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과식의 시대, 덜 먹고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위해 쌓기보다 흘려보내며 배고픈 교회 배려해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창세기 3장에는 ‘먹는다’는 단어가 참 많이 나옵니다. 무려 18번이나 됩니다. 인간의 첫 범죄 사건에 ‘먹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첫 번째 죄, ‘먹음’

인류 최초의 죄악,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범죄 내용이 무엇입니까? ‘먹는 것’입니다. 거창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도 “먹었느냐”, “먹었나이다”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 먹음의 문제로 죄를 저질렀고, 그로인한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먹는 문제는 해결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먹고 사는 것에 얽어 매이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창조된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까지 하나님은 식물을 주셨습니다(1:29~30). 그리고 인간은 먹는 문제에 매달릴 필요 없이 하나님이 주신 고상한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1:26~28). 이런 수준 높은 일에만 신경 쓰면 먹고 마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들처럼 먹는 문제에 매달리면서 범죄의 늪에 빠졌습니다.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단에 의해 먹는 것으로 범죄를 하였습니다.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갖 먹을거리를 맛이나 보았을까요? 그것만 먹기도 바빴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딱 한 가지 먹지 말라는 것에 매달려 먹고 맙니다.
 

먹어서 잃은 것들

아담과 하와의 먹음의 결과로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하와를 유혹하여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게 한 뱀에게는 흙을 먹으며 살게 했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서 먹지 말 것을 먹은 사람에게는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17-19절). 그렇지 않았으면 즐겁게 먹고 살았을 텐데, 먹는 것뿐만 아니라 좋은 것을 모두 잃었습니다. 출산의 즐거움이 아닌 고통을 겪어야 했고, 죽음을 격어야 했고,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먹는다고 다 배부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병이 들고 죽기도 합니다. 최초로 얻은 교훈입니다. 먹는 것만이 복이 아니고, 그것만이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이 안전사고 가운데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음으로 일어나는 사고가 많습니다. 소위 ‘삼킴 사고’는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주로 많이 삼키는 것은 장난감 등의 완구류와 생선가시, 구슬, 동전 등도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살충제나 중독성이 있는 것까지 삼켜서 위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니까 분별을 못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위험에 빠지는 것인데, 어른들이 먹지 않아야 할 것을 구별 못해 먹는 경우는 참 답답한 일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

창세기 25장에 보면 먹는 것 때문에 중요한 것을 잃은 사람 이야기도 나옵니다. 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 에서입니다. 이런 에서를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영성에 대한 경고로 삼고 있습니다(히 12:16). 신드롬(Esau Syndrome)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감격과 행복을 잃어버린 채 고통스러운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역시 먹고 마시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먹는 것, 마실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 15:23~24, 16:2~3, 민 11:4~5).

우리들도 먹는 고민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온갖 죄악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먹는다”는 표현은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마음도 먹고, 밥도 먹고, 돈도 먹고, 욕도 먹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먹고, 나라가 나라를 먹습니다. 아무 것이나 먹으면 배부를 줄 알고 닥치는 대로 먹어치웁니다. 그러나 먹는 것만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고, 너무 많이 먹어서 오히려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먹음’

신약의 첫 책인 마태복음에는 주님과 관련된 먹는 문제가 나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먹는 문제로 시험을 당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먹는 문제로 넘어졌는데, 둘째 아담으로 오신 주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4장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므로, 먹는 것으로 살고 그것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리신 주님이 당하신 첫 시험 역시 아담처럼 먹는 문제였으나, 주님은 그것을 이기셨습니다. 잡수시지 않으므로 이기셨습니다. 아담은 먹는 것이 풍성한 중에 더 먹으려다가 실패했지만, 주님은 40일을 주리시고 난 후에 당면한 먹는 문제를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먹지 않고도 배부를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여 주시며, 배가 고파도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선포하신 말씀이 천국이었습니다(마 4:17절).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배부른 자, 부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사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6장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의 관심사라는 것입니다(마 6:31).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마 6:33). 아담에게 주셨던 사명인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세상’, ‘천국’을 가꾸는데 관심을 가지면 나머지 문제들은 다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시하신 먹을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는 것이었습니다(요 4:34).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며 천국을 외친 세례 요한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 역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골몰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좀 덜 먹읍시다!”

우리는 왜 먹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좀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해 살벌하게 눈을 부릅뜨고 살기보다 지금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며, 적당하게 먹어 건강을 얻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고전 10:31).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좋은 것 먹고, 배 불리 먹어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롬 14:17).

오늘 우리가 직면한 이 세상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오랫동안 “잘 살아보자”고 외친 우리는 꿈꾸던 대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굶주리던 때에 가지고 있던 좋은 가치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정의도, 의리도, 아름다움도, 서로의 배고픔을 이해하고 배려하던 따뜻한 마음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것이 정말 잘 사는 것입니까?

이 세상의 큰 갈등과 아픔은 정말 배고픈 사람들 때문에 생기지 않습니다. 빵 한 조각이 없어서 남의 집 담을 넘는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이 병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심각한 문제는 너무 많이 먹는 사람들이 일으킵니다. 그만하면 배부를 텐데 계속 먹습니다. 그만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더 몸부림칩니다.

교회도 그 면에서 한몫해 왔습니다. 더 커지고, 더 많아지려고 말씀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교회가 가난해서 일어나는 문제보다 너무 부해서 일어나는 문제가 많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덜 먹고 나누어야 합니다. 쌓아두기 보다 흘려보내며, 배고픈 이웃과 작고 힘없는 교회를 배려해야 합니다.
많이 먹는다고 꼭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험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조금 먹었는데도 배부르고 행복할 수 있는 진정한 천국을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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