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교의 시대(기독신문 지령 501~1000호)

교단선교 시대 개막 … 기공 42개월만에 총회회관 건립


1 선교의 시대

1957년 계화삼 선교사를 자유중국(현재의 대만)에 파송한 것이 교단 해외선교의 시초였다. 그로부터 32년의 시간이 흐른 1989년 2월 24일 강대흥 선교사를 태국에 파송하면서 총회는 100번째 선교사 파송이라는 지점에 도달한다.

제68회 총회에서 ‘1만교회 설립, 1백명 선교사 파송’을 꿈꾸었던 것(본지 제523호 1983년 10월 1일자)이 불과 6년 만에 절반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사역 중이던 이재환 선교사.

본지 제779호(1989년 3월 4일자)에서는 이 소식을 머리기사로 전하면서 ‘선교정책의 독자적 수립 요청’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각개격파식 혹은 다른 선교단체와 보조를 맞추는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적인 선교정책을 구상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펼쳐가라는 주문이었다.

이후로도 교단 선교사 파송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기독신문 1면에는 거의 매주 선교사 파송 소식이 단골 기사로 자리잡았다. 총회 파송 선교사가 100명에서 200명으로 배가되는 데는 불과 2년도 걸리지 않았다. 본지 제871호(1991년 2월 16일자)는 ‘현역선교사 2백명 돌파’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무렵에는 사역지도 다변화되어 전세계 46개국에 선교사가 파송되었으며(제870호 1991년 2월 9일자), 1992년 제77회 총회 이후부터 1년 사이에는 무려 94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기록을 남긴다.(제992호 1993년 9월 25일자) 당시 통계는 총63개국에 파송선교사 474명이었다. 바야흐로 선교의 시대였다.

규모가 커지며 선교시스템을 탄탄하게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국제SIM과 협력선교 협약-선교활동영역 더욱 확대’(제543호 1984년 3월 3일자) ‘선교 일원화 정책방안 모색’(제774호 1989년 1월 21일자) ‘서울세계선교대회 개막’(제850호 1990년 9월 8일자) ‘선교조직 개편 검토-해외선교위 단독기구 승격 방향’(제997호 1993년 11월 13일) 등의 기사들은 총회선교부가 오늘날의 총회세계선교회(GMS)로 전진하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2 개신교 선교 백주년

“본 장자교단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던 지난 날을 감사하면서 이제는 외국 선교단체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력함으로 선교의 빚을 갚기 위해 주는 교단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본지 제570호(1984년 9월 29일자) ‘선교백주년 기념예배 성대히 드려’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앞서 9월 20일 서현교회에서 열린 총회 주최 한국기독교선교백주년기념예배 당시 기념사업위원장의 인사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민족사와 기독교 100년 심포지엄.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태운 선박이 제물포에 상륙한 지 100년이 지났을 때,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특히 선교를 받아들이던 위치에서 선교를 하러가는 위치로 옮겨가려는 열정이 뜨겁게 불타올랐다(제594호 ‘단합된 교단저력 선교로 확산’).

이듬 해인 1985년 4월 13일 잠실체육관에서는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하는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고, 인천에서는 선교사들의 입국장면을 재현하는 퍼포먼스와 함께 선교백주년기념탑이 세워졌다(제596호). 교단 내부적으로도 선교 100주년을 계기로 전도의 에너지를 다시 끌어 모으고(제547호) 대규모 산상집회 등을 통해 영성을 새롭게 하는 노력이 계속됐다(제613호).
 
3 통일 염원 타오르다

▲ 1983년 임진각에서 열린 남북통일 염원 신년기도회.

선교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면서 한국교회의 시선은 자연히 또 하나의 ‘땅 끝’인 북한으로 향했다. 북한의 실정을 바로 알고, 선교와 통일의 방안도 모색해보자는 취지에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1989년 4월 23일 충현교회에서 개최한 남북통일과 북한선교세미나는 그 같은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제783호 11면 ‘통일지향 공동지향 모색’).

한편으로는 이 무렵 문익환 목사의 전격적인 방북으로 자극받은 보수교단 쪽이 통일이라는 이슈에서 뒤쳐질 수 없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선회한 부분도 작용했다(제784호 11면 ‘정부당국에 분명한 통일방안 제시 촉구-문 목사 방북규탄 공동성명’).

이후부터 ‘통일’과 ‘북한’은 본지 머리기사를 자주 장식하는 단어가 됐다. 그 해 가을 총회선교부가 민족복음화를 위해 상설 북한선교원을 설치한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 것(제804호)을 신호탄으로, 교단 내부 혹은 한국교회 연합으로 통일에 대한 논의와 북한교회 재건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4 총회회관 건립

▲ 1986년 건립 당시의 총회회관 모습.

1984년의 신년호인 제535호 1면은 한창 건축 중이던 총회회관의 외관 전경이 장식했다. 햇수로 3년째를 맞이한 총회회관 건축의 완공을 기원하고, 전국교회의 건립기금 모금을 독려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 소망은 그 해 9월 24일 낮12시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 세워진 총회회관 신축 건물에서 열린 입당식을 통해 일단 성취된다. 입당식에는 총회와 각 노회 임원 등 300여 명이 참석해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나누었다(제569, 570호). 이후 회관건립 기금의 모금이 부진해 준공검사가 계속해서 지연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고(제606호), 전국교회가 다시금 힘을 모은 결과 총회회관은 기공한 지 42개월 만에 완공의 기쁨을 알리게 됐다.

본지 제631호(1986년 1월 11일자)는 이 건물이 “전국 교우들의 눈물과 땀의 결정체”라면서 “앞으로 교단 발전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을 주문했다. 그 바람처럼 총회회관은 교단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서, 전국교회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는 센터로서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기능하고 있다.

5 정화총회

1989년 9월 17일 열린 제70회 총회에는 개막 전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개회를 사흘 앞두고 발행된 본지 제616호의 머리기사에 달린 ‘법 어긴 임의단체 조직 용납 못해’라는 제목이 당시의 살벌했던 분위기를 설명한다. 하지만 그 후 1주일 사이 모든 게 바뀌었다.

1인 중심 체제로부터의 탈피를 선언하며 제168호의 머리기사 제목은 ‘총회 새 도약대 구축’ ‘진정한 공화정치로 새 출발’이라는 환호의 분위기로 변해있었다. 이후 한 동안 본지의 헤드라인에는 ‘변혁’ ‘비리척결’이라는 글자가 자주 등장한다.
 
6 통일찬송가와 표준새번역성경


‘전국교회가 염원했던 찬송가 나왔다!’(제532호, 1983년 12월 17일자) ‘찬송가 339만 9000부 발행’(제569호, 1984년 9월 15일자 3면) ‘표준새번역 성경 출간-10년 작업 걸쳐’(제961호, 1993년 2월 6일자) ‘제78회 총회 표준새번역 사용 불가 결의’(제993호, 1993년 10월 2일자).

7 통일교와 시한부종말론 소동

‘통일교 대학인가 철회 서명운동’(제812호, 1989년 11월 11일자) ‘총회임원회 통일교 대책방안 강구’(제813호, 1989년 11월 18일자) ‘교단장래 위협하는 중대사건-이장림사건 책임자 보직해임 요청’(제881호, 1991년 5월 4일자) ‘제76회 총회 김기동 이장림 이단 규정’(제900호, 1991년 10월 5일자).

8 한기총 등장

▲ 한기총 출범 후 마련된 신임가맹 교단장 총무 초청 만찬회.

1990년대를 시작하는 본지의 첫 소식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제819호 1990년 1월 6일자) 33개 개신교단과 8개 연합기관의 결속으로 시작된 한기총은 출범과 동시에 사랑의 쌀 나눔운동을 비롯해 남북교류, 통일교 반대, 윤리운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의 자리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오랜 세월 교계 연합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총회는 앞서 1987년 결성된 한국개신교교단협의회 참여로 입장을 선회하더니, 한기총 발족단계에서는 더욱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행보를 보여준다. 제74회 총회에서 교단 차원의 한기총 가입을 결의하고(제807호), 1991년에는 목사장로기도회에서 금식운동을 통해 모은 헌금을 전액 한기총에 전달한(제884호) 이후로도 계속 밀월관계를 유지한다. 한기총이 우리 총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요즘과는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9 교단 시스템 정비

‘교단 사무행정 전산화 착수’(제764호, 1988년 10월 29일자) ‘교단 발전 위한 정책연구 활발’(제847호, 1990년 8월 11월호) ‘출판사업 직영으로 재원 확대’(제922호, 1992년 3월 28일자).
 
10 총회 대정부활동 강화

‘교회 타종규제 반대성명’(제516호, 1983년 8월 13일자) ‘주일 국가고시 시정 촉구’(제586호, 1985년 1월 26일자) ‘총회 단군전 건립 반대 성명서 발표’(제618호, 1985년 9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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