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혁주의 장로교 말씀 주해 ④개혁주의 신약신학

신학과 목회현장 괴리로 교인의 가치관 질적 변화 견인 실패, 이단공세에 쉽게 허물어져
구약의 성취인 신약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선한 신학’ 쉽고 재미있게 제공할 책임 크다


 
▲ 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신천지 이단은 정통교회 신자를 9개월 훈련시켜 인생을 걸고 이단 포교를 하는 ‘추수꾼’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정통교회 목회자가 은퇴하면서 다른 목회자에게 “50년 전의 그 놈이 50년 후의 그 놈이다!”라고 자조적인 탄식을 했다고 한다.

이단은 1년 안에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키는데 (물론 악한 방향으로), 정통교회는 왜 변화를 시키지 못할까?

우리 합동 교단 산하 교회 중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65%이고, 1995년에 비해 2013년 주일학교 학생수가 42% 감소했다. 전국 대학생 복음화율은 3.7%로 전 국민 복음화률 18.3%에 비하면, 1/4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 다음 세대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천지 이단의 경우 광주에서 2014년 한 해 수료자가 4295명, 대구에서는 한 해 수료자가 1500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통교회는 교인수가 줄고 있는데, 이단은 어째서 이렇게 급속도로 늘고 있는가?
 
신학과 목회의 괴리에 있다

필자는 총신 신대원에서 14년 강의한 후에 16년째 현장 목회를 하면서 현장에서 많은 것을 발견했다. 그 중의 하나가 정통교회 교인수가 줄고, 목회자가 교인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신학과 목회의 괴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생각의 틀’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 ‘생각의 틀’은 신념, 전제,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라 할 때의 ‘관’ 등과 같은 의미이다. ‘생각의 틀’에서 생각(知)이 나오고, 생각에서 감정(情)이 나오고, 감정에서 행동(意)이 나오고, 행동에서 습관이 나오고, 습관에서 인격이 나오고, 인격에서 인생이 나온다(잠 4:23).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의 틀’부터 바꾸어 주어야 한다.‘생각의 틀’이 바뀌면 사람이 변화된다. 사람은 변화를 체험하면 그 체험을 혼자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변화를 체험한 사람은 “내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을 말과 행위와 삶 전체로 나타내게 되어 있다. 이것이 변화의 파문이다. 교인에게 있어서 변화의 파문은 교세의 증가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질적인 변화와 양적인 성장은 맞물려 있다. 교회의 질적인 변화는 교회의 건강이고, 교회의 양적인 변화는 교회의 성장이다. 교회의 건강과 성장은 본질적으로 같이 가게 되어 있다. 지금 우리나라 교세가 줄고 있는 것은 질적인 변화가 그만큼 약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신천지 이단은 정통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빼내고 신천지 이단의 ‘생각의 틀’을 집어넣는 작업을 단기간에 하고 있다. 정통교회는 수십 년 교인들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는 작업을 하지 못했다. 신천지 이단의 설교와 교육은 기존의 ‘생각의 틀’을 이단 체계에 따라 변화시키는 작업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통교회는 설교시간에 나비가 살짝 날아 앉았다가 예배가 끝나면서 날아가 버리는 식이 되어 버렸다.

신천지는 사탄이 기뻐하는 악한 신학으로 교인들의 가치관을 악한 방향으로 바꾸었으나, 정통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신학으로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는 작업에 실패했다.

정통교회 목회자는 대부분 신학은 신학교에서 배우고 강도사 고시 마친 후에 목회 현장에서는 배운 신학을 제쳐 놓고 ‘꿩 잡는 게 매다’는 식으로 ‘누가 잘 한다’고 하는 바로 그것을 가르치고 전파해 왔다. 개혁주의 신학이 목회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학 따로, 목회 따로-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몰(沒)변화 몰(沒)성장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작업

개혁주의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상식이 된지 오래다. 한국 개혁주의 교회는 이제부터라도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는 작업을 적극 전개하는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도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는 작업을 학문적 실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과 목회의 접목 작업을 ‘안 하면 죽는다’는 절박감으로 전개해야 한다.

신학은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아 가는 학문이다. ‘나’가 확대되면 ‘교회’가 된다. 신학은 교회를 알고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을 알고 교회를 알아 가는 학문이다. 교회가 사라지면 신학도 사라지고, 교회가 없으면 신학도 필요 없다. 교회를 떠난 신학은 물을 떠난 물고기와 같다.

개혁주의 신약신학은 오늘의 교회에 개혁 변화 성장을 가져오는 학문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교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방법은 전기한 대로 우선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헬라어도 필요하고 ‘담화 분석’(discourse analysis)도 필요하고 ‘문예비평’(literary criticism)도 필요하지만,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있는 체계적인 성경적 조직신학 내용을 교회에 제공해 주어야 한다.

‘성경적 조직신학’이라는 것은 성경에 근거한 삶의 주제 중심의 체계적인 신학 내용을 말한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제자훈련을 분석해 보면 그것이 ‘작은 조직신학’ 훈련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제자훈련 때 가르치는 주제를 보면 성경,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구원, 교회, 종말, 윤리, 변증학 등이 다 들어 있다.

제자훈련에서 다루는 이런 주제는 총체적인 조직신학 차원이 아니라 구원과 교회 중심의 좁은, 다소 한 쪽으로 치우친 조직신학이다. 개혁주의 신약신학은 신구약 성경에 근거해서, 특별히 구약의 성취인 신약성경에 근거해서 삶의 주제 전체를 망라하는 조직신학을 개발해서 교회에 제공해 주어야 한다.

지금은 후현대주의 시대라 사람들은 고정된 그 무엇을 총체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일반 대학가에 가 보라. 혼전 성관계는 부도덕하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대학생들이 얼마나 되는가? 호모섹스가 불법적이고 부도덕하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대학생들이 얼마나 되는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대학생들이 얼마나 되는가? 이게 대학가만의 문제인가?

지금은 대학가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성 가정 결혼 도덕 윤리 권위 대인관계 사회생활 정치이념 경제관 대북관계 국제관계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등 모든 분야에 대한 객관적 절대적 기준을 상실한 시대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 가고 있고 어디서 어느 것부터 세워야 할지 난감하다. 모든 기준이 붕괴되고 각자 제 마음대로, 제 좋을 대로 기준을 정해 놓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이런 ‘신(新)사사기 시대’에 육욕적 세속적 사탄적 비성경적 이단적 ‘생각의 틀’을 성경적인 ‘생각의 틀’로 바꿀 수 있는 성경적 조직신학을 개혁주의 신약신학이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슴에 사무치는 아픈 인식 필요

성경적 조직신학의 양식과 무기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개혁주의 신약신학자들에게 오늘의 인간, 오늘의 교회, 오늘의 사회, 오늘의 세계 등 오늘의 상황에 대한 ‘가슴에 사무치는 아픈 인식’이 있어야 한다. 신약신학자들의 인식 변화가 없이는 교회에 필요한 개혁주의 신약신학이 나올 수 없다. 신학자들의 인식 변화가 없이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의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없다.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의 ‘생각의 틀’이 바뀌지 않는 한,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꾼다는 것은 도무지 생각할 수도 없다.

개혁주의 신약신학이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있는 총체적인 성경적 조직신학의 내용을 제공해 주면, 목회자들은 그것을 쉽고, 재미있고, 생활에 적실하게 소화해서 설교하고 교육하면 된다.

학생들은 신학과 목회의 괴리를 늘 주장한다. 그것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목회현장에서 적용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물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목회현장에 적절하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목회현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신학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는 유학생 시절부터 교회를 위한 신학을 연구해 왔고, 신학 교수로 가르칠 때도 교회를 위한 신학 관점에서 연구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평소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것을 교회에서 사용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평소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것을 쉽고, 재미 있고, 생활에 적실하게 가공해서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르칠 때 신학과 목회가 자연스럽게 접목되고, 교인들의 ‘생각의 틀’이 바뀌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총체적 성경적 조직신학

개혁주의 신약신학은 신약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교회에서 사용하기에 적절하도록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 신학 속에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도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육체적인 부활에 근거한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생명사역도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갈등과 적대 관계도 들어가야 하니, 악령론도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살아가신 삶 전체로 도래했기 때문에, 성령론도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하나님 나라 윤리도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 윤리를 다룰 때에, 한 사람의 교인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서 겪고 부딪히고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들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면서 다루어 주어야 한다. 거기에 남성과 여성, 결혼, 가정, 자녀교육, 학업, 취업, 일터, 생로병사 등의 모든 이슈가 들어가야 한다.

제자훈련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가령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훈련 할 때 제공하셨던 산상보훈, 선교훈화, 천국비유, 공동체훈화, 종말훈화가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교회의 제자훈련이 선교단체의 제자훈련에서 나온 탓에, 성경적인 제자훈련이기보다는 당장 필요한 주제에 의한 제자훈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제자훈련을 신약신학적 제자훈련으로 바꾸어 주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다.

이런 것이 개혁주의 신약신학이 오늘의 교회에 제공해 주어야 할 총체적 성경적 조직신학의 단면이다. 개혁주의 신약신학은 교회의 질적 변화와 양적 성장을 위한 총체적 성경적 조직신학의 양식을 제공해 주는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신약신학은 신학생들과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어 줄 수 있는 신학을 구약의 성취인 신약에 근거해서 제공해야 한다. 교회는 개혁주의 신약신학이 제공하는 총체적 성경적 조직신학을 쉽고, 재미있고, 생활에 적실하게 교육하고 훈련시키도록 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약신학은 일체의 객관적 절대적 기준을 거부하는 후현대주의 시대에 이단은 급성장하고 교회는 정체 쇠퇴하는 현실 속에서 교회를 변화시켜 성장하게 하면서 교회가 사회의 부정부패와 혼란과 붕괴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과 모델을 제공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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