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암미 다문화가정 가을 야외예배.

 

다양한 문화 서로 다른 피부
동일한 ‘복음의 기쁨’ 나누다


마석 가구단지서 20년 전 시작한 외국인노동자 선교, 다문화사역으로 발전해
“엄마 역할 더 요구됐던 쉽지 않던 길, ‘벗이 되라’는 사명 소중하게 지켜갈 터”



그는 20년 만에 만났어도 봄동의 겉절이 마냥 상큼함은 여전했다. 가늘고 여린 다소 높은 톤으로 다문화가정과 이주노동자를 이야기 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 젊은 날에 경기도 남양주 마석 가구단지에 ‘입주’하여 외국인 노동자와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던 열정 또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땅끝 나그네>로 평생을 살아온 암미선교회 대표 김영애 선교사. 그를 만나면 기분이 업(UP) 된다.

올해 들어 수은주가 가장 높이 올라간 지난 주 수요일 오후, 서울 강변역에서 덜컹거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구겨 넣은 채 길다란 북한강 줄기를 따라 암미선교회가 위치한 장현리를 찾았다. ‘다문화센터’라 이름 붙여진 부동자세의 4층 건물이 먼저 반겼다.

“이 건물을 증축하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만큼 힘들었습니다. 거기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서 지정하는 사회통합 프로그램 심사에서도 떨어져 낙담이 컸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렇게 반듯한 우리 처소가 생기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는 소녀시절 감성을 듬뿍 담아 미주알고주알 다문화센터와 관련된 증축 이야기를 들려줬다. 말끝마다 “당시는 힘들었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며, 모든 다문화가정 사역에 하나하나 의미를 담아 설명했다.
 

암미선교회 김영애 선교사가 생명부지의 마석 가구단지에 또아리를 틀고 20년 넘게 살 줄은 아무도 몰랐다. 더군다나 피부색깔과 언어조차 다른 이방인들과 평생 동고동락 할 줄은 본인조차 생각지 않았던 의외의 일이었다. 그는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전권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하는 것은 그에게도 낯설고 물설은 나그네 사역이었다.

“십 수 년간 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학을 공부한 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청빙이 들어와 도미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었습니다. 그 때, 외국인 노동자인 필리핀 형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용주의 임금체불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실의에 빠진 채 큰 상처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마석 가구단지를 방문했다가 지금까지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구 공단을 방문하고 한참을 앓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는데도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교회들은 찾아볼 수도 없고, 오히려 제칠일안식일교회만 낯선 이방인 전도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미국 한인교회로부터 ‘대기상태’를 접한 가운데 “과연 여전도사인 내가 외국인 노동자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수도 없이 자문하며 선교의 방향을 틀었다. 비록 단순히 외국인 노동자를 위로하려고 가구단지에 들렀었지만, 거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찾으며 주저없이 필리핀과 방글라데시 형제 5명을 모아놓고 인근 교회 사택에서 예배를 드렸다. 1995년 12월 24일 성탄전야를 그는 그렇게 보냈다. 그것이 암미선교회의 시작이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외국인 모임은 일정한 형식을 갖고 드릴 수가 없었다. 한글 공부와 상담시간을 정해 놓고 복음송을 배우면서 간단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각국의 문화차이로 생각지도 못했던 갈등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예배시간에 헌금함 돌리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일제히 나간 버린 파키스탄 친구들, 술에 취해 상담을 하겠다며 느닷없이 찾아온 형제, 비자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들 때문에 출입국 관리사무소를 백방으로 뛰어다닌 일,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린 친구를 위해 병원을 오가며 진료를 챙기며 치료비를 해결한 일, 불법체류자로 붙잡혀 교도소에 있는 친구들을 위해 면회 가는 일 등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원래 신분은 전도사(선교사)인데 때로는 변호사도 되고, 때로는 기업가도 되고, 때로는 의사가 되어야 했다. 거기다 봉고차 기사로서 인천공항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것도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사역자라기 보다는 늘 엄마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그는 사람을 낚는 ‘어부’란 사실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땅끝 나그네>가 되어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함께 살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늘 복음을 심어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왜, 예수를 아는 것이 생명의 근원이니까. 그는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못내 즐거웠다.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그러나 역경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와 주위 청년들을 꼬드겨 제가 데리고 간다는 주변 교회의 따가운 시선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묵묵히 감내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IMF때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쉼터인 센터의 월세를 내지 못해 길거리에 나앉을 지경까지 이르기도 했다. 재작년 다문화센터를 증축하면서 기한에 건물을 완공치 못해 이자만 감당한 적도 있었다. 재정적인 문제는 늘 숙제였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빈 곳간은 신기할 정도로 채워졌다. 그렇다고 어려움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형제자매도 있었고, 예수를 알고 고국으로 돌아가 목회자가 된 친구들도 있다. 다시 한국에 올 때면 이곳 암미선교회를 찾는 친구들도 상당히 많았다. 당시는 어찌보면 고통의 시기라 생각됐지만, 긴 터널을 지나고 보니 더 큰 보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다국적 선교를 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늘 선교인력은 부족했고, 헌신된 자원봉사자를 찾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한국인들이 힘든 육체적 노동을 기피하듯이 외국인 선교도 등한시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 2013년 추석수련회 성경공부.

그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첫 모임을 가질 때만해도 지금처럼 독자적인 건물을 가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며, 귀한 열매들이 무르익는 것을 보면서 감사의 조건이 쌓여 간다고 말했다. 이주 노동자를 위해 그는 선교의 대상을 필리핀과 인도 페루 등 세계로 외연을 넓히고, 그곳에 이미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개척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출발했던 그의 사역은 지금 다문화가정까지 살뜰히 챙기며 새롭게 경작을 도모하고 있다. 건물의 이름을 다문화센터로 명명한 것도 더 넓고 깊은 사역을 추진하기 위한 그의 신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미 한글교육, 방과후 학교, 상담사역, 다문화 교육 등을 통해 다문화가정과 접촉점을 찾고 있으며, 지역사회의 교회 섬김을 토대로 타 문화권 선교의 거점을 위해 채비도 서두르고 있다.

“이국에서 외롭고 힘든 생활을 하는 나그네들에게 벗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 모릅니다. 다문화선교는 이 시대에 한국교회에 주신 주님의 사명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한숨을 돌릴 무렵 그가 선물이라며 토마토 한 상자를 내놨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들고 갈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쳐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싱싱한 토마토를 낑낑대며 가슴에 안고 달달하게 귀가했다.

글=강석근 기자 harikein@kidok.com  사진=권남덕 기자 photo@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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