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영환 교수(총신대)

무너진 객관적 신념 “모든 것은 다르다”
 

 

20세기에 일어난 또 다른 변화는 ‘객관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19세기까지 사람들은 객관 혹은 확실성을 추구하였다. 구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객관에 대한 이 시대의 신념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그는 눈에 비치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화가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객관적 진실이었다. 그에게서 그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추상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확실성에 대한 19세기의 이러한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와 관련하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 가지 분명해진 게 있다. 즉, 객관성이니 대상에 대한 묘사 따위는 내 그림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오히려 내 작업에 해로울 뿐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이전의 조화가 사라지고 난 후에 오직 두 개의 가능성만 남았는데 그것은 초자연주의 아니면 극단적 추상주의다.”라는 말은 20세기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그림이 더 이상 사물의 재현을 목표로 삼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상당수의 화가들이 초자연주의와 추상주의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회화는 객관적인 대상의 재현이 아닌 화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되었다.

▲ 뭉크의 <절규>.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의 ‘절규(The Scream, 1895·그림)’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정신적인 동요가 우리의 감각적인 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배경은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각이 아닌 고통 혹은 두려움 속에서 절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묘사되었다.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장면들이 만화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늘과 바다 그리고 다리 이 모든 것들이 비명소리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
객관에 대한 신념이 무너졌다는 것은 곳 확실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대주의와 지적인 회의주의는 해체주의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이들은 세상에는 하나의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이 있다고 보았다.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 1926~2007)와 같은 이는 “텍스트는 결정된 의미가 없고, 그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 독자에게 의존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롤랑 바르테스(Roland Barthes, 1915-1980) 역시 텍스트의 다원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의미는 독자의 관점과 관계되어 지기 때문에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만큼 많아지게 된다. 이전의 텍스트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저자 혹은 텍스트의 세계였다.

그러나 해체주의에 와서는 저자와 텍스트는 해석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점차로 상실하게 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에 의하면 인식의 과정에 나타나는 것은 실재를 해석하는 해석자의 관점뿐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지식 혹은 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 역시 전통적인 진리에 대한 개념에 도전을 하였다. 그는 진리에 대한 추구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단지 해석에 만족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것은 다르다(All is different)”이다.

한때 한국사회에 유행했던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말도 이러한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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