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개혁주의 장로교 교회정치 ④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 및 저항사상

두 권세는 구별되지만 나누거나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 관계 속 하나님의 나라 실현
신자는 선한 양심으로 순종하되 권세자 불법 행위에는 정당한 방식으로 항거해야


중세 로마 가톨릭의 비성경적 교회직제 및 예배형태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되었고 루터파와 개혁파 전통을 낳게 되었다. 개혁주의는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쳐(Martin Bucer, 1491~1551)를 위시하여 스위스 제네바 존 칼빈과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를 통하여 태동되었으며, 영국 종교개혁의 잉태자였던 청교도들 가운데 스코틀란드의 장로교도 존 녹스(John Knox,1514~1572), 잉글랜드의 장로교도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전통이 전수되었다. 따라서 본고는 개혁주의 시발자였던 존 칼빈과 베자 그리고 청교도들(Puritans)의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전통에 입각한 사상을 스케치하고자 한다.
 
 
▲ 윤종훈 교수(총신신대원·교회사)
존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두 정부론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부활체를 보여주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있음을 선포함으로서 두 왕국의 주인이심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어거스틴은 <신의도성>을 통하여 영적 왕국세계에 하나님 사랑과 자기사랑의 영역이 존재함을 역설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왕국모티브는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에게 전수되었고 교회와 국가의 두 왕국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두개의 검(Two Swords) 이론을 반박함으로서 국가가 교회의 영적질서에 간섭하거나 개입해서는 안되며, 교황이 국가를 통제하거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유일한 대행자(Agent)로 묘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존 칼빈은 1536년 <기독교강요>를 위시하여 다양한 <주석들>을 통하여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한 루터의 기본적인 주장에 동의하되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더욱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 정부 형태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직의 행정체계를 구축함으로서 루터와 츠빙글리의 두 왕국론과 입장을 달리하였다.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상관성에 대한 입장은 장로교전통의 개혁주의 정치론의 사상적 기조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는 잉글랜드의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두 왕국론을 형성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칼빈은 세상이 두개의 정부로 구성되었음을 주장하였다. 그 중 하나는 영적인 정부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경건을 실천하도록 양심이 통치하며 영혼을 관리하고 내적인 마음에 거주한다. 다른 하나는 세상 정부로서 인간의 삶을 주관하며 시민권을 관장하며 인간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직성 그리고 절제성을 관장하는 영역이다. 전자는 영적왕국이며 후자는 세속적 왕국이다. 비록 교회와 국가는 구별되어야하지만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완전히 나누어지거나 분리시켜서는 안되는 유기적인 관계성 속에 놓여있다.

칼빈은 세속정부는 일시적이며 세상적이고 머지않은 장래에 사라질 것이며, 진정한 진리와 영원한 세계에 대한 복락을 상실한 영역으로 보았다. 반하여, 영적정부는 하나님의 순수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진정한 의의 본질이며 하늘나라의 신비를 간직한 영역으로 보았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이 지적한 바처럼 마지막 날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세상 왕국은 타오르는 불과 함께 사라질 것이며, 불완전한 세상 왕국의 질서가 새롭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임을 주장하였다(고전 15:27; 롬 8:19~22, 벧후 3:10~11).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상관성을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노력하였다. 영적 왕국은 비가시적이자 진정한 공동체임에 반하여, 세속 왕국은 가시적이고 일시적임과 동시에 안개와 같이 사라질 영역임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영적 왕국인 교회 공동체를 가르침과 양육 그리고 예배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교회 가르침은 세상 정부안에 필수적으로 실시되어야할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목회자의 말씀 선포는 절대적으로 성경에 근거해야하며 청중들은 목회자의 성경적인 가르침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받아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상관성 이해에 관한 재세례파와 로마 가톨릭 입장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박하면서, 영혼과 몸, 일시적인 현세의 삶과 영원한 내세의 삶이 구별되듯이 교회와 국가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세속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되, 국가는 교회가 복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외적 질서와 안정을 유지시켜야 하며,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말씀이 선포되도록 조력해야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신자들은 국가 정부가 선함과 정직 그리고 무법한 자들에 대한 처벌을 통하여 평화로운 국가공동체를 수립하도록 힘써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사 49장, 시편 2편, 딤전 2:2).

칼빈의 두왕국론에서 주목할 점은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을 통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단자들과 거짓교사라 할지라도 이들에 대하여 결코 검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시편주석을 통해 칼빈은 심지어 악한 정부일지라도 사람을 선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적 의지가 담겨있으며, 아무리 악한 정부일지라도 무정부적 국가형태보다 더 안전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가 정부가 주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주장을 강요할 경우 사적인 양심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근거하여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시민은 국가의 법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무력 및 폭력시위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무력불가 사상은 개혁주의 사상 전수자였던 베자의 시대적 상황에서 보다 새롭게 발전된 형태로 전개되었다.

테오도르 베자의 저항사상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사상의 동반자였던 베자는 교회와 국가의 두 왕국론에 대한 칼빈의 주장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게 수용하였다. 베자는 초기 활동 속에서 칼빈의 두왕국론을 계승하여 신자는 이 세대와 장차올 세대, 일시적 영역과 영원한 영역에 속한 자로서 세속 법(secular law)에 절대 순종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베자는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의 두왕국론 입장에 무게를 두면서 국가 정치 질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토록 하는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섬기며 헌신하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로마의 불합리한 칙령에 따라 고난을 당하였으나 결코 사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던 점을 들어 국가의 권위를 존중할 것을 권고하였다. 따라서 스코틀란드의 존 낙스가 영국 메리여왕에 대하여 강렬하게 항거하였을 당시, 존 칼빈과 함께 베자는 낙스의 저항사상에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강한 우려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당대 정치적 현실의 암담함을 경험하였던 베자는 점점 저항사상에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베자는 점점 성경에 입각한 합법적인 저항의식과 사상으로 발전되어갔다. 그는 칼빈의 교회와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마틴 부쳐의 마태복음 주석인 In Evangelia Matthaei(1530)과 존 포넷(John Ponet, 1514~1556)의 저항론을 담은 작품인 A Shorte Treatise of Politike Power(1556)의 저항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루터파 신앙고백서인 Magdeburg Confession(1550)의 폭군적인 전제군주에 대한 저항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드디어 베자는 자신의 작품인 De haere-ticus(1554)를 통하여 폭군에 대한 성경적 저항사상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1559년 그가 저술한 신앙고백서인 The Confession에서는 저항사상에 대한 입장을 약화시켰지만 제 2판에서 자신의 저항사상에 대한 입장을 보다 강하게 피력하였다. 그는 1560년대에 프랑스 위그노들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서 그의 저항사상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러나 베자의 저항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다름 아닌 1572년 프랑스 위그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던 성 바돌로매 대학살 사건(St. Bartholomew’s Day Massacre)이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국가 권력에 대한 강한 저항사상을 구축하게 되었다. 베자는 대학살이 자행된 2년 후 그의 작품 Du dorit des magistrats을 통해 멜랑히톤의 순종론 입장을 넘어서 국가 통수권자의 악행에 대한 강한 저항사상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통치자와 시민의 이중계약론(Double Contracts)을 근거로 각 개인은 직접적으로 악한 군주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하위행정관에게 군주의 해악성을 알리고, 절차에 따라서 국민과 군주의 계약에 보호자인 삼부회(Estates General)에게 이를 통지함으로서 적법한 절차에 근거하여 악한 군주를 처리하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함으로서 매우 논리적이며 일관성있는 제안을 제시하였다.
 
청교도들의 영적왕국과 세속왕국의 상관관계

존 녹스는 1555년 제네바에 도착하여 칼빈과 베자와 신학적인 대화를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전수받았다.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가 정치의 위기 속에서 진정한 개혁가로서 험난한 삶을 살았다. 녹스는 잉글랜드 블러디 메리의 로마 가톨릭 교회정치를 비난하며 여왕의 권위를 거부하는 작품을 제네바에서 익명으로 출간하였다(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1558). 칼빈은 녹스의 출간작품 내용이 급진적이며 저항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불만족하였으며 급기야는 제네바에서 이 작품을 구매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비록 녹스가 활동하기 이전에 잉글랜드에는 크리스토퍼 굿맨을 비롯하여 청교도 창시자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1491~1536), 토마스 빌리(Thomas Bilney, 1495~1531) 로버트 반즈(Robert Barnes, 1495~1540)등 당대 위대한 청교도들이 폭군에 항거하여 성경적인 교회공동체와 진정한 예배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특히 녹스의 저항사상은 매우 여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영국 장로교주의 창시자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앙글리칸 교회형태에 반기를 들고 당대 장로교주의자 왈터 트라버스(Walter Travers, 1548~1635), 존 필드(John Field, 1545~1588), 토마스 윌콕스(Thomas Wilcox,1549~1608)등과 함께 1572년 The First Admonition to the Parliament를 출간함으로서 국가-교회 공동체의 분리를 주장하며 장로교주의의 최초의 대중 선언문을 낭독하게 되었다.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결코 교회와 국가의 관계 속에서 영적 기관인 교회의 권위와 주인은 결코 국가의 통수권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서, 주님은 아버지의 증여와 그의 피값으로 지불하였으며 말씀과 성령으로 사단을 정복하신 분임을 성경적 진리에 근거하여 강하게 주장하였다(Owen, XV:310). 오웬은 국가교회(National Church) 공동체의 비성경적 관행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으며, 교회의 계급화된 감독정치형태도 성경의 가르침에 상반됨을 역설하였다.
 
교회와 국가 상관관계, 개혁주의 전통

결론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한 개혁주의 전통은 다음과 같다: 근본적으로 모든 세상 권위와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으로 부터 비롯되었으며, 하나님이 부여하신 두 권세는 구별되지만 결코 나누거나 분리됨이 없이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기관으로 이해하였다. 악한 정부 또는 군주에 관한 신자의 입장에 대하여 칼빈의 주장은 매우 순종적이고 종말론적이며 권위를 존중하되 말씀의 지침이 우선됨을 강조함에 반하여, 칼빈의 후대로 갈수록 칼빈의 주장을 넘어서 정당한 저항의식으로 발전되어갔다. 이는 각 시대마다의 특징적인 정치적 역학구조에 근거한 차이점으로 보여진다.

신자는 개혁주의 전통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권세를 선한 양심으로 존중하며 순종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며, 말씀에 위반된 권세 및 악한 욕심에 근거한 권세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고도 즉각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항거하되 폭력과 무력을 동원하기 보다는 정당한 시위와 논증을 통해 이를 바로잡고 그리스도의 평화의 나라가 회복되도록 목숨을 건 순례자의 인생을 살아가야하며, 불법한 권세를 향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는 행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가장 비겁하고도 야비한 행위라는 사실을 가슴속 깊이 인각하며 진정 깨어있는 선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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