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재경 목사(총회교육진흥원)
그리스도인이 주일성수 문제를 다룰 때는 먼저 안식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이미 안식에 거하여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여 있는 성도들은 주일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주일성수가 신앙의 본질을 말해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완성이 안식일을 통하여 확인되어졌고, 안식일은 그래서 복된 날로 정해졌다. 그러나 인간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날은 새로운 날의 그림자가 되어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게 한다. 이 영원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들 가운데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는 영원한 세계 즉 하나님나라를 이미 간직하며 또한 사모하는 신앙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로서 주일성수는 구속사적 맥락을 통하여 확실히 가르쳐야 되고 교육해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역사의 장엄함을 제대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성수는 또한 세상과 구별되고 교회를 보호하는 제도의 문제이다. 본질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시스템이 그것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은 관념이 아닌, 전 포괄적 삶의 표현이다. 우리의 신앙은 생각에만 그치거나, 말로만 수놓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일종의 어떤 양식을 수반한다. 이 양식은 제도이고 더 나아가서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가 변질되거나 무너지게 된다면 제도 안에 있는 본질도 변질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로서 주일성수는 본질을 지키고 보호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가르치고 교육해야 한다. 그래야 본질이 더욱 본질로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믿음이 주는 자유에 치중하여, 의도적으로 제도로서의 주일성수를 등한히 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또 반대로 지나치게 제도에 집중함으로 본질이 주는 정신을 놓치고, 오히려 성도들을 얽어매는 수단으로 활용하며 본질이 주는 정신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의 태도가 우리의 답이 아닐까 싶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도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스스로 자유할 수 있지만,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위하여 절제하는 가운데 유대 정결예식 문제로 사도 베드로까지 책망하는 바울의 모습이야말로 균형 잡힌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이러한 삶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부한데도 처할 줄 알게 하고 가난한데도 처하게 할 줄 아는 거대한 선택의 자유를 준다. 우리는 본질을 사수하되 제도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제도를 존중하되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는 개혁주의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 교회가 서 있는 곳은 포스트모던의 땅 위이다. 이제 교회는 사수해야 할 본질과 지켜야할 제도를 명확히 해야 할 때이다. 특별히 주일성수는 이 양쪽을 다 포함하고 있다. 어느 한쪽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양쪽 모두를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세대의 신앙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일성수는 일차적으로 나의 신앙의 표현이지만, 더 나아가 ‘다음세대’ 신앙을 지켜주는 울타리인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는 죄의 문제를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의 자유문제로 교회를 확고히 세워나가게 하는 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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