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남 목사(온천제일교회 원로)

▲ 기독신문은 50년동안 교단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왔다. 사진은 초창기 기독신문 직원과 총회본부 직원들이 함께 한 모습.

기독신문은 교단의 어제와 오늘, 내일의 얼굴이다
창간부터 지켜온 ‘사시’ 정신 잊지 않고 기쁜 복음 전하며 생명 살리는 사명 다해야


기독신문이 창간 50주년을 맞았다. 어느덧 반세기의 세월이 흘러 희년이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기독신문은 광의적으로 교단 역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협의적으로 후반기의 50년간 교단의 매사에 풍상과 애환을 함께 나누며 여기까지 왔다. 특히 기독신문이 창간된 시점과 그 후의 반세기는 통합측의 분립 후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교단을 일으켜 세우고 전국교회를 결집하여 한국기독교 제일교단의 위용을 갖추게 함에 총회와 총신과 기독신문이 삼위일체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기독신문이 교단과 함께 해온 과거 역사와 교단과 함께 나갈 미래방향에 대하여 소견을 개진코자 한다.

기독신문의 역사

먼저 기독신문이 창간되기까지 한국교회의 신문발행과 다음 기독신문이 발행되어 교단과 함께 해온 역사를 간추려 보자.

한국교회의 신문발간은 1897년 2월 2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라(H.G. Appenzeller) 편집의 주간 <조선그리스도인회보>와 동년 4월 1일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 편집의 <그리스도신문>이 그 효시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신문의 제호가 곧 기독신문이다. 이 그리스도 신문이 1905년에 장·감 연합신문으로 진전했고 1907년에는 <예수교신보>로 개제(改題)하였다. 이 때에 게일(J.S. Gale) 선교사가 언더우드에 뒤이어 편집을 책임졌고 길선주 목사는 이 신문을 통해 입신(入信)했다고 민경배 박사는 그가 쓴 <한국기독교회사> 각주에서 부연했다. 게일이 그리스도신문에 이어 편집을 맡은 <예수교신보>는 그리스도신문을 개제한 것일 뿐으로 그 시기는 대한국 독립노회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설립된 그 해이다. 그러다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된지 3년째인 1915년에는 <기독신보>(基督申報)로 제호를 바꾸어 기의남(W.G. Cram) 선교사가 편집책임을 맡았고 1937년까지 기독교서회에서 맡아 간행했다.

일제의 압박으로 제31회 총회를 끝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막을 내린 1942년, 그 혼란과 비극의 와중에 한국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의 연합기관지인 <기독교신문>을 발행했다.

그러다가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동면상태나 진배없던 한국교회가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팔선으로 막힌 북한교회를 제외한 채 남한만으로 1946년 6월 11일-14일에 서울 승동교회당에 모여 남부대회를 개최하였고 그 해에 기독교공보를 창간하였다. 기독공보 연혁에는 1946년 1월 17일 조선기독교 남부대회기관지 기독교공보 창간이라 하였고 김양선 목사가 지은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연표에는 1946년 7월 15일 기독공보 창간이라 하여 전자는 남부대회 전으로 후자는 남부대회 후로 표기하였다. 그 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나 공보 발행이 사정상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신으로 1951년, 부산 피난시절에 복간되었다고 추정한다. 이 일에 대하여 김린서 목사는 그가 장로시절인 1951년에 폐간한지 10년만에 ‘신앙생활’지를 속간하였고 또한 김현근 씨와 함께 기독공보를 간행하여 그 후 3년간 계속하여 오는 중 총회의 요구에 복종하여 총회기관지로 들여 놓았다고 증언했다(신앙생활지 1954년 7,8월호).

그러나 1959년 통합교단이 분립하였을 때 총신의 학술지인 신학지남은 본 교단이 가졌으나 교단의 기관지인 기독공보는 통합측이 가져갔다. 한국교회의 실정보다 본국총회의 입장 때문에 선교사들 전수가 친 WCC 입장에서 통합측에 동조한고로 본 교단과 총회는 물질적으로 적수공권이었다.

이렇게 통합측이 떠난 후 총회에서 가장 시급한게 신학교와 교단신문이었다. 그래도 신학교는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있고 서류와 기물들이 있으니 수업을 계속하기에 지장이 없었으나 교단신문의 경우, 그야말로 맨바닥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 12월에 고신측과 합동하게 되고 그때부터 1948년 12월 1일에 창간한 고신측의 <파숫군>지가 교단의 언로가 되었다. 한편 총회는 주간신문의 신규허가를 받는 일에 애로가 있어 고신측이 환원할 때 남은 발행인 안용준 목사에게서 파숫군을 인수하게 되었고 마침내 1965년부터 <기독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필자가 총회신학교를 졸업할 때엔(1964.12.10) 파숫군에서 취재하고 졸업식 기사를 썼다(파숫군168호, 1964.12.11).

기독신문이 처음 출범할 때 초대 이사장은 김윤찬 목사였고 사장은 김정국 장로였다. 초창기의 사장과 이사장의 경우 기독신문 운영을 위하여 장로는 개인의 재정기여로, 목사는 총회와 전국교회의 협조를 얻어 신문사를 꾸려가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헌신과 희생은 후대의 귀감이 되었다. 그럼에도 기독신문의 운영에는 우여곡절이 따랐다. 1972년 3월엔 시설미비로 폐간하였으나 동년 9월에 기독신보란 제호로 복간하였고 1997년 4월에 창간 때의 제호인 기독신문으로 환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교단의 교권이 크게 요동치고 뒤집힐 때엔 기독신문도 정론·직필과 곡학아세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어느 순간 중심을 잃고 격랑에 휩쓸리기도 했다.

50년전 기독신문을 처음 발행할 때에 정한 사시(社是)가 ‘첫째, 개혁신앙의 보수, 둘째, 교회의 단결, 셋째, 성도의 교제’ 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교단 분열후 선교사들의 이탈로 그들이 세운 학교, 병원, 복지시설 등 기관의 부재는 물론 선교부의 지원도 끊긴 채 맨주먹, 맨바닥에서 오직 자립신앙 일념으로 명실공히 한국 제일교단의 위용을 갖추게 된 그간의 성취엔, 열악한 실정임에도 교단과 일심동체가 되어 고락간에 멍에를 함께 멘 기독신문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다. 이 일은 기독신문이 교단의 신앙적 전통과 신학적 정체성에 맞게 개혁신앙을 굳게 지키고 전국교회를 하나로 결집하여 그 잠재력을 극대화하며 성도의 교제를 통한 유기체로서의 일체감 조성에 나팔수와 봉홧불의 역할을 하여 왔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기독신문의 방향
▲ 장차남 목사온천제일교회 원로


필자는 1981년에 목회자 수상을 4회 기고한 이래 그동안 기독신문에 많은 글을 써 왔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88년 10월에 기독신문 주필 한명수 목사와 ‘교단발전을 위해 대담’을 한 것과 1989년 4월엔 주필 한명수 목사의 사회로 총회총무 이봉학 목사, 전 총신대 학장 정성구 교수, 기독신문 사장 김인득 장로와 더불어 신문의 날에 즈음한 좌담을 한 일, 그리고 2006년 10월에 ‘총회장 장차남 목사에게 듣는다’의 대담을 가진 것이다.

특히 ‘신문의 날에 즈음한 좌담’에서는 보도의 방향에 대하여 ‘표면적 사건의 일방적 보도보다는 여과작용을 거쳐 기사가 일반 독자들에게 보탬이 되게 할 것과 복음선교적 측면에서 교단의 화합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했고 교단의 이해에 따라 사실을 은폐하거나 미화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그래서 안된다는 주필의 말에 동감이다. 지난해 충현교회 행정보류사건에 관한 보도가 다른 신문에는 대서특필된 반면 우리 신문에는 한 줄도 기사화되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일반 독자들이 기독신문을 바라보는 눈이 어떨 것인가 걱정이 되며 신문에 대한 신뢰도가 현격히 저하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신문은 사실 그대로 보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할 줄 안다’고 했다.

필자는 신문에 대하여 보도의 경우 속보성, 정확성, 공정성, 복음성이 중요하다고 여겨왔다. 신문이란 신속한 보도가 생명이다. 그래서 특종에 혈안이 되어 있다. 주간지는 신속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신문을 통해 시간대로 보도할 수 있어 주간신문의 한계를 만회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실보도에 충실해야 한다. 아무리 급해도 부실한 기사여서는 안된다. 신문의 영향만큼 공신력과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뿐만아니라 신문보도는 공평하고 정직해야 한다. 언론을 무기화하여 기호와 이해에 따라 편향성을 보이고 신문을 정치화 할 때 당파적이 되어 객관성을 결하게 된다. 그리고 복음성이 중요하며 특히 종교신문일 때 더욱 그렇다. 복음은 기쁜소식으로서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살리는 소식이요 결코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편성의 경우 인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보수집, 현장취재, 외신번역, 신앙교양, 방향제시, 독자통신 등을 통해 안목을 갖추되 세련되고 변화성있게 신문을 제작했으면 한다. 그러면서도 교단의 기관지로서 적정한계선을 지켜 책임성있게 편집하기를 요한다. 심지어 광고까지도 교단의 이미지에 합당한지 부당한지 헤아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사시를 잘 지키되 교조적 준수가 아니라 신앙적 준수가 되어야 한다. 먼저, 개혁신앙의 보수라 했다 하여 개혁신앙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형제를 정죄하고 심판하는데 이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 안된다. 오직 성경적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잘 믿자는 입장이어야 한다. 또한 교회의 단결 이라 하였으니 전국의 교회·노회·총회의 화합·단결을 위해 기독신문이 여론과 소통의 매체노릇을 해야 한다. 교단의 기관지로서 총회 임원과 본부만 일방적으로 대변할게 아니라 전국교회가 속한 노회들의 여론을 담아내어 쌍방향 소통이 되게 해야 교단의 진정한 단결과 민주적 운영이 가능한 법이다. 그다음 성도의 교제라 하였으니 외형과 조직만 거대할 뿐 체온과 활력과 생동감이 없는 교단이 되어서 안된다. 성령의 충만과 처음사랑을 그대로 가져 성도의 교제가 몸과 지체들처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공동체이면서 유기체인 교단의 모습이어야 한다. 여기에 기독신문의 역할과 사명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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