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오직 성경’에 익숙한 학자여야 한다
 

 

앞서 두 번에 걸쳐 설교자의 복음전파 소명(부르심)을 살펴보았다. 이 소명이 앞서 가고, 그 다음에 설교자의 재능과 열심, 노력이 뒤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자의 재능과 헌신은 다시금 앞서가는 하나님의 소명을 재확인하고 참된 것으로 인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봉사하는 설교자는 무엇보다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학자여야 한다.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 시,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여겼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 총독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중건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위한 하드웨어를 마련했다면, 학사 에스라의 율법 연구와 준행, 가르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경배를 위한 소프트웨어적 사역이었다.

성경 시대를 지나 교회사에 있어서 16~17세기 청교도들은 개인과 가정, 교회, 국가의 갱신을 위해 무엇보다도 ‘학식 있는 목회’를 원했다. 그래서 개혁의 방편으로 귀족들은 일차적으로 학교를 세워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을 양성하였다. 캠브리지의 엠마누엘대학(1584), 시드니 서섹스대학(1596), 더블린의 트리니티대학(1591~92)은 학식 있는 목회와 경건한 평신도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대학들은 하나님 말씀의 봉사를 위한 ‘모판’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월터 밀드메이 경은 엠마누엘 대학이 설립 이유를 1585년의 학교 정관에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밝혔다.

“이 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정하였는 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말씀과 성례의 거룩한 사역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신학교로부터 영국 교회가 사람들을 교육하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필요한) 목사들의 의무를 떠맡게 될 인물들을 갖는 것이다.”

지식과 교육에 대한 청교도의 태도는 긍정적이고 열정적이었다. 그들은 지성과 종교가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하지만 학문과 지식은 종교적 경건을 위한 수단으로서 시녀처럼 봉사해야 했다. 청교도들의 학문습득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한 방편이었지,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거나 뽐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청교도의 아버지인 윌리엄 퍼킨스는 개신교 최초의 영어 설교학 교과서인 <예언의 기술>에서 설교자가 공중 앞에서 허세를 부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라틴 금언을 인용한다. “학문을 감추는 것이 학문의 핵심이다.”

18세기 영국과 신대륙 미국에서 부흥운동의 선두주자였던 조지 휫필드는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아 ‘경건과 학문’, ‘기도와 노동’의 균형있는 삶, 즉 설교자는 반드시 무릎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기도 없이 연구하는 것은 무신론이며 연구 없이 기도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짓이다.” 휫필드는 설교자들이 ‘학자보다 성자’가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처럼 교회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처럼, 설교자는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건한 삶을 관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자서전적 고백은 오늘날 개혁주의 말씀 봉사자의 자세를 정확하게 짚어준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사도 바울은 상대방을 넉다운시키는 복싱이 아니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천국 복싱’을 할 줄 아는 지혜를 지녔던 것이다.

설교자는 일차적으로 ‘오직 성경만’이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의 메시지임을 확신하고 에스라처럼 오직 성경만을 그리스도의 회중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해야 한다.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이유들을 다루고 논평하는 것은 설교자의 몫도 아니고 설교자의 부르심도 아니다. 설교자의 일차적인 부르심은 오직 성경만을 풀어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무엇보다 성경에 익숙한 학자여야 한다.

박희천 목사는 1995년에 있었던 한 목회자 세미나에서 설교자의 기본자세를 밝혔다. “제 경험상 구약 백 번, 신약 백 번 읽으면 최소한 어느 정도 기초 수준은 됩니다.” 하루 4시간씩 성경읽기를 문자적으로 23년간,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48년간 준수했던 그가 겸손하게 실토했던 고백은 더욱 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평생 읽어도 태산의 ‘모퉁이만’ 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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