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우 목사(영동중앙교회)

진정한 변화는 ‘오직 예수’ 믿음에서 시작
구원자이심을 믿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원하는 변화의 답을 얻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둘째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기독교 학교가 아닌데 목사님의 기도와 축도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의 신앙 유산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형식은 기독교 예배였지만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기도도, 축도도, 찬송 연주에도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예배를 떠올렸습니다. 어쩌면 믿음 없는 예배가 이런 예배가 아닐까?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를 짓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을 향해 걷지 않는데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신앙의 형식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은 핍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신이 예수를 부인했던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태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야말로 로마서 12장 2절이 말하는 ‘변화(메타모르포)’, 즉 화학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해야합니다. 이 변화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예수 외에는 통치자가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5~7절)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었습니다. 제사장 24명과 장로 24명, 서기관 22명, 대제사장 1명으로 된 71명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대제사장이 둘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실제 제사장은 안나스였고, 가야바는 그의 장인입니다. 섭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원래 종신직인데 주후 37년에서 67년 사이에 28명의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22명이 네 문중에서 나왔을 만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대물림이 되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여섯 아들 중 다섯 명이 대제사장직을 맡았고, 지금은 그 사위가 맡고 있는 상황입니다. 부정이 심해서 로마 정부로부터 해고 압박을 받자, 그 사위를 내세운 것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제사장들이나 성전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면서 정치 지도자들입니다. 그야말로 핵심실세들입니다. 온갖 정치적 수단을 이용해서 돈과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 조직은 가장 이상적인 조직처럼 보입니다. 세상을 결정하는 힘이 권세자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 3~4절을 보면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역사를 지배하고 통치하시는 분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베드로의 용기는 11절에서 나타납니다.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마 22장 41절에서 인용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시는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위에 올라서 지은 시입니다. 통치자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물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믿음을 달라고 애원해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이 통치자라고 믿는 어리석음과 내가 통치자가 되는 이 모순을 극복해야 합니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을 때 우리가 원하는 변화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예수 외에는 생명이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10절)

바울이 로마서를 쓴 곳은 고린도입니다. 고린도는 가장 음란하고 우상숭배하는 영적으로 음부의 권세가 창궐한 곳입니다. 고린도 교회 역시 문제가 가장 많은 곳입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위대한 로마서를 쓸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복음은 역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고 경건한 곳에서 위대한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생명이 있으면 나쁜 환경이 오히려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오늘 초대교회의 부흥은 이런 환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엡 4장 17~24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자는 환경을 초월합니다. 베드로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박국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방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해도 이방인을 통해 심판하시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결국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그는 밭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변화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갈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이 생명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 즉 성령이 답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가 원하는 변화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12절)

국고 보조금 36억을 횡령한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사람의 수첩에 이런 기록이 나왔습니다. “돈은 먹는 놈이 임자다” 한국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먹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욕도 먹고, 나이도 먹습니다. 성경에도 계 3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가치관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외치지 못합니까? 우리 자신의 불결함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은 아닙니까?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놀라운 것은 39절입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3장까지는 예수님이 왔으나 누구도 영접하지 않았고, 물이 포도주로 변해도 깨닫지 못하고,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묘사된 니고데모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문제투성이의 이 이방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 되고 믿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찾아 온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41~42절처럼, 복음은 우리의 깨끗함이나 성숙한 인격 때문에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 때문에 막히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생명이며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시기에 증거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부인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외칩니다.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답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외칠 때 우리가 원하는 변화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탐 스키너라는 사람은 목사의 아들이었으나 뉴욕을 주먹으로 통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판·검사들도 그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습니다. “예수는 모퉁이 돌/ 예수는 모퉁이 돌/ 너희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도/ 예수 위에 쌓이지 않은 인생은 다 떠내려가니/ 다 쓸모없으니/ 에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 세상의 구원자/ 장차 이 세상을 통치할 예수/ 예수는 모퉁이 돌” 자신이 어릴 때 교회에서 배운 노래였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주먹계 은퇴를 선언하고 신학교에 입학해서 목회자의 길을 갑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퉁이 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일한 통치자이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다시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나서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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