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개혁주의 장로교 교회정치 ① 참 교회의 본질과 속성

온전한 교리 일치와 형제적 사랑의 두 고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될 때만 참된 교회
교회는 진리 가운데 사랑해야 하며 무엇보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 문병호 교수(총신대·조직신학)
1. 교회의 본질:그리스도가 머리이신 몸 된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체로서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러한 선택과 부르심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되었다(엡 1:4-5; 벧후 1:10). 따라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접붙임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 몸의 지체가 될 수 없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2-23; 5:30).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시고(요 19:30),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셨다(고후 5:21; 빌 3:9). 교회는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언약 백성의 모임이다(롬 3:24; 4:6). 성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부어지는 동일하신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요 15:26; 행 2:33), 한 부르심, 한 믿음, 한 세례, 한 소망 가운데 한 몸이 되어, 함께 그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간다(엡 4:4-5, 15-16).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롬 6:5), 그와 함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므로(롬 8:17), 그와 형제라 일컫는다(히 2:11). 그러므로 성도 각자가 교회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선행(先行)한 후에야 성도 서로 간에 형제적 일치와 사랑이 후속(後續)한다.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나란히 고백하는 것은 이러한 뜻에서이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곧 신앙고백서에 따라서 유형(有形)교회라고 일컫는 가시적 교회와 무형(無形)교회라고 일컫는 비가시적 교회가 있으며, 그 머리는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제25-26장). 비가시적 교회는 택함 받은 사람들의 총수(總數)로 이루어진 교회로서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고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가시적 교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성례를 거행하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함께 자라가고, 주어진 은사대로 직분을 수행함으로써 서로 섬기는 지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어거스틴이 가시적 교회에 관하여 말한 바와 같이,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오직 주님만이 끝까지 구원으로 이끄실 자를 아신다(마 24:13; 딤후 2:19; 벧전 1:5, 8-9).
 
2. 참 교회:교리적 일치와 형제적 사랑

참 교회의 표지(標識)로는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의 합법적 거행,” “권징의 합당한 시행,” 세 가지가 주로 거론된다. 그런데 말씀의 제정에 따른 성례의 거행만이 합법적이고, 말씀의 규범에 따라 성도를 돌이켜 세우는 권징의 시행만이 합당하므로, 결국 말씀이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유일한 표지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교회의 첫 번째 원리로 여겼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게 존재한다(엡 1:23; 5:23-32). 교회의 순결함은 말씀의 순결함에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딤전 3:15).

교회는 건전하고 올바른 교리를 보존하고, 가르치고, 변증하고, 수호할 의무가 있다. 교리가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다. 모든 것이 온전해 보여도 전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온전치 못하다면, 그 교회는 거짓 교회요 죽은 교회이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임재 가운데 가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머물기도 했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혈관에 흐르는 피와 같이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으면 살아있다는 이름만 있을 뿐 실상은 죽은 것이며(계 3:1),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도 없고 정결한 행실에 이를 수도 없다(히 9:14; 10:29).

교회는 온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라는 두 고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될 때에만 참되다(빌 2:1, 5; 롬 15:5). 참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배하고 그리스도의 법규가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가 그 나라의 통치방식이다(롬 8:9, 15-17; 빌 1:19; 고후 3:17-18).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듯이(요 10:14, 27) 진리에 속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소리를 듣는다(요 18:37). 삼위일체 하나님,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무조건적 은혜, 주님의 재림과 몸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한 고백이 온전치 않은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회칠한 무덤보다 더 악취가 나는 곳이며, 생기가 없는 마른 뼈의 집산(集散)과 다를 바 없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곧 그들이 전한 복음 위에 세워졌으며, 그 머릿돌은 그리스도 예수시다(엡 2:20; 시 118:22; 마 21:42; 막 12:10; 눅 20:17; 행 4:11; 벧전 2:7).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므로(골 2:3), 오직 그에게 부착(附着)할 때에만 교회는 생명의 진리에 거하고 생명의 길에 서게 된다(요 14:6). 그가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시고(행 20:28),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행 2:33).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의 주요”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주님의 터 위에서만 온전해진다(히 3:1; 히 12:2). 그가 머리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므로 교회는 영원하다(히 13:8).
 
3. 교회 안에서 자라감:고백, 말씀, 기도의 연합체
 
하나님은 놀라운 섭리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 복음을 맡기셔서, 언약의 자녀가 교회 안에서 듣고, 배우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신앙이 자라고, 고백이 온전해지며, 선한 행실이 더하게끔 하셨다. 교회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유모와 같고 더 자란 아이에게는 학교와 같다. 성도는 아버지의 부성적(父性的) 사랑과 교회의 모성적(母性的) 돌봄을 함께 받아야 한다. 초대교회의 키프리안이 말하고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이 즐겨 인용하듯이, “누구든지 하나님 자신을 아버지로 삼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또한 어머니가 된다.”

하나님은 교회의 교육을 통하여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있어서 장성하길 바라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하신다(엡 4:12-13). 교회는 말씀을 영적 양식으로 먹인다(마 4:4).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특별한 은혜는 사람의 혀와 입을 사용하셔서 그 지체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교회의 일꾼은 말씀의 가르침에 순복하고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가르치는 경건한 사람이어야 한다(딤전 3:2-3, 8-13; 딛 1:7-9). 하나님은 이러한 일꾼을 친히 조성하셔서 보내주신다(마 9:38). 직분이 있는 곳에 은사가 있다. 하나님은 은사를 예비하시고 직분을 주신다.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필요한 성령과 능력을 먼저 부여하셨다(눅 21:15; 24:49; 막 16:15-18; 행 1:8).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교회의 직분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것을 뜻하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는다(갈 1:1; 롬 1:1, 5; 고전 1:1).

하나님의 임재는 교회를 통한 말씀의 임재였다. 가르치는 직분이 사도와 교사에게 부여되지만 오직 성령의 감화로 듣게 하시고 그 들음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2:4; 3:7; 15:10; 갈 3:2).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도는 교회의 어머니 됨을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먼저 고백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백과 말씀과 기도에 있어서 자라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며(롬 10:9-10), 양자의 영을 주심으로 무엇이든지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면 친히 아들이 이루게 하신다(요 14:16; 15:7; 요일 5:14). 그리하여 범사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신다(엡 4:15).

4.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하는 교회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가 완전하지 않듯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오류가 없지 않다. 고린도교회에는 성도들 사이에 분쟁과 시기가 끊이지 않았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그 가운데 있었다. 은사가 무분별하게 남용되었으며 사랑으로 서로 교통하지 못하였다. 인종별, 계층별, 남녀노소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으로 영을 분별하지 않고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자리에 사람을 세우고 바울에, 아볼로에, 게바에 속한 자라 하면서 당을 짓는 일을 행하였다(고전 1:12).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회조차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면서(고전 1:2; 고후 1:1)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곳에 있기를 간구하였다(고전 1:3; 고후 1:2). 주님은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심으로 교회의 주름 잡힌 것을 펴시고, 티를 씻어내심으로써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엡 5:26-27). 교회는 거룩한 주님의 몸이지만(골 1:18, 24; 엡 5:30) 여전히 거룩해가는 과정에 있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교회는 날마다 진보하므로 거룩하다. 교회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말씀은 무오(無誤)하나 지상의 교회는 그렇지 않다. 교회 위에 말씀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 주님이 교회를 성결하게 하셨으나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참조. 히 9-10장). 그러므로 이 땅의 교회에게 주어진 제일 명제는 다음과 같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지고 있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교회는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여호와의 영원한 “거처”요 “쉴 곳”이 된다(시 132:13-14). 낮과 밤의 운행이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교회는 영영 쇠하지 아니한다(렘 31:35-36). 갈라디아 지방에는 다른 복음을 좇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 온전한 순결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곳에 여러 교회들이 존재한다고 전하였다(갈 1:2, 6). 교회의 성도는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가도록 해야 한다(마 11:29; 엡 4:3).

교회의 강령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마 22:37-40). 교회는 사랑하되 진리 가운데 사랑해야 한다. 무엇보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롬 14:19).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씀이 교회의 좌표를 설정해 준다(고전 14:40). 교회는 법으로 다스려진다. 그러나 그 위에는 덕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정치는 법치(法治)에 기초하되 궁극적으로 덕치(德治)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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