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목사인 필자는 격조 있는 목사로 기억되고 싶다. 운동 잘하는 목사, 설교 잘 하는 목사, 규모가 큰 교회 목사, 유행을 선도하는 목사, 법에 능한 목사, 재미있는 목사 또한 얼마나 귀한 목사인가. 그런데 목사의 격은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신실성(integrity)이다. 주님은 물론 사람 앞에서의 초지일관 충성됨이다.

오래 전 필자가 미국 비자를 받으러 서울 세종로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 한 적이 있다. 두 번째 거절(reject) 당하고 나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내가 미국에서 살 것도 아니고, 잠깐 여행하고 돌아오겠다는데 왜 비자를 내 주지 않습니까? 나는 장로교회 목사입니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품위를 중요시하는 장로교 목사라고 나 자신을 소개하고 영사의 반응을 기다렸다.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목사님의 마음은 이해하겠는데요,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지금도 미국에 눌러 앉아 있는 목사님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 때 불현듯 “내가 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불이익을 당해야 하나?” “나 역시도 또 다른 후배들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로구나” 하는 생각이 교차하였다. 그 후 하나님의 은혜와 대사관의 배려로 미국 여행은 물론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유학까지 다녀와서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21년째 섬기고 있다. 미국 유학 중에 두 교회에서의 청빙과 한 교회에서의 사역 초청을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목회자로서의 위대한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다른 목회자에게 최소한의 억울함이나 피해를 주지 말자는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현재의 목회지에서도 부임 초기에 어려운 때가 있었지만 곁눈질하지 않고 달려온 이유 역시 주님의 은혜와 교우들에 대한 약속 때문이었다.

목사의 격은 위대한 선언이나 주장의 외침에 좌우되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진정성, 신실함이 뒷받침 되지 않는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민족 지도자 백범(白凡) 김구 선생은 한 국가의 힘을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만 찾지 않고 탁월한 문화의 힘에서 찾기를 원하였다. 정신세계가 아름다운 나라에 대한 희구였다. 역시 백범다운 뿌리 깊은 사상의 표출이다. 얼마 전 103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긴 목회자들의 목회자로 불린 방지일 목사는 평소 격산덕해(格山德海)를 주창하였다. “인격을 산 같이, 덕을 바다같이 쌓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겨있다. 방 목사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와 동역의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일백세의 노인으로서 인터넷 서핑을 즐기는 마음이 젊은 목회자였다. 50년 넘게, 매주 월요일 그의 집에서 목회자들과 함께 하는 성경공부를 진행한 노종의 소원은 오직 주님 닮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서 살기를 갈망했던 그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모든 목회자의 야전 교범(Field Manual) 이었다.

목사는 강단에서 메시지를 전한다. 어느 목회자이든 피할 수 없는 사명이다. 그런데 메신저의 품격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 때문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강단 아래의 성육신한 삶의 실제가 있을 때에 강단 위의 사역은 빛을 본다. 이런 이유로 메시지와 메신저는 함께 가야 한다. 결코 엇박자가 되거나 불협화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성경적인 교회론을 바탕한 제자훈련 목회 철학으로 달려가기를 원하였다. 제자훈련을 받은 어떤 교우가 간증시간에 자기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였다. “성도 여러분, 저는 걸어 다니는 새로남교회입니다.” 뒷자리에서 그 교우의 자기 고백을 듣는 필자는 충격과 감사를 동시에 느꼈다. “아, 저런 생각을 늘 가슴에 품고 산다면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필자는 한 지역 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동시에 우리 총회에 속한 목사로서 이렇게 고백하며 살고 싶다. “저는 걸어 다니는 합동 교단 목사입니다. 저는 걸어 다니는 한국교회입니다”

큰 능력이나 재주는 없더라도, 남들보다 적은 달란트를 받았다 할지라도 주님과 교회에 대한 신실성은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주님과 성도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외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기에 외부로 드러나는 능력을 추구하는 대신 내면의 진실함을 추구하기 원한다. 겉멋에 열광하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시대에 속사람이 오직 주님의 은혜로 꽉 채워진 영혼의 깊이를 맛보고 싶다. 목회자의 품격과 격조는 때로는 앞모습에서가 아니라 그의 뒷모습에서 찾을 수 있기에 오늘도 뒷모습이 은혜로운 목사가 되기를 간구하려 한다.

몰상식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독단을 합법이라 부르짖는 시대에 영혼의 청정함을 간직한 목사로 나 자신을 주님의 제단에 올려놓고 싶다. 성도의 성도다운 품격은 목사의 격(格)과 맞닿아 있음을 알기에!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