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돈 교수(실천신대)

 
요즘 정부와 대기업 중심의 재계는 ‘최저생계비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와 노동자는 최저생계비의 대폭 인상을, 기업들은 미미한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저생계비는 사람이 살아갈 때, ‘최소한 이 정도는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비용’이다. 그것은 기본적인 삶의 유지가 가능한 상황을 말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최저생계비는 보건복지부 기준과 법무부의 기준이 다르다. 복지부는 정말 ‘먹고 살 수 있는 최저의 상황’을 상정하는 것 같고, 법무부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수준’을 기준으로 하는 것 같다. 이 기준에 따라 4인 가족을 기준으로 복지부는 166만원을, 법무부는 250만원을 최저생계비로 정하고 있다. 두 기관의 그 차이가 큰 데, 그것은 생존과 인간다운 삶의 차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몇 년 전에 지역공동체운동을 조사하기 위해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 복지클럽생협에서 복지에 대해서 깨달음을 주는 말을 들었다. 그 생협은 마을의 노인돌봄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정부는 이분들에게 최저의 복지를 제공하지만 자신들은 최적의 복지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최저와 최적은 한 글자 차이지만 아주 다른 의미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들은 한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노인들이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고, 또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최적화된 복지를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최저생계비 책정은 결국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내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그 ‘최저’라는 것이 겨우 비바람 가리고,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는 사회모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 중에 빈곤이 이 사회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승자독식사회’, ‘격차사회’, ‘제로섬사회’, ‘하류사회’, ‘절벽사회’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진단들은 대부분 한국 사회가 극심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으며, 경쟁을 따라가지 못해 낙오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고, 이들이 신빈곤층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예측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단지 생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풍요롭지는 않을지라도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허락되는 삶,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비교했을 때 절망에 빠지지 않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역시 우리 이웃들이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포도원에서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일꾼들에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준 ‘포도원 일꾼의 비유’ 말씀(마 20:1~16)이 대표적이다.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을 말씀 전체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성경에 따라 누구보다 우리 이웃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아가 교회가 우리 사회의 최저생계비를 복지부의 최저생계비가 아니라 법무부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저생계비 수준이 되도록 애써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이면, 교회 내의 최저생계비 문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의 교역자들이나 직원들, 선교단체 등에서 일하는 기독 청년들의 보수는 일반 회사의 보수보다 많이 낮다. 거의 최저생계비 수준이거나 아예 스스로 모금을 해서 해결하는 경우들도 많다. 사명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결국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열정페이’와 다를 바 없는 비도덕인 상황이다.

최저생계비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가 사람을 바라보는 애정의 결과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눈을 가져야겠다. 우리 이웃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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