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

중생한 자라면 순종의 삶으로 증명해야
정말 중생 확신한다면 믿음을 갖게 되고 거룩한 삶이 함께 한다

 

 

중생에 대한 질문은 시대적 이슈이다. 다른 말로는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이다. 혹자는 언제 중생했느냐는 질문을 묻곤 한다. 또 다른 혹자는 중생을 위한 집회를 인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모든 질문과 의문에 대해 우리는 설교자로서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먼저 본문을 정해보자. 마태복음 8장 5~13절이다. 백부장의 설교로 무슨 중생에 대한 설교가 가능한지 질문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흔히 중생에 관련된 본문이라면 요한복음 3장을 손꼽는다. 하지만 성경 전체가 중생과 관련되어 있음을 감히 말하고 싶다.

 
백부장은 누군가?

백부장을 향해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하셨다. 그의 행위를 보고 평가하신 것이 맞지만 이렇게 놀란 표현을, 아니 당황스러운 표현을 주님께서 할 정도로 백부장의 행위는 매우 감동적이었다고 여겨진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이 누가복음 7장 1~10절에도 기록되어 있다. 조금의 차이가 있는데 누가복음에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눅 7:3) 예수님께 보냈는데 그들이 예수님께 백부장에 대해 평가하길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5). 예수님께 나아와 그들은 “간절히 구”한 후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눅 7:4)고 평가했다. 놀라운 평가이다. 인간적 평가였지만 백부장은 고넬료처럼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면 누가복음의 내용과 마태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조화시킬까? 아마 수줍었던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예수님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보낸 것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런 후 그는 예수님께 나아갔다고 본다면 두 복음서의 내용을 조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조화 까지도 본문의 의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주님은 무엇에 놀라셨나?

유대인들의 추천이든 백부장의 청원이든 주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마 8:7)고 말씀하셨다. 이때 백부장의 답변은 놀라웠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였고 이어서 하는 말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 8:8)라고 덧붙였다. 이 내용은 마치 베드로가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의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놀라운 결과를 맞이하자 그는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고 했다. 백부장 역시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는 감당치 못하겠다는 두려움, 즉 경건한 두려움을 갖게 이른 것이다.

또 삭개오의 경우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는 키가 작은 자였기에 많은 자들에게 조소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그에게 위로가 된 것은 물질이었다.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를 아셨고 돌무화과나무 위에 있던 그를 보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고 했다. 이 제안을 들은 삭개오는 기뻤다. 자신에게 큰 위로, 아니 유일한 위로였던 물질을 내려놓게 된다. 대단한 전환이다. 이에 대해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고 평하신다.

이런 일이 백부장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비천한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을 그는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한다. 이어서 “다만 말씀으로만”(마 8:8)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 이유는 철저한 순종을 고백한다. 백부장의 순종은 놀라운 정도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주님은 백부장의 순종에 놀라셨다. 그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중생과 순종

오늘 본문은 백부장의 중생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중생하느냐라는 것이기보다 중생에 대한 것을 의도하고 있다. 먼저 중생에 대한 정의를 보자. 칼빈 선생은 자신의 걸작 『기독교강요』 2권 3장에서 중생에 관해 설명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빌 1:6)을 의지 안에 일어난 회심, 즉 중생의 시작이라 한다. 의지의 전환이다. 하나님은 의를 향한 열망, 사랑 및 연구를 우리 심정에 흥분시키시므로 또는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심정을 의로 바꾸시고, 훈련시키고 그리고 인도하시므로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견인을 확인시키셔서 이 착한 일을 완성한다. 중생이 만일 일어났다면 그 목적을 성취해가는데 참된 의와 거룩이다(1권 15장 4항). 중생의 목표는 신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와 신자들의 순종 사이 에 조화와 일치를 나타내어 하나님의 자녀들로 수용되었다는 양자됨을 확언하는 것이다(3권 6장 1항). 한 마디로 말하면 중생했다면 반드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의 과정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의 비밀적 섭리이다. 그 결과를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해 그분은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그래서<돌드레히트 신조>의 3~4장의 12~13항에서 중생을 설명한 후 14항에서 믿음이 선물임을 설명한다. 그 믿음은 반드시 순종이 뒤따른다. 그래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믿음의 순종]”(롬 1:5)라 부르는 것이다(3권 2장 8항). 순종은 곧 거룩한 삶, 자기 부인 또는 십자가 지는 삶을 의미한다.
 

이미 중생한 백부장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요 3:2).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했다. 그는 중생한 자이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몰랐다. 그래서 주님은 중생을 확언시키기 위해 그것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백부장은 하나님의 비밀적 섭리로 중생한 자였고 거룩한 삶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이 삶이 중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했기에 인정받는 삶을 산 것이다. 하지만 니고데모처럼 그 깨달음과 열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가시적 사건을 그에게 일어나게 하셔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 또는 자녀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하셨다. 그는 사랑하는 종이 중풍병에 걸려 힘든 모습을 본다. 낫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가야한다고 그는 본 것이다. 의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로. 그리스도가 만난 백부장은 이미 중생하였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고 순종까지 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이미 중생에 대한 증거인 믿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중생했기에 그리스도를 향할 수 있었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었고, 순종을 행하고 있었다. 중생은 성령의 비밀적 사역이지만 이것을 우리에게 확언시키기 위해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백부장에게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또 하나 남아 있다. 성령께서 중생을 일으키시는데 백부장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제자들도 의심하고 도망갔던 것은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요 7:39). 그런데 백부장은 성령의 역사로 이미 중생했고, 선물인 믿음까지 받았고, 더욱이 순종까지 행하고 있으니 주님의 칭찬은 극에 달하여 “놀랍게” 여기신 것이다(마 8:10). 물론 후에 오순절에 모든 자들에게 임하겠지만 개인에게 역사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도 들은 말씀을 깨닫게 되는데 백부장은 이미 개인적으로 임한 성령의 사역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가하시던 바로 그 당시 상황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1)고 하셨다. 물론 후에 많은 자들이 믿음을 선물로 받겠지만 제자들을 포함한 당시의 모든 자들보다 백부장은 중생, 믿음 및 순종까지 행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진리가 여기 마태복음 8장에 담겨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거짓 중생, 거짓 믿음 및 거짓 순종을 행하는 자들을 모두 내쫓으시겠다고 하신다. 정말 중생했다고 본인이 확신한다면 반드시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을 가졌다면 거룩한 삶 또는 순종이 함께 한다. 연약해서 늘 지키지 못해도 간절함까지는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예복을 입지 않고 앉아 있다고 내침을 당할 것이다. 중생을 일으키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고, 깨닫게 하는 믿음을 주시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고, 순종케 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다. 스스로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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