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하나님 말씀 ‘사모함’으로 들어야
 

앞서 두 번에 걸쳐 설교를 ‘경외함’으로 들으며, ‘기도함’으로 듣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언급하였다. 세 번째로 올바른 설교 청취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듣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향한 자신의 사모함이 얼마나 큰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 119:20). 더 나아가 그 시인은 말하기를,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함으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마음이 상한다는 것과 헐떡인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는지를 훌륭하게 묘사해 주는 것이다.

다른 시편에서 경건한 시인은 하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함을 표현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1~3).

신약에서 베드로 역시 구약 선지자들이 구원의 은혜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 상고하였다고 기록한다(벧전 1:9~11). 심지어 천사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는 이처럼 주의 깊게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청취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주 예수로부터 칭찬을 들은 것은 그녀가 주님의 발아래 앉아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말씀을 기뻐하여 들었기 때문이다(눅 10:42).

따라서 설교를 들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설교 청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지식의 축적이 목적이 아니다. 말씀 가운데 친히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설교란 최우선적으로 마음과 연관된 내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래 전에 한 중국 선교사가 찍은 사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선교사는 예배의 한 장면을 사진에 담았는데, 교회당은 황무하고 눈에 띄는 장식도 없었다. 거기에는 심지어 의자조차 없었다. 약 30여명의 남녀 교인들이 오래되고 누추한 옷을 입고 마루로 된 바닥에 앉아 예배 드리는 모습이었다. 필자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청중들이 모두 한결 같이 설교단을 향해 몸을 앞으로 비스듬히 구부린 채 열중하여 듣는 것이었다. 필자는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이렇게 듣기를 기도해 마지않는다.

마지막 네 번째로, 올바른 설교 청취는 ‘분별력’을 갖고 듣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사모함으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의 지적인 사고 작용을 제한하는 맹목적인 청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설교 청취란 긍정적 의미에서 분별력을 갖고 듣는 것이다. 듣기 행위는 결코 수동적인 일이 아니라 능동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집중적으로 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별력 있는 청취를 통해 설교자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증거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베뢰아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바울의 설교)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행 17:11).

맹목적 순종은 진리의 주님께서 결코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양들이 지닌 특성은 그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따른다(요 10:4). 성도가 참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것은 오직 기록된 말씀, 성경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별을 위해 우리는 성경을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읽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현미경을 가지고 읽듯이 성경을 찬찬히 세밀하게 읽는 동시에, 망원경을 가지고 읽듯이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읽기에 있어서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성경읽기가 필요하다.

분별력 있는 설교 청취를 위해 설교를 들을 때에 ‘요점적기’를 추천할 만하다. 16, 17세기의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청교도들은 설교 시간에 ‘설교요점 적기’로 유명하다. 이것은 ‘가정예배’를 돕는데 매우 유용하였다. 청교도들은 주의 날에 교회에서 들은 설교를 가장(家長)이 가족들과 하인들에게 다시금 전달하고 설명하였다. 예배시간에 기록한 설교요점은 다시금 설교를 회상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관습이라도 지혜롭게 시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손해가 될 수도 있다. 설교 요점을 적기 위해 설교자의 눈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정보는 얻을 수 있으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요점을 적은 내용은 반드시 개인적 묵상과 소모임의 교제와 나눔을 위해 활용되어야 그 유익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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