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설교자 세운 하나님 지혜 크도다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권은 설교자의 하나님 말씀의 봉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마틴 로이드 존스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설교 사역은 사람이 부름 받을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설교 사역을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사람의 손에 맡기셨을까? 왜 더욱 고상한 영적 피조물인 천사의 손에 위탁하지 않으셨을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중적 지혜가 깊이 배어 있다.

첫째, 질그릇 같은 인간 설교자를 통한 복음 설교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만일 거룩하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인생에게 말씀하신다면, 흙으로 빚어진 불완전한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인생은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고, 마침내 하나님 위엄과 권능 앞에 죽고 말 것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말고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도록 모세에게 간청하였다. 이는 자신들이 죽임을 면하기 위함이었다(출 20:18~19, 신 5:22~27, 히 12:18~21).

그러므로 인간 설교자를 통한 하나님 말씀 선포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택하신 방편이요,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어 우리에게 적응(accommodation)하신 결과다.

둘째,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설교에는 전달자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고상한 영적 피조물인 천사를 사용하시기보다는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질그릇 같은 인생을 즐겨 사용하신다.

왜냐하면 영적 피조물인 천사는 인생 삶의 걱정과 고달픔을 모를 뿐만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천사는 죄를 지은 인간의 비참함을 도무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의 형벌과 비참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은 죄 가운데 빠졌으며, 죄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사죄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광대한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동일한 성정을 지닌 인간뿐이다. 따라서 동료 인간이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들은 더욱 감명을 받고 복음을 쉽게 수용한다. 동시에 연약한 인생만이 죄의 비참과 구원의 기쁨을 체험적으로 알기에 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적합한 존재다(행 14:8~18). 이런 인생을 설교자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더 나아가, 천사가 아닌 연약한 설교자의 입을 통한 복음 선포에는 메시지의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만일 천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한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천사의 능력과 영광스러움 때문에 그 전하는 메시지를 쉽게 수용하고 믿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이 동일한 성정을 가진 연약한 사람을 통해 선포되기를 기뻐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우리의 믿음이 선포하는 자에게 의존되는지, 아니면 메시지 자체에 두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그리스도의 복음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다(고후 4: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천사의 탁월함이나 인간의 지혜 위에 세워지기보다는 자신의 약속의 말씀 위에 세워지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설교자 자신과 설교를 듣는 회중은 설교자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설교자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로,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의 대사로 여겨야 한다(고후 5:18~20). 설교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설교자를 단순히 ‘이야기꾼’으로 멸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신 방편인 그리스도의 복음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롬 1:16, 10:13~17). 반대로 우리는 설교자를 마치 하나님처럼 우상시해서도 안 된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것을 보자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숭배하려는 잘못을 범하였다(행 14:8~18).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를 이야기꾼으로 무시하거나 신(神)으로 우상시해서도 안 된다. 설교자는 단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 때문이다.

오!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여! 하나님께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설교 사역을 연약한 인간의 손에 위탁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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