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혁주의 장로교 말씀 주해 ⑤ 개혁주의 신약 주해

성경은 해석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미 드러내고 의의 찾는 ‘해석학적 순환’ 필요
주해자는 성경이 고대 문서로 남지 않고 살아있는 오늘의 말씀이 되도록 잘 해석해야


 
▲ 이한수 교수총신신대원·신약학
성경 해석은 본래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깊게 맞물려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의사소통의 대상이 수천 년 전에 다른 문화와 시대를 살았던 성경시대 인물들의 글이라는 것이다. 동시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늘 어려움을 겪는데, 수천 년의 시간과 문화 또는 역사의 간격을 뛰어넘어 성경시대 저자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그들의 글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 개혁주의 설교자는 어떻게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가?
 
1. 본문 해석에는 두 차원이 존재한다

성경본문의 의미를 드러내는 해석 행위로서 ‘주해’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본문의 ‘본래 의미’(what it meant)를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해석자 자신의 삶의 상황에 어떤 ‘현재적 의의’(what it means)를 지니는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성경본문의 본래 의미에 주된 초점을 두고 해석하는 작업은 주로 학문적인 주석에서 자주 발견된다. 반면 그것의 현재적 의미에 주된 초점을 두고 해석, 적용하는 작업은 강해적 주해에서 자주 발견되는 일이다. 강해적 주해작업은 주일마다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자주 행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강해적 주해라고 할지라도 성경본문의 본래 의미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그것은 설교자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전하는 기회가 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미전달의 두 차원을 조심스럽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본문이 본래 뜻한 ‘의미’(meaning)를 드러내는 차원이고 그것이 해석자의 현재적 상황에 대해 갖는 ‘의의’(significance)를 찾는 차원이다. 성경본문을 주해하는 해석자 또는 설교자는 언제나 본문이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끊임없이 염두해야 한다.
 
2. 하나님은 성경을 신앙공동체에 맡기셨다

주해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성경은 단순히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고문서가 아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 기자들을 감동하여 그의 신적인 뜻을 계시한 책으로서, 바울 사도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이 본문이 말하는 참 뜻은 무엇일까?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신앙이 없는 불신자도 과학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성경이 주어진 대상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 공동체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신앙 공동체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존하고 해석하도록 맡겨두셨다. 서구 자유주의 신학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성경을 신앙 공동체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내 대학 강단에서 과학적이고 중립적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신앙이 없는 학자들이 성경을 하나의 인간 고문서로 탐구하다 보니 성경권위에 대한 존경심도 없이 무엇이든지 의심하고 보는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 of suspicion)을 발전시켜 놓았다. 역사비평, 문서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역사적 예수탐구 등이 전부 이런 의심의 해석학에 기초해서 발전된 것들이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도 전에 갈가리 찢어놓아 그것을 기껏해야 초대 신앙공동체의 산물 정도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말씀의 신적 권위는 불신자들이 실험실에서 논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유효한 능력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죄인들을 교훈하기에 유익하고, 잘못된 길에 빠진 자들을 책망하고 교정하는데 유익하며, 그들을 의로 훈련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영감을 진정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거룩한 감화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3. 잘못된 본문해석이 교회갱신을 가로 막는다

성경이 이렇게 죄인들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존경심을 갖고 조심스럽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중생한 설교자라고 해도 여전히 죄악된 자기중심성과 연약성에 빠져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적 환경과 개인적인 편견 또는 삶의 조건들을 초월할 수가 없어서 성경본문을 올바로 읽지 못하고 편향적으로 이해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성경 해석자는 바로 이점을 깊이 있게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설교자들에게 이런 문제들이 나타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이를테면 첫째, 그릇된 성경해석은 교회갱신을 가로막을 수 있다. 성경본문 해석자로서 설교자가 그릇된 신념과 교리적 편견 또는 잘못된 말씀 해석을 하게 되면, 청중들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는 것을 방해하여 결국 교회의 참다운 갱신을 방해하게 된다. 둘째, 본문 해석자로서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자신의 그릇된 종교적 신념과 인간적 편견, 왜곡된 성경 이해들을 주입함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왜곡된 종교적 신념에 종노릇하는 개인 하수인들로 만들 수 있다. 셋째, 해석자로서 설교자가 왜곡되거나 편협한 성경 이해를 갖게 되면 자연히 성경의 풍부한 진리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결국 복음을 ‘축소된 진리’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교회 안에서 복음은 점차로 손쉬운 복음, 값싼 은혜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자로서 설교자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4. 성경해석은 해석학적 순환을 요구한다

 성경 해석자들이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 해석하는데도 왜 그들은 그렇게 다양한 해석들을 내어놓을까? 그것은 해석자들마다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고 본문을 해석할 때 개인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일 수 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과 전제들이 성경본문 해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해석의 차이점들은 주로 각 해석자가 본문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는 방식에서 본질적으로 기인한다. 예를 들면, 칼빈주의 학자들은 성경 본문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칼빈주의 전제를 가지고 읽어내려는 경향성을 갖고 있고, 알미니안 학자들은 동일한 성경 본문을 알미니안적으로 해석하려는 강한 경향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교리적 전제나 편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본문을 읽고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전제 없는 성경 해석이란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 전제(presupposition)란 사물이나 본문을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을 가리키는데, 사람은 아무런 관점도 없이 사물을 총체적으로 그대로 바라볼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채용하는 전제나 편견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성경본문 해석자는 우선 자신의 교리나 신앙적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본문에 대한 어떤 전이해도 없이 그것을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가르쳐준 교리의 안경을 가지고 본문을 이해할 때 우리는 곁길로 빠지지 않고 그것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교리라는 안경만 가지고 본문을 읽게 되면 성경본문이 교훈할지도 모르는 다른 진리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보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교리적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읽은 다음에 이제는 성경본문을 통해서 자신의 교리적 전제가 과연 맞는지 거꾸로 두들겨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이라고 부른다.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모든 교리는 인간의 작업으로서 한계를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성경본문을 통해 항상 거꾸로 점검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항상 개혁해야 한다(semper reformanda)는 원리이다.
 
5. 성경해석은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소위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이라고 불린다. 성경본문은 일단 언어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단어들의 본래 의미, 단어들과 단어들의 문법적 관계, 문장 단락과 단락의 관계, 논지나 이야기의 흐름 등에 대해 알아야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성경본문은 수천 년의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지닌 과거의 글이다 보니 본문을 기록한 성경저자들의 역사적 삶의 정황, 그들의 시대적, 문화적 배경, 사역환경, 독자들과의 관계 등을 모르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어렵게 된다. 성경해석은 일종의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그것은 문화적 차이를 다리 놓고, 시간의 차이 사이에 다리 놓고, 언어적 차이 사이에 다리 놓으며, 지정학적 차이 사이에 다리 놓는 작업이다. 더욱이 성경저자들이 글을 쓰게 된 신학적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성경본문의 ‘문맥’은 여러 가지가 있다. 주해자는 특정한 본문을 읽을 때 일단 ‘근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단어의 의미나 단락의 논지는 대체로 인접한 문맥을 살필 때 발견될 수 있다. 주해자는 또한 특정한 본문이 들어있는 ‘원격문맥’을 살펴야 한다. 본문의 의미는 한 책 또는 서신 전체의 맥락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의미는 ‘성경문맥’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신약성경 전체, 또는 신구약 전체의 맥락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신약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입증하기 위해 끊임없이 구약의 본문들을 인용하거나 암시하는 일을 자주 하며, 또한 바울과 같은 신약 저자들의 경우에도 구약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의 말씀들을 인용하거나 암시하는 일을 자주 한다. 이런 것을 우리는 ‘간본문’이라고 하는데, 구약과 신약의 본문을 모르면 신약 저자들의 신학세계에 들어가 안전하게 여행하는 일은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
 
6. 결론: 성경은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왜 성경해석이 필요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성경 저자들이 살았던 수천 년 전의 과거와 성경 해석자들이 살아가는 현재 사이에는 언어적 간격, 시간적 간격, 문화적 간격, 지리적 간격이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영구불변한 신념은 이러한 간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살아있는 계시의 말씀을 건네주신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은 성경본문을 단순히 청중에게 읽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순진하고 무식한 확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신적인 계시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주해자는 성경의 본질적 성격을 제대로 잘 이해하여 그것이 고대의 문서로 남아있지 않고 오늘날 살아있는 말씀으로 청중들에게 들려질 수 있도록 잘 해석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성경의 제일 저자인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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