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단 역사 그리고 정체성 ③ 교단선교:역사와 현황, 발전과제

선교 태동기부터 적극적 협력사역 … GMS 창립 이후 행정전문화로 제도적 발전 이끌어
100개국 2396명 파송 최대교단으로 성장 … 다양한 현장 상황 대응할 종합적 전략 필요


 
▲ 김성태 교수
총신신대원 선교학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인 호레이스 뉴턴 알렌이 1884년 9월 20일 인천 제물포항을 통하여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에서 장로교회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알렌의 입국이 공식적인 장로교회의 선교 시작이라기보다 목사 선교사로서 입국한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1885년 4월 5일을 선교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록 한국 땅에 발을 딛지는 못했지만 당시 만주 봉천(지금의 심양)과 압록강 접경 지역인 고려문(중국과의 교역장소)을 오고 가며,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존 로스 선교사의 활동이다. 그가 세례를 주고, 훈련시킨 서상륜이 1882년 로스 선교사의 파송을 받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인 의주로 와서 전도활동을 했다. 이후에 평양, 서울, 자신의 아내 교향인 황해도 솔내까지 전도활동을 하는 중에 1883년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인 솔내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로스 선교사는 1883년 백홍준을 북한 땅에 파송하였는데 그는 의주, 강계, 구성, 삭주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활동을 하고, 성경을 배부하였다. 그의 활동에 힘입어 의주에 1884년 자생적 교회가 세워졌다. 1889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곳에 와서 백홍준을 통해 예수 믿게 된 33명의 사람들을 의주에서 세례주지 못하고, 맞은편 중국지역 안동(지금의 단동) 압록강변에서 세례를 주었다.

필자는 본 교단 관점에서 각 시기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어떻게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 왔는지 그리고 오늘의 선교 현주소는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첫 번째 시기는 국내외 선교의 태동기이다. 이 시기를 1907년부터 1938년으로 나눈다. 1938년은 27차 장로교회 총회가 평양 서문교회에 모여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를 가결한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해이다. 이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들은 사전에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신사참배 가결 이후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가 모든 총대 목사들을 데리고 평양 신사에 가서 신사참배를 감행하였다. 한국장로교회를 태동시킨 4개 선교부(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와 관계를 단절하고, 초기부터 타오르던 선교의 불길을 무참하게 꺼버린 배교의 날이었다. 1907년도의 독노회는 7명의 목사님들을 안수하였는데 그 중에 한 분인 이기풍 목사가 탐라(지금의 제주)에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1909년부터 10년까지 중국 만주지역, 일본, 해삼위(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의 한인 디아스포라선교를 수행하였다. 1913년에 한국장로교회가 조직교회로서 총회가 설립 된지 일 년 후에 세 사람의 목사 선교사를 중국 산동성 내양현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협력을 통한 타문화권 선교를 하였다. 이 시기 선교특징을 분석해보면 한인디아스포라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감리교회와 협력하여 해삼위, 만주, 일본 등지에서 선교지역분할 정책을 실시했다. 국내 교회와의 협력 뿐 아니라 외국 선교부와 적극 협력하여 선교지역을 개척했고, 선교자원을 공유하고, 현지 교회와의 유대도 밀접하게 하였다. 총회 선교부는 각 지역노회의 선교사역을 전략적으로 분업화하고, 선교사 관리에 치중하였다. 목회자 선교사 뿐 아니라 직능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팀 선교를 실시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선교의 황폐화 시기이다. 이 시기는 1939년부터 1955년도까지이다. 한국장로교회의 신사참배 가결 이후 일본군국주의는 한국교회에 대한 핍박을 더욱 가중화 하였다. 1945년도 해방이 되었지만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유무에 대한 논란으로 크게 분열이 되었고, 북한은 구소련군의 진주와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 등으로 한국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전후 복구시기에 한국교회는 외국선교부의 재정지원과 전 세계 성도들의 기도와 후원 등을 통하여 한국교회를 재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한국장로교회는 선교사를 한 사람도 파송하지 못하였다. 다만 디아스포라 선교가 거의 뿌리를 내려서 선교현지에 디아스포라 교회를 조직교회로서 정착시켰다. 이것이 전 세계의 한인 디아스포라선교의 기반이 되었고, 후에 디아스포라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세 번째 시기는 선교 재개 시기로서 1956년부터 1967년도까지이다. 한국장로교회는 복구시기를 지나서 1956년도에 비록 제한된 숫자이지만 선교사 파송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대내외적인 어려운 여건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장로교회는 선교를 수행할 수 없었는데 전쟁이 끝난 이후에 전 민족적인 회개운동과 전도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장로교회의 내재적 본질로서 선교의 사명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결단이었다. 1956년도에 최찬영, 김순일을 태국에, 1957년도에 계화삼을 중국대륙 선교재개를 염두에 두고 대만으로, 1967년도에 채은수를 대만으로 파송한다. 이 시기는 한국교회가 외환송금이 상당히 제한되어있고, 어려운 시기로서 선교사들에 대한 재정지원이 원활하지 못하여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파송된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최찬일, 김순일 선교사는 후대 선교사들에게 상당히 모범이 되는 선교사로서의 발자취를 남기었다.

네 번째 시기는 선교의 각성 기간으로 1968년부터 1980년도까지이다. 여의도에서 두 차례의 대규모 전도대회(1973, 1974)가 열렸고, 1977년도에는 민족복음화운동과 80년도에는 세계복음화대회가 열렸다. 본 교단은 총회선교부 파송으로 28가정을 브라질, 미국,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독일, 이집트, 대만 등지에 파송하였다. 선교형태는 디아스포라 한인선교와 타문화권 선교 등이었다. 이때의 선교는 선교에 불이 붙은 개별 선교사나 개교회 당회장의 결단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구심력 있는 선교정책이나 지역연구를 통한 전략선교 또는 총회선교부의 선교행정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 본 교단의 해외선교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미친 한 지도자가 있었는데 조동진 목사이다. 조 목사는 본 교단 뿐 아니라 타 교단의 해외선교의 각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다섯 번째의 시기는 선교 활성화 기간으로 1981년부터 1990년도까지이다. 이 시기는 전국적인 도시화 현상, 비약적인 경제성장, 해외여행 자유화 등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 시기에 본 교단은 미국정통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로 총신대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하던 손영준 목사 주도로 선교훈련원이 계절학교 형태로 일 년에 두 번 열렸고, 6회를 마치면 본 교단 선교사로 영입이 되어서 파송되었다. 이 시기 본 교단은 144가정 239명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지역적으로도 오대양 육대륙에 파송이 되었고,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 및 타문화권 선교가 이루어졌다. 선교사역도 교회개척, 신학교, 교육선교 등 다양하였다. 손영준 목사 주도의 선교훈련원은 국제적으로 공신력 있는 선교기구와 지도자들을 소개 받는 중요 통로가 되었다. 이때 선교사 후보생들이 자신들이 노력하여 AIM, SIM, OMF, WEC 등과 연관하여 전 세계의 선교지역으로 파송되어 나갔다.

여섯 번째 시기는 선교의 조직화와 제도적인 발전의 시기로서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본 교단의 선교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지도자들은 선교사 출신으로 성공적인 사역을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와서 선교를 선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제도적으로 정착시킨 선교국장 혹은 사무총장들의 활동들이다. 또한 일찍이 선교에 비전을 품고, 목회를 성공적으로 하며 교단에서 존경 받는 지도자들이 선교부장 및 총회세계선교회(GMS)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선교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선교사 출신으로 총회선교부가 교단 안의 교회병행기구로서 전문적인 선교회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강승삼 목사와 이영희 목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뒤를 이어 선교책임자로 부임한 김활영 선교사 등이 각자의 역할을 시기적절하게 잘 감당하였다. 2015년 3월 현재 본 교단의 선교사는 100개국에 1318가정 2396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2015년부터 GMS를 보다 전문화 된 선교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교회 모든 사무행정과 각 부서들을 경기도 화성 월문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이 기간 동안 획기적인 선교행정과 조직의 발전이 있었고, 선교사훈련도 자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선교행정의 전문화와 직능별 전문 간사들의 충분한 확보이다. 선교사 대비 최소한 5% 정도의 본부 간사들을 확보해야 한다. 이들 간사들은 파송된 선교사와 동일하게 본부선교사라는 자의식과 안정감 있는 장기적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하고, 각 분야의 실무 전문 간사들이 공정한 인사행정 가운데 투명하게 선출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전략적인 선교강화이다. 본 교단의 선교사 수효는 한국교회 전체 수효의 십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다. 선교지역도 크게 15지역과 53개 지부로 구분되어 있다. 대내외적으로 전략적인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서 선교 네트워크와 동반자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한다. 국내의 각 교단 선교기구들, 선교단체들, 선교전문기구와의 유대강화와 선교 현지교단과의 관계설정 등이다. 독불장군식의 선교는 지양되어야 한다. 비거주선교전략, 비즈니스선교와 각종 개발 NGO 등을 통하여 선교가 시급하나 선교의 문이 닫혀 있는 지역들을 공략해야 한다. 이것은 미복음화종족선교, FTT선교의 적극적인 참여이다. 선교사로서 실무 경험이 있는 지역 및 문화연구 석박사 이상의 학위자들과 각 지역별 선교지부의 현장 선교전략을 종합화하여 이를 총회선교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종합적인 선교전략 연구센터가 세워져야 한다. 이런 전략이 수립된 이후에 선교자원(인적, 물적 자원)을 배분하고, 본 교단 선교의 장단기 목표를 세워나가야 한다.

세 번째는 선교사 돌봄의 전문적인 기구가 세워져야 한다. 날이 갈수록 중도 탈락의 선교사 수효가 많아지고 있다. GMS 내에 선교사들을 종합적으로 돌볼 수 있는 전문 기구가 세워져서, 위기상황에서의 특수 상담, 인간관계, 가정문제, 자녀문제, 재정위기, 영적 침체 등 모든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직능별 전문 간사들과 기구가 있어야 한다.

네 번째는 선교재정과 선교행정 및 현지선교활동 등에 대한 전문적인 감사기구가 독립적으로 세워져야 한다. 재정은 독립적인 부서가 되어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재무나 회계 전문가이어야 한다. 또한 주기적으로 모든 재정과 행정, 현지선교실태에 대한 전문적인 감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감사위원회도 GMS 산하에 있으나 독자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투명한 감사에 어떤 방해도 받아서는 안 된다.

다섯 번째는 한반도의 특수 상황으로서 본 교단의 북한선교전문가들을 규합하고, 양성화하여 통일을 대비한 입체적인 북한선교전략과 통일 이후의 북한교회 재건과 동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종합적인 선교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본 교단의 선교는 미래 시대의 세계교회의 판도를 주도하는 의미심장한 발걸음이다. 전 세계교회의 59%의 자원이 비서구 지역에 있고, 복음주의자들의 70%가 비서구 지역에 있다. 그중에서도 아시아의 비중은 중국교회의 성장과 함께 날이 갈수록 중요해 지고 있다. 본 교단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시대를 꿰뚫어 보는 선교적 안목과 마라나타의 선교비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