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역사에서 작금처럼 이단이 활개를 친 적은 없다. 과거 대도시를 무대로 삼아 기성교회 청장년들을 미혹하던 이단들이 이제는 중소도시로 그 무대를 옮기고 있고 장년에서 청소년 중심으로 포교대상을 바꾼 지 오래다. 과거에는 축호 전도로 기성 교인들을 미혹하던 저들은 이제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위장하면서 기성교회 모습을 유지하거나 세미나는 물론 신학원 또는 언론, 문화, 예술, 등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단들은 과거와는 달리 드러내놓고 예배를 방해하는가하면 납치, 폭행, 고소 고발로 일관하면서 한국 기독교를 유린하고 있다.

7개 교단 이단대책위원장들의 공동성명은 한국교회를 미혹하는 이단들의 상황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는 경보였다. 기독교 역사상 이단은 기독교인이 관계될 수 없는 최악의 범죄였고 중세에서 이단은 화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이단은 거짓교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단은 신앙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고 했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이단에 대한 경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단들은 언제고 정통을 전제로 삼고 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정통은 “성도에게 주신 믿음의 도”(유 1:3)이다. 일찍이 변증가 이레니우스는 이단에 대하여  “그릇됨은 자신의 기형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날지라도 발각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묘하게 매력적인 옷으로 치장하여 진리 자체보다 훨씬 진리다운 모습을 가지고 아직 자라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레니우스는 이들 이단들에 대하여 “옳은 교리의 표준에서의 이탈”이라고 말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단은 언제고 정통교회 기성교회들이 제 구실을 못할 때 더 강하게 준등하였다. 따라서 교회들은 이럴 때마다 대각성의 은총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이단들과 싸워나갔다. 사실 니케아신조를 비롯한 모든 정통교리들은 이단에 대항하여 교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정립되었다. 지금 이 땅에 이단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은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기에 일어난 결과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천국에 대한 소망보다 현세적이고 물량적이며 향락적인 그릇된 실용주의 신학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침륜되어지는 현상이 바로 신천지나 그 밖의 이단들의 횡포인 것이다. 따라서 개인과 교회 아니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영적 대각성을 일으켜야 한다. 이 길만이 이단을 몰아내는 최상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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