그의 설교를 받아 쓴 프랑스 난민출신의 속기사 드니 라그니에(Denis Raguenie)를 비롯한 여러 조력자들에 의해 (1549-1560) 2043편의 설교가 기록되었다. 그 외에 263편의 설교가 첨가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460편이 된다고 한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설교자로서 충실하였는지 알 수 있다.

칼빈 선생은 그의 유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 가장 순수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했음을 선언합니다. 한편 내가 진리를 반대하는 자와 논쟁을 벌일 때에도 결코 못된 꾀를 쓴 적이 없으며 굳건한 믿음이 없이 처신한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기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모쪼록 칼빈의 신학과 목회를 추종하는 이 땅의 장로교 목회자들이 자기가 설교자인 사실에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오로지 강단봉사에 헌신하고 충성하므로 한국교회가 신본주의와 성경중심의 교회본연을 회복하고 활력과 신망과 권위의 교회로 변화하여 16세기 제네바의 개혁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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