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단 역사 그리고 정체성 ④ 한국 기독교의 청년 학생운동

‘1907년 대부흥운동’은 기독청년에 구원의 은총 각인…‘엑스플러 74’ 통해 학원선교 도약
겨레 아픔 같이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 고민…복음진리 지켜가는 ‘거룩한 창업’ 격려한다


 
▲ 박영실 교수
총신신대원·역사신학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구원론 회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면서 개신교는 침체되고, 세계선교 운동은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시작됐다. 이 경건주의 선교 운동은 스패너와 프랑케와 같은 독일 루터란들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개혁파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할레대학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청년 학생층이 이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 운동에서 프랑케는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 변혁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회심을 경험해야 하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후 이 경건주의 선교 운동은 18세기의 영국의 복음주의운동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거치면서 개신교의 영적 부흥 운동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세계선교 운동이 더 강화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미국에서 일어난 건초더미 기도회를 주목해야 한다. 이 기도회야말로 청년 학생이 그 중심에 선 미국 선교 운동의 발원지이며, 겨자씨 같은 기독교 청년 운동으로 놀랍도록 배가하였다. 이어서 이 운동은 디엘 무디가 인도했던 헐몬산 수련회를 거쳐 그 유명한 학생 자원 운동을 이루게 된다. ‘이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란 목표를 가졌던 이 학생 자원운동의 결과 이후 반세기 동안에 2만명 이상의 청년 학생들이 해외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고, 이 선교 헌신의 결과로 교회사가 라투렛이 명명했던 ‘위대한 세기’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선교의 물결이 19세기말에 한국에까지 도래하였다.

한국에서의 신앙운동으로서의 청년 학생 운동

 기독교의 모든 역사는 그 아무리 귀한 역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것도 모래위에 짓는 집과 같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펼치기 전에 한국인들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되어 말씀에 근거한 선교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선교사들인 존로스와 그의 매부 존 메킨타이어는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그리고 김진기의 도움을 받아서 성경 번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 회심한 이수정이 미국 성서공회 헨리 루미스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수정의 마가복음서를 최초 선교사들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 제물포로 들어올 때 가지고 입국한다. 이런 사실들은 한국의 기독교가 그 시작부터 성경적 기독교로 출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교회의 이런 성격은 1890년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선교 전략으로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의해서 더욱 분명해졌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핵심은 성경 공부에 있었다. 성경을 모든 사역의 토대로 인식한 것이다. 이런 성경 중심의 기독교는 사경회 제도를 통해서도 강화되었다.

이런 성경적 전통의 바탕위에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그들의 복음의 건축물들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들은 개혁파 전통의 보수적 복음주의 노선에서 훈련받은 양질의 선교사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성경의 권위에 관한 인식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실 이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했을 때 그들에게는 의료 및 교육 사업과 같은 소위 간접 선교형태만 가능할 뿐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학교와 병원을 세워 복음 전파를 위한 접촉점을 마련하고자 하지 했지만, 복음 전파를 통한 개인 구원이야말로 기독교 복음화의 첩경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들 선교사들이 대부분 청년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공식적 선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칼 귀츨라프(1832)와 로버트 토마스(1866) 선교사는 물론이고 알렌(1884), 언더우드와 아펠젤러와 스크렌톤( 1885)와 게일(1888) 모두 20대의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었다.

이 후 한국 교회의 영적 상태에 너무나도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1907년 대부흥 운동이었다. 대부흥 운동은 이 땅의 기독 청년 학생에게 시대의 절망적인 현실의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은 아직 어린 한국 교회의 오순절 사건이었으며, 장차 닥쳐올 세속 사상의 도전에 맞서 이길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 절망했던 엘리트 청년 학생들은 암울한 조국 현실에서 구국의 방안을 갈망하고 있었다. 게다가 교회는 표류하고 있었다. 장로교 마저도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애국적인 의식이라서 교리적으로 위반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할 것을 가결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20년대에 접어들자 칼 막스의 사회주의 사상이 한국 사회에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이후의 한국 사회적 공간에서 기독교와 막스의 사회주의 사상 대립의 상황은 더욱 첨예화된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이런 도전에 직면했을 때도 결코 쇠하지 않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총을 기독 청년 마음에 각인시켰으리라고 본다.

해방 이후 기독청년 학생 운동은 각 교단의 청년회 운동들과 함께 교회적인 운동으로 되어져 왔다. 그런 가운데 청년 학생 계층을 주 대상으로 하는 학원 선교 단체가 한국 땅에 상륙했고 그런가 하면 우리 땅에서 형성된 학원 선교단체도 있었다. IVF, CCC, 네비게이토, 조이, YFC 등이 전자의 경우라면 UBF는 후자에 해당한다. 파라쳐치적 (교회 밖의 운동) 학원 선교단체들과 기존의 교회들 간에는 교회론적 충돌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1974년에 소위 ‘엑스플러 74’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엑스플러 74’ 선교대회는 청년 대학생들을 주 선교의 대상으로 했던 학원 선교단체가 한국 교회와 접목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와 청년 학생 선교 단체 간의 갈등과 긴장국면을 해소하고, 한국 교회가 파라쳐치적 청년 학생 신앙운동을 이해하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에 옥한흠 목사는 학원 선교 단체에서 사용되던 제자훈련의 개념을 지역 교회의 청년 대학생 사역에 접목하게 된다. 엑스플러 74 대회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당초 양자간의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서 제자훈련이나 소그룹, 개인전도, 구원 초청, 경건의 시간(QT) 등의 대학생 선교 단체의 소프트웨어가 교회의 핵심적 신앙교육의 개념들로 활용되어 참으로 고무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한국 교회는 캠퍼스 전도에 상대적으로 소홀했지만 학원 선교단체는 울며 씨를 뿌려서 한국 교회가 그 기쁨의 단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학원 선교 단체에서 전도 양육된 청년 학생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귀한 일군들로 정착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사회적 책임으로서 청년 학생 운동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수 천명의 복음주의자들이 모인 회합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책임이 있으니 하나는 전도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책임(사회적 참여)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때의 사회적 책임은 전도 우선을 전제로 하며, 구제나 봉사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참여로 구성된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많은 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에서의 기독교 청년학생들이 자기 계발과 건강한 한국 사회 조성에 앞장서도록 했다. 이와 같은 교육선교는 한국의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 독립과 건국을 준비하는 토양이 되었다. 기독 청년 학생들은 당연히 겨레와 아픔을 같이하며 충군 애국 사상과 대외적으로는 외세에 대해서 저항의식을 고취되어 갔다.

하지만 1901~1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 정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조선에서의 일본의 주도권을 인정해 주면서, 1901 장로교 선교회 공의회 선언문에서 선교사들의 피선교국 정치 불간섭 원칙과 정치 권력에 순종 의무를 명문화 시켰다. 다수의 선교사들이 정치적 중립주의 혹은 정교 분리 원칙을 천명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친일적 노선에서 행동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지켜본 많은 청년 학생들은 기독교와 선교사들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가기도 했다.

혹자들은 사회적 참여 측면에서 1907년 대부흥 운동을 너무 부정적으로 조명한다. 한국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현실의 이슈에 대해서는 눈감게 하고 오로지 영적 문제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도록 몰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윤리에 집중하면 사회 윤리에 눈멀게 된다는 논리는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는 서로 배타적일 수 없으며, 기독교의 계명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 투쟁의 역사에서 기독교인들과 기독 청년 학생들의 역할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3.1운동과 관련된 경우일 것이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던 민족 지도자 33인 중에서 기독교인이 절반에 해당하였고 시위 과정에서도 기독 청년 학생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해방 이후 자유당 정권 때 기독교 매스컴들은 대부분 침묵하였고 이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자 그전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동일한 형태의 패턴은 70년대의 유신 때도 반복되었다.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희생을 감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그들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에 관한 언급이 부족하다. 예를 들면 1970년 중반에 태동한 민중신학은 1980년에는 상당히 활발히 조명되었다. 지금은 그 상황이 소멸되니 신학이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컨텍스트가 텍스트를 규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민중신학에서는 인간의 죄악됨을 강조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민중신학자들이 마르크스적 접근을 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는 6·25 전쟁이라는 민족적 체험이 있다. 마르크스적 계급 투쟁방식이 결코 이땅에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방책이 될 수 없다는 민족적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기독청년의 시대적 역할

기독 청년 학생들은 변화산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 제자들처럼 거기에 안주하려 하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않으신가? 우리의 개혁 신학은 문화변혁적인 신학인데도 우리는 그동안 새로운 시도를 지나친 비판의 시각으로 보거나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급속한 사회의 변화와 기독교를 향한 비난의 물결이 거세지는 이 시대에 기독 청년의 역할은 무엇일까?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고 하는 두 기둥 속에서 나눔과 적용을 해 가는 개혁주의의 문화변혁적인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때이다. 나눔 운동, 시민운동, 통일 운동 등은 이제 우리 기독 청년들에게 생소한 이슈들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운동들이 궁극적인 복음화 운동과 구원의 역사 속에서 통합될 수 있는 사역이 필요하다.

지금은 선교의 일선에서,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도전과 독재정권 속에서 시대의 희망이요 선봉으로의 역할을 감당해 왔던 한국 기독 청년의 역사적인 맥락을 이어 갈 때이다. ‘청년 창업’이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즈음, 기독 청년 학생들의 거룩한 창업을 격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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