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태 목사(울산태화교회)

선한 싸움을 다한 인생의 상급은 큽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살아가며 도전하고 결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최후를 맞을 준비를 하면서 디모데에게 준 유언서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디모데후서를 ‘원로의 유언장(the testament of the patriarch)’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의 대선배요, 스승이요, 원로인 바울이 믿음의 후배요, 제자요, 젊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준 마지막 고별사와 같다는 뜻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디모데후서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인 색채가 짙은 한 원로의 최후 유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바울의 일생을 요약하는 세 마디가 나타납니다. ‘싸웠고’, ‘마쳤고’, ‘지켰노라’입니다. 이제 곧 순교하게 될 바울은 자신의 일생을 운동선수(athlete)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애를 가장 극명하게 요약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첫째,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인생’이었습니다.

바울은 싸울 일에 싸우는 전투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선한 싸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싸웠다’는 이미지는 고대의 여러 운동 종목들 가운데 ‘레슬링(씨름) 경기’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 레슬링(씨름)은 목숨을 건 사투입니다. 둘 중에 한 사람이 링 위에서 죽을 때까지, 링 밖으로 밀려날 때까지 피 흘리며 싸우는 난투입니다. 끝장이 날 때까지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나가기 위하여 참 고통스러운 싸움을 했습니다. 굶고, 매 맞고, 돌에 맞고, 수감되고, 파선된 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한마디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을 설립하고, 성도들을 일으키고, 교회와 성도들을 더 견고하고 강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일에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결론은 사도 바울이 링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목숨을 각오하고 이와 같은 싸움을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하는 싸움이 선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걸고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싸움이 선한 싸움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싸움이 먹고 살자고 싸우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과 신앙의 싸움은 하나님의 선한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명하시고 허락하신 분명한 사명을 자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거룩하고도 착한 싸움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달리는 인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달리기하는 선수가 끝까지 완주해서 면류관을 쓰는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완주했다고 합니다. 복음의 경주를 완주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신앙 경주 앞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핍박과 방해, 수감생활, 때로는 모략과 중상을 당하여 일어설 수 없을 정도가 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애물 앞에서도 바울은 신앙경주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 복음의 목표를 향해 달리기를 완주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끝까지 하는 사람, 완주하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 중에 “신앙생활을 영웅적으로 화려하게 할 생각하지 말고 한 발 한 발, 하루하루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하라”, “신앙생활에 일희일비 하지 말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사역과 신앙에서 완주하는 달리기 선수들이 될 것을 소원합시다. 때로 낙심과 시험거리가 찾아오고 환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결코 중단하지 아니하고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수들, 복음의 완주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바울은 ‘믿음을 지키는 인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킬 것을 지키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리와 지조를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나와 친구가 되시고, 나의 생명이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시고 부활하여 주시고 임금이 되어주시고 구주가 되어주셨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약속했습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주님을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믿음은 저절로 있어지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값을 지불하고 참고 싸우면서 지켜야만 내 마음과 삶에 보존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놀라운 말씀은 “그 믿음을 지켰던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시온의 영광을 누리게 되”더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들이 나라가 망하고 고향과 성전을 떠나서 포로로 비극적인 삶을 살아갈 때 믿음의 의리와 지조를 지키는 남은 자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생명을 건 도전이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의리와 지조를 틀림없이 지켜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는 시대에 믿음을 바로 지켜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절박하게 예수를 부르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것 같고 의지하고 누릴 것이 너무 많아 보이는 이 풍요의 시대에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에 대한 의리와 지조를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안팎으로 수많은 장애물들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향하여 올곧은 자세를 갖지 못하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섭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하기를 원하는 것은, “나는 내 믿음을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과 정반대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난 데마와, 갈라디아로 간 그레스게, 그리고 달마디아로 가버린 디도 같은 사람들입니다(10절).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큰 해를 끼쳐서 바울이 주님께서 대신 원수를 갚아주실 것을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한 때 바울의 제자요 동역자로서 예수를 잘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자 예수와 바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버린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선한 싸움을 중단하고 달려갈 길을 완주하지 못하고 중간에 기권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의 지조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삶을 살아갈 것을 도전하고 결심해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던 바울에게 위대한 상급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8절) 그 면류관과 상급은 우리의 의로운 재판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마찬가지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신앙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고, 믿음의 지조를 지켜낼 모든 사람들에게 주실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싸우고 달리고 지키는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질 동일한 상급입니다.

로마의 시이저는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 경주를 다 마치게 될 때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 바울처럼 말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싸웠노라, 마쳤노라, 지켰노라!”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