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열 목사(원주중부교회)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행동하는 믿음, 수고하는 사랑, 인내하는 소망의 좋은 소문은 널리 퍼져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교회의 좋은 소문은 듣는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합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안식처로 삼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좋은 소문나기를 소망하며 노력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좋은 소문을 내려고 사람들이 관심 두는 한 가지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인권운동에, 어떤 교회는 사회복지나 지역사회 봉사에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인이나 노숙자에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좋은 소문은 사람들의 관심에 연관된 어떤 한 가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내야 할 좋은 소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주는 바 주님의 삼중의 은혜, 곧 믿음, 사랑, 소망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바울이 지적한 데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내던 좋은 소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먼저, 교회는 행동하는 믿음으로 소문이 나야 합니다.(3a)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로 소문나 있었음을 말씀하는데, 여기서 믿음의 역사란 ‘행동하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위대한 선물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그 자체가 행위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의 행위, 말씀을 실천하는 행위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믿을 때에 그에게 말하고, 그를 위해 일하고, 그에게 주거나 빌려주기도 합니다. 믿으면 행동합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한 행동은 믿음 자체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믿음은 예배행위로 표현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주일간 힘써 일하고 쉬어야 할 시간에 주님께 감사해서 주일 아침 예배에 나오는 것, 그것은 믿음이며 믿음의 표현이고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소문난 교회와 소문나지 않은 교회의 차이중의 하나가 예배에 대한 열정과 참여의 차이입니다.

예배는 행동하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실제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소문난 교회는 한결같이 준비된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초대하여 예배실을 가득 채우는 것을 봅니다.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예배에 초대하기 위해 정열적인 노력을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았음을 믿는 믿음은 ‘증거’, ‘전도’, ‘예수님 자랑’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전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 고백으로 다른 이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믿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행동하는 믿음은 예수님을 자랑해야 하겠다는 고민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전도의 연습의 사람으로 그리고 전도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교회는 수고하는 사랑으로 소문이 나야 합니다.(3b)

데살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로 소문이 났음을 증거 하는데, 사랑의 수고는 사랑을 하되 ‘수고하는 사랑’을 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하여 받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속되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은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감사와 헌신으로 표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무관심속에서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갖게 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곧 사랑을 유지하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수고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 수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 하나님의 원치 않는 것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에 충성하는 수고자들의 모습을 성령의 열매로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서 다양한 섬김을 나타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수고하는 사랑에서 ‘수고’라는 말은 ‘자르는 것’, ‘채찍으로 때림의 고통’, ‘아픔 중에 애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고난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수하면서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며, 교회의 봉사 일을 하며,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이 수고하는 사랑입니다. 육체의 현저한 일들로 인하여 가정이 깨어지는 시대에 말씀으로 가정을 지키는 일과 기도로 교회와 교회의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축복하는 일도 수고하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수고하는 하는 사랑은 삶 속에서 대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함께 믿음의 대화를 나눌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문제를 풀어갈 때 진정 사랑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인내하는 소망으로 소문이 나야 합니다.(3c)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여기서 소망의 인내란 소망을 붙들 돼 상황이 안 좋고 어려울 때도 인내하며 ‘소망을 버리지 않고 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소망이란 구원의 소망을 의미하는데,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대로 그 구원을 온전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소망은 하나님이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을 마지막으로 강조한 13장 13절 말씀과는 달리, 데살로니가의 좋은 소문을 말하면서 소망을 마지막에 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가 종말론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종말론적이기에 결국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시고 승리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소문으로 나는 소망은 목숨 걸고 인내하는 소망입니다. 인내하는 소망은 비굴하거나 상황에 따라서 변화는 소망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소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어디에서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과 그 교회는 소문나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세상 삶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장차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소망의 삶을 사는 자는 세상의 물질에 유혹당하지 않으며 세상의 관계유지에 매이지 않으며 담대합니다.

 
결론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소문이 나는 교회요 성도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좋은 소문이 나려면 항상 ‘신전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주도하면서 철저하게 삶의 모토로 삼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칼빈이 그의 종교개혁운동과 글들 그리고 실천적 삶을 통해서 모든 자들에게 좋은 소문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신앙의식과 삶의 태도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서있다는 고백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모든 사람들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때에 행동하는 믿음, 수고하는 사랑, 인내하는 소망이라는 좋은 소문은 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할 때든 하지 못할 때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우리는 말씀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때에 소문은 저절로 나게 됩니다. 소문은 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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