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개혁주의 장로교 교리 ② 오직 그리스도로 :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얻어
‘증보자가 없이는’ 하나님 아는 지식도 택함도 사함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어



1.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 문병호 교수(총신대·조직신학)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우리와 동일한 “혈과 육”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 되사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하심으로(요 1:1, 12, 18; 히 2:14; 4:15; 요일 1:1), “하나님의 큰 일”을 다 이루셨다(행 2:11; 요 19:30). 타락한 인류는 사망의 형벌에 속하고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도, 능력도 모두 상실해 버렸다. 그리하여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서 “구원의 창시자”요 “구원의 근원”이 되시려고(히 2:10; 5:9),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사,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갈 1:4; 엡 5:2, 25; 딛 2:14; 히 7:14, 26; 9:28; 10:10, 12).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대속(代贖)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시려고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 우리가 그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되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롬 6:22; 8:30). 그가 우리를 위하여 다 이루신 의는 모든 고난을 ‘당하신 순종’과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신 순종’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우리와 우리 가정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다(행 2:21; 4:12; 16:31; 요일 5:13). 오직 그리스도로(sola Christo), 우리가 구원에 이른다.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 구원의 의는 우리를 위하여 잉태되시고, 나시고, 사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오직 그리스도께 있다. 구원의 의는 교회의 의도, 직분자의 의도, 천사의 의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의이다. 로마 가톨릭은 이러한 진리에 정면으로 맞서서, 교황을 위시한 사제들의 중보와 천사들과 죽은 성인들과 마리아의 중보를 인정하는 극악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롬 10: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오직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 14:6). 오직 그만이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시다(요 6:55). 세상은 모두 어둠에 속하여 있으나, 오직 그 만이 “참 빛”이시며 “생명의 빛”이시다(요 1:8; 8:12). 오직 그만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만큼 양을 아시는 “선한 목자”시다(요 10:14-15).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이렇게 외쳐야 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2. 성육신의 필연성과 필요성:신인양성(神人兩性)의 중보자 그리스도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대속(代贖)을 구원의 방식으로 작정하셨다(엡 1:4-5). 주님이 여자에게서 나신 것은(창 3:15; 갈 4:4),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딤전 2:5),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을(엡 1:9)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칼빈은 이러한 성육신의 필연성을 “중보자가 없이는”이라는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수사학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첫째,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아는데 있다(마 11:27; 요 17:3). 아들을 믿어 아는 것이 아버지의 부성(父性)적 사랑과 호의와 돌봄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다. 오직 보내심을 받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능력과 지혜가 역사한다(고전 1:24; 롬 1:16). 주님은 우리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시며(요 10:9), 생명의 진리가 되신다(요 11:25; 14:6).

둘째, “중보자가 없이는” 택(擇)함도 없으며 사(赦)함도 없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신구약 전체 구속사(救贖史)에 미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씨앗”이셨다(갈 3:14).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예정되었다(엡 1:4). 하나님은 오직 그 아들로 위(位)를 잇게 하사(왕상 15:4), 우리도 또한 그와 함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롬 8:17; 엡 3:6).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로서(사 7:14), 우리를 위한 “종”이자(사 42:1), “의로운 가지”이자(렘 23:5-6), “목자”로서(겔 34:23-25; 37:24-28) 예언하였다.

셋째, “중보자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 이르는 오직 한 길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다(요 3:16).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김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히 9:24; 10:19-20).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골 1:15. 참조. 히 1:3), 그를 믿고, 보고,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보고, 영접하는 것이다(요 12:44-45; 13:20).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다(레 17:11; 히 9:22).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듯이(마 9:12), 타락이 없었다면 성육신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없었다면 우리를 위한 그의 죽으심과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고후 13:4; 고전 15:12-20; 빌 2:7-8; 벧전 3:18),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롬 6:5).
 
3. 중보자 그리스도의 삼중직:선지자, 제사장, 왕
 
중보자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다. 그의 계속적 중보는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심, 즉 전가(轉嫁)해 주심에 있다. 개혁신학자들은 언약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 점에 특히 주목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이다.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과 가르침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이 땅에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그가 하나님 나라의 “모사”와(사 9:6; 28:29) “증인”이(사 55:4) 되셔서 “영원한 의”를 드러내실 것이므로(단 9:24), 사람들에게 “큰 빛”이 비추어(사 9:2) 그들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고 믿었다(요 4:25). 예언의 말씀대로 응하여, 하나님은 이제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히 1:1-2).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오직 그의 얼굴에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다(고후 4:6).

둘째,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서(시 110:4; 히 5:6; 7:15) 자신의 몸을 거룩한 제물로 구별하셔서 드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요 17:19; 고후 5:18). 주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마 1:21; 눅 1:31). 죄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롬 5:10; 갈 3:10, 13; 골 1:21-22).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그리스도의 비하 곧 낮아지심은 성육신, 고난, 죽으심, 장사되심을 포함한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의는 그가 이 땅에서 수행하신 모든 역정(歷程)에 미친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셨다(마 20:28). 그는 우리의 “화목자”로 세움을 받았으며(롬 3:25)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었다(롬 5:10). 그는 “선한 목자”로서 “양”이 되셔서 친히 자기 자신의 목숨을 양을 위하여 버리셨다(요 1:29; 10:15; 롬 4:25). 그가 죽으심은 죽음에 삼킴을 당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삼키시기 위함이셨다(벧전 3:22). 그리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 동안 죽음에 종 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시고자 하셨다(히 2:14-15).

셋째, 그리스도의 왕직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구원과 관련해서 교회와 교인들 전체에게 미친다. 교회가 영원하듯이 그리스도의 왕국도 영원하다(단 2:44; 눅 1:33; 엡 1:20-23). 그리스도의 통치는 단지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은혜의 선물을 부여하심이 다스리심이다(엡 4:7).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의 은사를 내려주시고, 자신의 의로 우리를 채워주시고, 자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능하게 하시고, 자신의 부요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심이(고후 8:9) 곧 다스리심이다.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서 친히 다스리신다(엡 1:20-22; 빌 2:9; 고전 15:27). 보혜사 성령을 내려주심이 주님의 통치방식이다.
 
4. 보혜사 성령의 임재:“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주님은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떡과 잔을 나누어 주신 후,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내려주실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상세히 가르쳐주셨다(요 14-16장).

첫째,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영원히 계신다(요 14:16-17; 마 28:20). “임마누엘”이신 주님이(마 1:23)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갈 2:20; 골 1:27). 성령의 임재는 ‘단회적,’ ‘절대적,’ ‘인격적’이다. 성령은 두 번 임하시지 않고, 양적으로 임하시지 않고, 물질적으로 임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성령을 더 채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 내 안에 마음껏 사시도록 성경 읽고, 기도하고, 경건하게 살고, 회개하는 것이다(엡 5:18). 보혜사 성령은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영이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이(요 1:1), 이제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요일 2:24-25).

둘째,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요 14:26; 16:13; 요일 2:20, 27). 보혜사 성령은 주님 자신을 “증언”하신다(요 15:26).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요 14:20). “진리의 영”이 임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주님 못 박히신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갈 3:1).

셋째, 보혜사 성령은 ‘능력의 영’이다. 이는 ‘은혜의 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은혜 외에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능력이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면 ‘의지하는 능력’ 외에는 없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주님이 친히 행하신다(요 14:13-14). 성도의 순종은 ‘아멘의 순종’ 외에는 없다. 모든 순종은 주님이 다 하셨다. 우리의 순종은 오직 그의 “예”에 대하여 “아멘”하는 순종밖에 없다(고후 1:20).

이러한 보혜사 성령의 세 가지 특성이 주님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가운데 하신 다음 말씀에 모두 나타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임마누엘의 영)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진리의 영)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능력의 영)”(요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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