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문

상단여백
HOME 기획/해설 부활절특집
제99회 총회, 성도 87명 순교자로 등재 … 신앙의 모범 삼다
   
▲ 염산교회 77명의 순교자들의 희생을 상징하는 합동묘소가 예배당 앞마당에 세워져있다.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 동안 새롭게 총회 순교자로 등재된 인물 88명을 소개합니다. 특히 지난해 열린 제99회 총회에서는 염산교회 성도 77명을 비롯해 6·25 당시 희생된 87명의 성도들이 한꺼번에 순교자로 등재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의 명단과 함께 간단한 사적을 밝혀, 후세의 모범으로 삼고자 합니다. 사적은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에서 정리한 내용을 참고했습니다.<편집자 주>

▲김익두 목사/2012년 6월 18일 등재

▲ 김익두 목사/2012년 6월 18일 등재

김익두는 1874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친 김응선과 모친 전익선 슬하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상업에 종사했으나 실패했으며,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서 유산을 탕진하는 등 어려움을 겪자 삶에 회의를 느끼고 20세 이후에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싸움과 술주정을 일삼았으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27세 되는 1900년 봄에 그의 친구 박태환이 김익두를 안악군에 있던 금산교회로 인도하였다. 여기서 그는 미국 선교사 스왈렌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해, 신약성경을 1년에 100번이나 읽는 등 독실한 신앙인으로 변모하였다.

그후 1910년 평양신학교를 3회로 졸업하고 남대문교회 승동교회 신천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6·25가 발발한 이후에도 김익두 목사는 신천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점으로 서울이 9월 28일 수복되고, 10월 14일 무렵에는 황해도 신천지역도 공산군이 퇴각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 날 김익두 목사는 기쁨으로 새벽종을 치고 50여 명의 성도들과 함께 새벽기도회를 드렸다.

그때 인민군 몇 명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와 김익두 목사의 가슴에 총을 겨눈다. 이천실 전도사와 임성근 장로 등 성도 5명이 그 앞을 막아섰고, 이들이 먼저 인민군의 총탄에 쓰러진다. 곧 이어 김 목사도 강단에서 끌려 내려와 찬양대준비실에서 총탄을 맞고 순교한다. 교회 정원에 임시로 시신이 매장되었던 김익두 목사의 장례식은 11월 19일 신천지역 50여 성도들이 신천서부교회에 모인 가운데 거행된다.

▲염산교회 김방호 목사 김화순 사모 허상 장로 이순심 김삼동 노병재 장일영 김석산(이상 집사) 김현 신학생 김정 김전 김완 김선웅 김연경 정도례 기삼도 양정자 김순님(이상 세례교인) 노순기 노옥기 노병인 이선임 노원례 노용길 박귀님(이상 학습교인) 이희연(이상 유아세례교인) 노준오 노무곡 노오차 노육차 노용남 노정자 노신자 노옥순 노일석 노경남 김조남 김춘희 김옥자 김금자 김신자 김희자 김부자 장귀남 최처녀 최유삼 최삼녀 최이남 최사녀 최오녀 최육녀(이상 주일학교 학생) 김동춘 노병규 노상기 김동열 정도애 김용환 전유녀 김군자 양사차 김부옥 양처녀 배길례 장대일 김순애 장공삼 김일순 장인택 전준채 김길순 전삼차 전사차 전오차 최용진 조생길 서소단(이상 신입교인)/2014년 제99회 총회 등재

김방호는 1895년 경북 경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물네 살이 되던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났고, 경산에서도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다. 당시 김방호 부자도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그만 부친이 총탄에 맞아 죽음을 당한다. 김방호는 미처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만주로 피신하고, 독립군에 가담해 훈련을 마친 후 군자금 모집책이 되어 국내로 들어온다.

함북도 삼수갑산 지역을 출장하던 중, 찬송가 소리를 듣고 부흥회 중이던 교회를 찾아간 김방호는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며 예수를 믿는다. 이후 부흥사의 소개로 한영서원을 졸업한 후, 전남지역에서 다슨 선교사의 조사로, 소룡리교회 장로로 사역한다. 1933년 평양신학교 제28회 졸업 후에는 영광읍교회 덕산교회 상촌교회 등에서 시무하다 해방을 맞는다.

영산포교회에서 사역하다 김방호 목사는 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3월 염산교회로 목회지를 옮긴다. 교인들은 배를 준비하고 피난하라고 권유했지만, 김 목사는 목회지를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그해 10월 27일 좌익세력에게 붙잡혀 미군 스파이로 몰린 김 목사는 부인과 4남매, 손녀까지 가족 7명이 한꺼번에 죽음을 맞는다.

염산교회는 김 목사 가족 뿐 아니라 허상 장로와 김동근 장로 등 총 77명의 교인들이 한꺼번에 순교하는 일을 당했다. 특히 많은 성도들이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고 순교한 염산 설도항에는 순교기념탑이 세워져있으며, 총회에서는 염산교회를 국가사적지로 지정하기 위해 제98회 총회에서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다각적인 추진 방향을 모색하는 중이다.
 

   
▲ 정읍 앵성교회 이마태 전도사/2014년 제99회 총회 등재

▲정읍 앵성교회 이마태 전도사/2014년 제99회 총회 등재

이마태는 1920년 5월 20일 전북 정읍군 불양면 대장리에서 이성열 집사의 4남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성열 집사는 이마태가 대성학교를 졸업할 무렵 신사참배를 않는다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때 맞은 상처로 이성열 집사는 소천하고 말았고, 아버지의 순교는 이마태가 목회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됐다.

25세가 되던 1944년 성경학교를 졸업한 그는 큰 형인 이주일 집사가 봉직하는 전북 부안 오중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당시 부안지역에서는 부안교회 김수현 목사가 국민촉성회를 조직하고 좌익 청년들의 불법 행위에 대처했다. 이 전도사는 김 목사의 끈질긴 부탁으로 국민촉성회 동진면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후 이 전도사는 1949년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며 국민촉성회와 오중리교회를 사임한다.

신학교 2학년 재학 중 6·25사변이 일어나 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가족이 있는 정읍 앵성교회로 내려왔다. 하지만 이 전도사가 과거 국민촉성회 위원장을 지낸 일로 인하여 집안 전체가 반동가족으로 몰렸고, 이 전도사는 동진면 내무서로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이 전도사는 두 다리와 손목이 다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부안경찰서를 거쳐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50년 9월 26일, 갓 서른의 이마태 전도사는 성직자, 우익인사들과 함께 전주형무소 뒤뜰로 끌려 나가 죽창에 전신이 찔린 채 순교했다.
 
▲법성교회 김종인 목사 김순화 성도 박옥남 집사 송옥수 집사 김진복 성도 신기운 집사 이광년 전도인/2014년 제99회 총회 등재
 

   
▲ 전남 영광지역 순교자들을 추모하며 염산 설도항에 건립된 순교자기념탑.

▲영광대교회 원창권 목사 이광연 집사/2014년 제99회 총회 등재

 전남 영광군은 전남 영암과 함께 6·25 당시 가장 많은 기독교 순교자가 나온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염산교회 이외에도 야월교회 백수읍교회 묘량교회 등에서도 많은 순교자가 나왔으며, 법성교회와 영광대교회에도 순교의 기사가 남아있다.

법성교회는 당시 교회를 담임하던 김종인 목사가 교우들의 피난을 돕고 자신은 남은 성도들을 지키다가 인민군에 체포되어, 면사무소 창고에 잠시 갇혀있다 결국 큰 딸 김순화 성도와 함께 순교한다는 기사가 전해진다.

영광대교회(당시 영광읍교회)를 담임하던 원창권 목사도 이 당시 임신 7개월의 아내, 열한 살 난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어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미영 기자  chopin@kidok.com

<저작권자 © 기독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미영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