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발발한 3.1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이 뚜렷하게 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전쟁론으로 대두되는 무장투쟁론, 일제기관의 파괴와 요인 암살을 강조하는 의열투쟁론, 열강에 대한 외교교섭을 중심하는 외교독립론, 실력양성에 기반한 준비론인 실력양성론 등으로 분화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해 무장투쟁론자들은 만주로 망명한다. 만주는 지리적으로 국내와 가깝다는 지정학적 특성과 1860년 이후로 이주 한 조선인들에 의하여 동포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동포사회를 중심하여 명동학교나 신흥학교 같은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국내에 비해 비교적 일제의 압제에서 자유롭다는 특성을 이용해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독립군은 비밀결사대로 계몽운동을 주도한 신민회 계열과 의병투쟁을 주도했던 의병계열로 나뉘어져 활동하였다. 이들은 각각 공화주의와 복벽주의를 지향했는데 3.1운동을 거치면서 과거로 희귀하는 군주체제 복귀의 복벽주의는 점차 사라지면서 공화주의가 대세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3.1운동을 거치면서 분산되었던 독립군들은 서간도와 북간도 등에서 결집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1920년 6월 의병장 출신의 홍범도가 지휘하던 대한독립군과 최잔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등은 서로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라 개명하고 첫 번째 전투를 벌인 것이 봉오동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그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패망한 조국을 위해서 싸운 저들은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간도 출병을 단행한다. 간악한 일제는 독립군 토벌을 빌미로 만주에 정착한 우리 민족들을 대대적으로 살육한 것이 이른바 ‘경신참변’이었다. 1920년 10월~11월까지 두 달 동안 인류사에 가장 극악무도한 일제는 3600명의 조선인을 학살한다.

이후 독립군 부대들은 전열을 정비하고자 북만주 미산에 집결했고 1921년 1월 소비에트저니아의 이만을 거쳐 알렉셰에스키로 이동한다. 1921년 6월 만주에서 옮겨온 독립군 부대와 빨치산들은 군부지휘권을 놓고 상해파, 이루츠크파와 고려 공산당이 대립하면서 일명 ‘자유시사변’으로 불리는 유혈참변을 치러야 했다. 만주로 복귀한 민족주의 계열은 남만주의 참의부와 정의부, 북만주의 신민부로 재편된다. 저들은 삼권분립에 입각한 조직을 갖추고 군대까지 보유한 자치정부로의 기능을 하면서 그 시대의 만주 민족공동체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