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창 목사, 이춘식 목사, 강태윤 선교사

땅 끝까지 복음 전파되는 그날까지
박영창 목사(미주광복회 명예회장)

고비마다 교단 구심점 됐다


50주년을 맞은 기독신문의 2000호 발행을 먼 이국땅에서 축하드립니다. 세월의 유수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나이 50에 기독신문이 창간되고, 다시 50년이 지나 희년의 축하를 제 나이 백수에 드릴 수 있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의 목회 나이와 기독신문의 연수가 동갑나기라는 점도 나름 큰 의미가 있습니다.

 

1세기를 살아오면서 나라를 잃은 슬픔과 해방의 기쁨, 그리고 전쟁과 부흥의 수많은 희비를 겪었지만 그 중에 기독신문의 창간과 교단의 발전은 가히 기쁜 일이었습니다. 기독신문이 창간될 당시 어렵고 힘든 시대적 환경에서 함께 신학을 하고, 나라와 교회의 앞날을 논하던 동지들이 “장로교단의 역사를 계승하고 교단의 구심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로 신문을 창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함께 고민하고 기뻐하며 축하했던 일들이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새롭습니다.

오늘날 조국과 한국교회가 있기까지는 기독신문의 역할이 컸다고 봅니다. 그것은 나라의 발전과 한국교회의 기도가 무관하지 않았으며, 기독신문은 한국교회가 복음주의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중심을 잡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단이 분리되기 전인 1948년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대한YMCA와 명지대학에서 청년활동과 복음화에 전념하다가 1965년 1월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저의 부친은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1939년 3월 일본 제국 의사당에 신사참배 반대 경고문을 투척하며 항일투쟁을 하다 순교한 박관준 장로입니다. 아버지는 어려운 시기에 외아들이었던 저를 일본 의사당 경고문 투척에 동참시키는 등 투철한 애국심과 신앙, 교육으로 조련시켰습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일본과 중국으로 유학을 시켰고, 중국 망명시절 삼천리잡지사에서 기자생활을 시작으로 해방 이후 대한YMCA에서 발행하는 ‘청년’의 주간, 평양 수복 직후 평양신문 발행인, 한국기독신문 주필, 세기통신사 주간 등 다양한 언론에 몸담으면서 소양을 쌓았습니다. 언론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일찍부터 경험한 저는 당시 기독신문이 창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살아있는 교단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부친의 호가 ‘염광’인 까닭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성경구절에서 따 온 것입니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본인의 호 역시 ‘월광’인 것은 달빛처럼 어둔 세상을 밝히라는 의미입니다. 신문의 본질적 사명 또한 어두운 곳을 비추는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기독신문이 2000호를 지나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그날까지 복음적 사명과 살아있는 언론의 임무를 다하는 신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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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나무 아래의 힐링
이춘식 목사(진안 배넘실교회)

농어촌교회 교류 모델 제시


33살의 나이에 진안 금지교회에 첫 부임하여 목회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 가을 농민들이 갈아엎는, 가격이 폭락한 농산물을 팔아주다가 얻은 별명이 ‘배추목사’였습니다. 당시에는 목회자로서 품위를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된 나를 향해 조롱을 담아 한 표현이었지만, 지금은 명예로운 별명으로 승화되었습다. 나름대로 행복한 농촌 목회였습니다.

 

그러나 목회 활동의 보람을 채 느끼기도 전에 용담댐 건설로 교회당이 물에 잠기고, 이웃하던 천여 명의 수몰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였습니다. 특히 보상을 받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영세수몰민들이 필자의 눈에는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 만난 유대인으로 보였습니다. 이들의 자립을 돕고자 만든 공예품이 2002년 FIFA 공식지정 상품으로 선정되어 동분서주하다가 기독신문 기자의 취재로 교계에 널리 소개됐습니다. 기독신문이 나의 사역에 첫 기폭제가 된 것입니다.

피와 땀과 눈물로 진행되었던 정착촌 건설은 결국 백지화되었습니다. 처음엔 원망과 불평이 있었으나 나중에 필자의 경험과 연륜의 부족 때문이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천여 명의 수몰민 대신에 백여 명의 금지 배넘실마을 주민들을 복음화 하는 사역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마을을 위하여 도농직거래를 힘쓰며, 도시 단체와 결연을 추진하다가 한국농선회 주선으로 지금은 형제교회로 지내고 있는 산정현교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도농교회간 교류의 선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산정현교회와 아름다운 교제를 모델로 제시한 것도 기독신문이었습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 2007년부터 마을 만들기 관련 정부 지원 사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마을은 긍정적으로 변화되었고, 많은 성공사례가 쌓이는 동안 마을 주민의 40% 수준이었던 출석교인도 80% 수준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농촌목회 사역을 박수를 보내는 분들도 있었지만, 목회자가 기도와 설교에 전념하지 않고 경제적 이권을 좇는다고 의심받을 때 저의 목회를 변호해준 든든한 지원군 또한 바로 기독신문이었습니다.

요즘 농촌목회자들은 생활이 어려워져서 과거에는 금기시 되었던 경제활동을 하는 분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슬픈 현실 속에서 이사야서에 나온 대로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행복한 예수마을 만드는 것이 필자가 감당하고 싶은 마지막 십자가입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로뎀나무 아래 쓰러진 엘리야를 힐링(healing)하여 준 것처럼 기독신문이 필자에게 그러한 역할을 해주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농어촌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기독신문의 지령 20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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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스 뜰이 보이는 센터 옥상에서
강태윤 선교사(GMS·베들레헴 거주)

팔레스타인 문제 주목했다


고 한명수 목사님께서 주필로 계실 때 기독신문 중동지부 지국장 임명장을 가지고 베들레헴에 오셔서 앞으로 중동 지역 문제가 중요할 텐데, 이곳 소식들을 잘 알려 주시면 좋겠다고 말씀 하시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지금 중동은 IS문제로 세계가 경악을 하고 있고, 한국사회와 교계도 마찬가지로 놀라움 속에 대책을 논의하느라 분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독신문이 교단을 넘어 한국교계에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꼽으라면 우선 두 가지를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당시 한국 사회와 교계는 중동과 이슬람에 대해 별 관심도 없이, 단지 중동에 건설 붐이 일고 있다고 인식하는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스라엘 내부 문제를 넘어 국제사회에 중요한 이슈였음에도 이를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신문은 무관심 속에 있던 팔레스타인 문제를 알리는데 앞장섰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독신문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와 교계지들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게 됐다고 봅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을 선교지로서 인식하도록 만들고, 오늘날 이곳 베들레헴 보아스 뜰에 센터를 건축하는데 총회산하 많은 교회들이 관심을 갖고 동참하도록 기독신문이 지대한 공헌을 해주었습니다. 앞으로도 베들레헴센터를 통해 복음의 마지막 땅 끝 선교를 이루는데, 더 많은 분들이 기도로 함께 할 수 있도록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둘째, 해외 선교지에서 발생하는 이단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한국교회에 적극적으로 경각심을 일깨워주신 일입니다

한국의 모 이단 집단이 이스라엘에 세력을 뻗치고, 베들레헴에까지 들어와 세력을 넓히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단에 맞서 싸우던 필자에게는 이단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던 현지 목회자들이 음해성 편지를 한국교회에 보내고, 이단 측에서는 개인을 협박하는 메일을 보내는 등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단 문제는 현지를 넘어 한국교회가 바로 알고 대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기독신문에 알려 4대 보수 교단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선교지에서 이단문제의 심각성을 전했습니다.

기독신문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준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덕분에 베들레헴에 이단이 활개를 치지 못하고 주춤한 상태에 있습니다.

갈수록 맘몬주의와 개교회주의로 흐르는 교계상황 속에서 지령 2000호를 맞는 기독신문에게는 바른 신학과 말씀을 수호하는 등대와 같은 역할이 그 어느 때 보다 요구되어진다고 믿습니다. 이 귀한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일선 현장에서 수고하는 모든 기독신문 관계자분들께 베들레헴 보아스 뜰이 보이는 센터 옥상에서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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