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욱(CBS 컨텐츠 본부장)

교단지 정체성 찾기 위해 교단 벽 넘나들어라
보다 유연한 역할 재정립, 총회 신앙공동체 커뮤니케이션 허브로 작동할 때 공감 얻을 것


 
▲ 변상욱
CBS 컨텐츠 본부장
기독신문의 지령 2000호 소식을 전해 듣고 기독신문 홈페이지를 여는 것으로 탐방을 시작했다. 홈페이지의 첫 인상은 시원하고 단정하다. 사진 컷이 넉넉히 들어가 눈이 편한 것이 마음에 든다. 혹 다른 교단지와 연합지들은 어떤가 싶어 하나씩 찾아 열어보았다. 확실히 기독신문의 디자인과 레이아웃이 세련되고 흐름도 좋다.

묵직한 기획물, 스스로 한정한 독자층

교단 소식이나 교계의 동향을 전하는 기사들을 제쳐두고 기획물들을 살폈다. 크리스천 기자상 심사 때면 느끼던 것이지만 기독신문의 기획들은 역시 묵직하니 무게감과 연륜이 느껴진다. ‘기독교 인문학’, ‘신년 기획 하나~일곱’, ‘창간 50주년 연중기획-개혁주의 장로교 뜻을 묻고 길을 열어가다.’ 눈에 띄는 대로 읽어나가는데 고개가 끄덕여지고 생각할 꺼리들로 멈추는 시간이 길어진다.

문득 기획물들이 속한 카테고리를 올려다 보다 ‘기독교 인문학’이 홈>설교로 되어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다 홈페이지에 열거된 카테고리를 따라 하나씩 열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 많다. 뉴스 카테고리에만도 교단, 교계, 신학, 미션, 목회, 교육, 문화, 기획/해설, 카툰, 설교 등 모두 방이 10개이다. 오피니언으로 옮겨가면 거기에도 사설, 칼럼, 기독논단, 시론, 독자, 오피니언, 기자수첩. 그리고 커뮤니티와 총회 방이 추가로 기다린다. 이렇게 구분해야 했던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독자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방은 아닌 듯 여겨진다. 카테고리를 쫓아 살펴보기에는 번거롭다. 한마디로 올드패션이 아닌가 싶다. 독자를 끌어들여 읽기 편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목회자, 장로, 여성, 청년, 성가대, 교회학교. 이런 구분이 더 현실적이 아닌가?

내친 김에 더 까칠하게 읽어나가기로 했다. 제목과 필자들에 주목해 훑어나갔다. 어딘가 기우뚱하게 느껴지는 바가 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목사와 신학자에 의한 것이다. 취재기사는 물론 기자들의 것이지만 이를 제외한 사설, 칼럼, 논단, 시론, 독자란 까지도 목회자가 대부분이고 일부 신학자의 글들이 눈에 띈다. 그 둘을 합쳐 일컫자면 신학대학 출신의 교계인사들에 의해 지면이 점유되어 있는 셈이다. 신학적 바탕이 탄탄하고 목회론이 정립된 목사와 신학자의 논지와 의견에 비중을 무겁게 두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신문의 주 기능은 네트워크이다. 신문지면에 공급자/이용자, 기관/교회/대학, 목회자/신학자/평신도, 노인/청년/남성/여성/청소년, 진보/보수/중도가 적절히 배분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나아가 교류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것이 독자에게 유익하다. 그 결과이겠지만 언뜻 살피기에도 여성과 청년, 문화 분야의 콘텐츠들이 교단과 신학 쪽에 비해 크게 비중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목회자 또는 신학자가 기고한 글들도 내용으로는 편중돼 있다. 성경을 토대로 한 신앙칼럼이나 성서해설, 목회와 신앙생활에 관한 근엄한 권고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무겁고 중복되어 지루하다. 목회에 필요한 정보도 아니고, 현실에 대한 넓은 시야나 안목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시대의 트렌드나 사회 변화를 읽어내고 교회로서 대응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담론을 형성하는데 끈기 있게 주목하고 무게를 더 두면 어떨까? 때로는 교회 바깥의 사람이 한국교회를 향해 거칠게 던지는 이야기가 목회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런 것들로 지면이 팽팽한 긴장감도 돌고, 흥미진진한 맛도 있고, 신선하고 펄쩍펄쩍 뛰는 날것 냄새도 풍겨야 하는데 지금 이것은 역시 올드패션이다. 이런 의문도 떠오른다. 독자의 대부분이 목회자들이라 하더라도 이런 내용을 필요로 하고 기다리고 있을까? 교회와 목회자가 필요한 정보들이 교단총회나 교계기관 정보, 복음적인 권면뿐일 리 없다. 디지털, 스마트, 당회운영, 리더십, 교회 회계재정, 고령화 문제, 청년청소년 부재, 교회 건축, 부동산, 음향영상 설비, 편의시설, 카페 운영, 어린이 집 운영 등 새로운 라이프 트렌드는 성도들의 삶이고 성도들의 삶은 목회의 현장이다. 현재로서는 총회 일변도에 중앙의 기관들 소식이 너무 비중이 커 보인다.
 
 
지역성 강화와 커뮤니티 형성

언론의 요즘 대세 중 하나는 하이퍼로컬리티, 지역성의 강화와 커뮤니티의 형성이다. 신문에 지역 개교회 소식이 광역별로 정돈되어 해당 지역 소식을 찾아 읽을 수 있으면 좋다. 지역성은 바꿔 말하면 현장성이다. 교단과 기관의 행정 및 사업 현장, 목회현장, 일상적 삶의 현장 등을 놓고 균형을 맞춰야 한다. 독자들의 글이 더 올라오고 그 글에 댓글을 달거나 아예 독자를 찾아가 만남으로써 교단지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가 형성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쉽게 간추리자면 지금의 기독신문에 생활정보지와 지역신문의 장점을 보강해 갈 수 없겠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생활정보지와 지역신문, 중앙주간지의 결합이 쉬울 리 없지만 교단지라면 가능해 보인다. 하나의 신앙공동체인 교단 목회자와 성도, 교회와 총회라면 훨씬 광대하고 정교한 커뮤니티 구성이 가능할 것이다.

교단 관련 기사들을 따로 살펴보았다. 심층성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심층성의 예를 들기 위해 ‘제 99회 총회’를 보도하는 별도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 이 방은 총회 결정사항의 열람란에 가까워 보인다. 필자라면 총회의 논의들과 관련해 가장 손대보고 싶은 분야는 총회 예산에 대한 심층분석이다. 교단 내 전문가나 교단 내 세무사나 회계사를 동원하면 총회 예산이 제대로 짜여진 것인지 어렵지 않게 분석해 낼 수 있다. 허투루 쓰이는 예산이나 편중된 예산, 필요한데 사라져 버린 예산 등등을 찾아내고 방향도 제시해야 한다. 또 분야별 예산 투입 상황과 그 증감 내역을 인포그래픽을 활용해 독자에게 읽기 쉽고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독자들이 총회 예산의 심층 해부를 더 많이 읽을지 총회 예산의 대략적인 소개와 무사히 심의를 통과했다는 기사에 만족할지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SNS와 모바일도 일단 걸음을 떼어놓았으나 지속적인 전략구상과 투자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팔로우 숫자를 늘리는 방안부터 강구하고 공유와 도달율 문제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미 SNS는 콘텐츠를 전달하는 또 다른 플랫폼이 아니라 새로운 생태환경이다. 종이신문과 온라인 홈페이지가 SNS의 보조수단이 되고 있는 상황이니 간과하지 말자.

트렌드와 관련해 보강할 것은 그래픽과 일러스트, 카툰 등이다. 지면의 외양을 윤색하고 다양성을 더하기 위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총신대 입학경쟁률 기사라면 그래픽은 가장 적절한 도구이다. 제목부터 ‘입학경쟁률 높아졌다’는 것이니 적어도 3년 치 정도의 입학경쟁률이 한 눈에 보이도록 그래픽이 지원됐다면 내용 파악이 훨씬 쉬웠을 것인데 수치가 빼곡한 통계표로는 피곤했다.

오지랖 넓게 뒤적이다보니 수시로 온라인을 통해 읽는 사람들이 더 많은지 아니면 주간지를 받아 읽는 사람이 더 많은지, 그리고 편집은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는지가 궁금했다. 광고도 궁금해 살펴보니 온라인 홈페이지 내에는 배너 광고 등이 눈에 띄지 않고 있어 종이신문 위주의 경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궁금한 채로 해결 못한 내용은 기독신문의 독창적이고 독점적인 교단 내 사업에 대한 정보였다. 온라인상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교단지로서 교회, 신학대, 목회자, 평신도 등을 대상으로 한 사업 모델은 어떤 것이 개발돼 있을지 궁금했다. 그 배경에는 모든 언론에게 생존이 가장 절박해지고 있기에 그렇다.

교단 기부문화 조성 앞장서야

가능하다면 좋은 콘텐츠를 채워내는 올바른 언론, 특히 우리 교단지라는 정체성 분명한 신문에 대해 기부문화를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에는 기부 생존모델의 언론사가 많다. 좋은 기사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지역언론이기에 지역주민이 대가없이 지원하는 지역성에 기반한 기부가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CBS 등이 부분적으로는 그런 형태를 띄고 있지만 기독신문처럼 교단지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도네이션 모델로의 접근은 더 용이해 보인다. 문제는 기부를 불러 올 콘텐츠의 개발이다. 그리고 신문사에 대한 지원이 아닌 특정 기획보도에 대한 개별적인 펀딩도 이끌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러고 보니 기독신문의 주독자층이 궁금해진다. 교단지이니 아마 목회자들인 듯하다. 달리 생각하면 교단지라는 정체성은 울타리나 한계가 아니다. 교단지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교단의 벽을 넘나드는 게 필요하다. 타 교단 신학과의 비교, 타 교단 목회정책의 소개와 벤치마킹, 세계교회의 흐름과 한국교회의 수용 가능성, 한국사회 속에서의 기독교와 교단의 입지와 이미지 변화 등등. 교단지이기에 교단을 위해서 수행할 책무가 넒게 펼쳐져 있다고 여겨야 한다. 교단의 어느 기구도 교단지만큼 사회의 트렌드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타 교단, 교계 기관과 자유로이 접촉하며 담론을 펼쳐내지 못한다. 교단지는 그런 점에서 교단의 촉수이고 교단 내 커뮤니케이션의 허브로서 작동해야 한다. 물론 교단이 이를 허용하고 지원할 만큼 유연한지 않다면 지난하지만 설득해 나가야 할 일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