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혁주의 장로교 말씀 주해 ② 개혁주의 구약해석학

다른 신학과 구별되는 독특성…성경은 해석의 열매, 신성과 인성 살리는 쪽으로 해석해야
칼빈과 박윤선 전통 이어받아 다양한 해석방법론 여과하며 교회 위한 신학 세워나가자



1. 개혁주의 성경 해석의 원리: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성령의 내적 조명

 
▲ 김정우 교수총신신대원·구약
개혁주의 구약해석학은 한 마디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성령의 조명이다. 이것은 개혁주의가 다른 모든 신학과 구별되는 독특성이다. 종교개혁은 ‘교황을 폐위하고 성경을 옹립하여’(R. H. Bainton), 모든 권위의 원천을 직통(신비주의), 전통(가톨릭), 이성(계몽주의), 사실(역사비평학), 체험(오순절파)에 두지 않고, 오직 성경에 두었다. 또한 쏠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성경해석의 큰 원리를 말한다. 한국교회 주석의 기초를 놓은 정암(正岩) 박윤선은 이것을 ‘계시 의존 사색’이라고 했다. 그는 옛날 총신에서 설교할 때 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는 말씀을 전하셨다. 또한 한 번은, “나는 안 믿어도, 나는 믿는다!”는 모순어법으로 이성적 자아가 과학적으로 내린 결론이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면 신앙적인 자아는 말씀을 믿겠다는 고백을 하셨다. 그래서 정암은 성령의 조명을 받기 위하여 끊임 없이 열정적으로 기도하였고, 때로는 “주님 막혔습니다”는 탄식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완전한 설득과 확신은 말씀을 우리 가슴에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충실한 자세였다.

우리가 비록 쏠라 스크립투라와 계시 의존 사색을 한다고 해도, 성경해석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신학의 효시를 이룬 개블러(Gabler)는 성경이 많은 곳에서 심원한 모호성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말했다. 사실 구약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책으로서 약 3000여년 전에 쓰여져 우리의 언어, 풍습, 역사, 사고방식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만들어진 책이다. 이 거리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쉽게 접근하면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에 거룩한 옷을 입히는 교만에 빠지거나, 혹은 잘못된 이단에 빠지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쏠라 스크립투라를 따르면서도,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거리도 인식해야 한다. 신약의 밝은 빛으로 구약을 비추어 버리면, 구약 자체 의미가 훼손될 수 있다. 구약은 신약과 달리 자체의 성격과 영역이 있다. 구약은 율법(토라)이고, 신약은 복음이다. 구약은 준비이고 신약은 완성이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이다. 구약이 스케치라면 신약은 완성된 그림이다. 따라서 이 둘 사이의 과정을 추적하고 상호 관련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2.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필요성

 성경해석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성경은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해석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면서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새롭게 적용하였다. 시인들과 지혜자들은 오경과 선지자들의 말씀을 그들의 예배와 삶 속에 적용하였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있는 말씀을 해석하시면서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가르치셨다(눅 24:27). 바울은 구약의 모든 말씀은 ‘우리의 교훈’(롬 15:4)과 ‘거울’이라면서 재해석하였다(고전 10:6).

또한 성경의 양성(兩性)인 신성과 인성이 해석을 요청한다. 이 점은 워필드(B. B. Warfield)가 잘 말했다. “성경은 전적으로 거룩한 책이다. 그리스도와 거룩한 저자들은 성경의 모든 부분과 요소와 세부사항과 표현 형태와 가르침의 내용들까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도구로 삼아 주신 것이었다. 성경 저자들은 이 인간적인 측면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성경해석사를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신성과 인성의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쳐 신성의 초월적인 차원을 놓치거나, 인성의 역사성을 놓쳤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신성과 인성을 둘 다 존중하고 살리는 쪽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3. 역사에서 배우는 개혁주의 구약 해석학.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로 지난 2000여년의 교회사는 성경해석사라고 할 수 있다. 이 긴 세월 동안 교회는 다양한 성경해석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3.1.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해석: 예표론과 알레고리적 해석

 교부들은 구약성경의 자연스러운 원래의 의미(인성)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의미(신성)를 더 중요하게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와 임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Finis legis Christus(롬 10:4), 즉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과 완성이므로 구약의 모든 부분에서 복음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구약 해석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래서 교부들은 무리한 해석도 많이 하였다. 물론 예형론(typology)은 성경적인 뒷받침을 받는 것도 많았지만 어떤 것들은 지나쳤다. 예로서, 라합의 붉은 줄이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다거나, 아브라함의 종 318명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지나쳤다. 어거스틴이 “나는 검으나 아름답다”(아 1:5)에서 검은 것은 거짓 신자, 아름다운 것은 참된 신자로 본 것도 지나친 상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이나 어거스틴은 현대에 고도로 발달한 학문적 도구로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적, 신학적 통찰을 준다. 그들의 해석은 결코 허황되지 않다. 그들은 문자 이면에 감추어진 도덕적, 신학적 의미를 독자들의 시공 속에 멋있게 적용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원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알레고리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예로서,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의 노래이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지고한 사랑의 노래가 된다. 사랑과 결혼보다 신인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더 친밀한 관계는 없다.
 
3.2. 종교개혁의 성경해석: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

 루터의 모토는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Was Christum treibet)였다. 그는 자신이 수도사로 있을 때 알레고리의 천재였지만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구약의 핵심 사상인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정죄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임을 발견하고,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영원한 임무라고 하였다. 물론 루터는 알레고리를 버리고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충실히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을 그릴 때 중심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특히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슴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씀하셔야만”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의 구약 해석학의 전제가 구원론이라면, 칼빈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불연속성보다 연속성을 더 강조하였고,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을 수용하였다. 칼빈은 제한된 알레고리적 해석은 허용하면서도, 사탄의 기교로 정죄하였다. 그리고 원문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하여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사전적 의미와 문법적 의미를 예리하게 파헤쳐 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개혁주의 해석학의 정초가 되는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 방법을 정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루터의 주석에서는 어디에서나 설교자로서 주관성이 물씬 풍기지만, 칼빈의 주석은 냉철한 객관성이 빛을 발한다. 그는 마치 높은 산에서 아래를 다 굽어 보고 조감하듯이 써내려 간다. 특히 여러 곳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기 위한 그의 실제적인 기도 생활이 절절이 나타난다.
 
3.3. 역사비평학과 탈비평학의 성경 해석: 문서, 양식, 편집, 수사, 정경적 해석
 
종교개혁 이후로부터 칼빈의 주석적 전통은 사라지고 신학적 해석이 득세하면서 성경은 점점 무시간적이고 보편적인 가르침을 주는 책이 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사상적으로는 합리주의가 대두하여 성경은 계시가 아니라 고대의 종교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어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이성은 만물의 척도가 되었고, 세계는 인과적인 폐쇄체계로 이해되면서 기적과 이적과 같은 초월적 사건들은 신화로 해석되었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몹시 가설적인 문서설, 양식비평, 편집비평 등의 방법론들이 나왔다. 성경의 신성이 무시된 비평학은 서구 교회뿐 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고, 교단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필자도 총신에서 공부할 때, ‘나는 모세이고 장신에 간 내 후배는 바로’인 줄로 알았다. 어느 날 박윤선 박사에게 “역사비평학이 전부 잘못되었느냐?”라고 물었더니, “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핵심 전제가 잘못되었고 배울 것도 있다”고 대답하셨다. 사실 비평가들은 지난 200여년 동안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고대 근동아시아의 수많은 언어들과 본문들을 해독하였고, 히브리어 사전들을 만들고, 성경의 인성을 들추어내는 수많은 주석들과 값진 글들을 썼다. 그 중에는 우리가 여과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있다. 궁켈이 양식비평으로 구약에 신화, 민담, 전설이 있다고 본 것은 잘못되었지만, 시편 속에 찬양, 감사, 애가 등의 형식이 다양한 삶의 정황 속에 나온다고 본 것은 바로 본 것이다.

또한 비평학자들의 후예들 가운데 여러 학자들은 비평학 자체가 역사실증주의에 함몰되어 결과적으로 성경의 통일성, 정경성, 초월성을 놓침으로써 믿음의 공동체와 무관한 학문적 작업이 되었음을 반성하였다. 그리고 수사분석을 통하여 성경 본문이 파편이 아니라 아름다운 통일성을 가진 작품임을 밝혀 내었다. 또한 성경신학 운동이 일어나서 성경 안에 나오는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이 통일성을 이루며 우리 시대를 조명할 수 있음도 밝혔다. 물론, 개혁주의 안에서는 이미 보스(G. Vos)를 통하여 성경 계시의 점진성, 다양성, 유기적 조화, 구신약 성경의 통일성을 기반으로 성경 신학의 초석을 세웠다. 특히 차일즈(B. S. Childs)는 원래 비평학자였지만, 신학자들이 정경(canon) 개념도 없이 성경해석을 함으로써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건조한 학문 활동을 목격하면서, 성경의 규범성과 정경성을 믿음으로 해석할 것을 평생 추구하였다. 우리는 차일즈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비평적 전제를 걷어내고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정경적 해석을 시도하여 구약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개혁주의 성경해석학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성령의 내적 조명이다. 우리는 칼빈과 박윤선의 전통을 이어 받아 더욱 뜨겁게 기도하고 깊게 연구하여 현대의 다양한 성경해석방법론들을 여과하고, 구약의 원래적 의미와 기독론적 의미를 함께 찾아내어교회를 위한 신학을 세워야 한다. 가까이로는 동아시아와 멀리로는 온 세계와 지평 융합을 할 수 있는 해석의 작품들을 창작하는 과제를 충성스럽게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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