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완성이 안식일을 통하여 확인되어졌고, 안식일은 그래서 복된 날로 정해졌다. 그러나 인간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날은 새로운 날의 그림자가 되어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게 한다. 이 영원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들 가운데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는 영원한 세계 즉 하나님나라를 이미 간직하며 또한 사모하는 신앙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로서 주일성수는 구속사적 맥락을 통하여 확실히 가르쳐야 되고 교육해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역사의 장엄함을 제대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성수는 또한 세상과 구별되고 교회를 보호하는 제도의 문제이다. 본질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시스템이 그것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은 관념이 아닌, 전 포괄적 삶의 표현이다. 우리의 신앙은 생각에만 그치거나, 말로만 수놓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일종의 어떤 양식을 수반한다. 이 양식은 제도이고 더 나아가서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가 변질되거나 무너지게 된다면 제도 안에 있는 본질도 변질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로서 주일성수는 본질을 지키고 보호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가르치고 교육해야 한다. 그래야 본질이 더욱 본질로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믿음이 주는 자유에 치중하여, 의도적으로 제도로서의 주일성수를 등한히 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또 반대로 지나치게 제도에 집중함으로 본질이 주는 정신을 놓치고, 오히려 성도들을 얽어매는 수단으로 활용하며 본질이 주는 정신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의 태도가 우리의 답이 아닐까 싶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도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스스로 자유할 수 있지만,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위하여 절제하는 가운데 유대 정결예식 문제로 사도 베드로까지 책망하는 바울의 모습이야말로 균형 잡힌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이러한 삶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부한데도 처할 줄 알게 하고 가난한데도 처하게 할 줄 아는 거대한 선택의 자유를 준다. 우리는 본질을 사수하되 제도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제도를 존중하되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는 개혁주의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 교회가 서 있는 곳은 포스트모던의 땅 위이다. 이제 교회는 사수해야 할 본질과 지켜야할 제도를 명확히 해야 할 때이다. 특별히 주일성수는 이 양쪽을 다 포함하고 있다. 어느 한쪽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양쪽 모두를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세대의 신앙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일성수는 일차적으로 나의 신앙의 표현이지만, 더 나아가 ‘다음세대’ 신앙을 지켜주는 울타리인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는 죄의 문제를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의 자유문제로 교회를 확고히 세워나가게 하는 틀인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정재영 기자 jyjung@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