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석 목사(충정교회)

 
고난 후 욥은 갑절의 복을 받았다.(욥 42:12) ‘꿈꾸는 것 같은’ 이런 은혜가 2015년 새해에 조국 위에, 특별히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개인, 가정, 교회 위에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막연한 기대일까?

2015년은 조국광복 70주년의 해다. 국권을 침탈해 간 일본은 미국, 러시아 등 세계 열방들과 맞장을 뜨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리라곤 상상치 못했다. 그런 우리 앞에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그야말로 ‘꿈꾸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조국은 다시 허리가 잘린 채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험악한 세월’을 달려온 지 70년이 되었다.(창 47:9) 이 70년 속에 어떤 소망이 숨겨져 있는가?

성경에서 70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쓰이고 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들은 바벨론포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칠십년이 차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렘 25:12, 렘 29:10). 이 말씀대로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B.C 722),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고 만다.(B.C 586) 바벨론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끌려간 저들의 삶은 어떠했던가?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만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70년째 되던 해,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신 그 말씀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바벨론제국의 변방, 한 조그마한 성읍에 불과했던 바사의 리더(Leder) 고레스(Cyrus II, B.C 559-530)란 자가 이웃 메데를 흡수한 후 세력을 점점 키우더니 드디어 대제국 바벨론을 제압하고선 페르시아 제국을 건립한다. B.C 539년 1월28일이었다. 발굴된 고레스서판(The Cyrus Cylinder)에 의하면 그는 말둑(Malduk)신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이런 고레스 입을 통해 반포된 두 가지 칙령은 진정 의외였다. ‘유대포로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대하 36:22~23, 스1:1~4) 그래서 포로 5만 여명이 총 4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돌아온 저들이 세운 것이 그 유명한 ‘스룹바벨’성전이다.(스 5:2) 이 얼마나 꿈 같았을까? 그래서 저들은 뺨을 꼬집으며, 노래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 126:1) 그러므로 여기 70은 분명 유대민족을 향한 예언의 성취다. 70의 기적을 오늘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억지일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럴까?

역시 바벨론 포로였던 다니엘이 어느 날 예레미야서를 펼친다. 그때 그의 눈에 70이라는 숫자가 꽂혔다.(단 9:2) 그가 이 숫자에 담긴 의미를 깨닫기 위해 금식하고 죄를 회개하면서 주의 은총을 간구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70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단 9:21) 그것은 ‘이레’였다.(단 9:24~27) ‘이레’(Shabooah)는 ‘주(week)’ 또는 ‘해(year)’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해’로 쓰였다. 그러니까 70이레란 70년이다. 헌데 익숙한 70년 대신 굳이 일흔 이레라는 어휘로 갑자기 분위기 전환을 꾀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본문을 놓고 여러 견해들이 엇갈린다. 하지만 이레라는 이 단어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견해가 일치한다.(단 9:24, 26) 즉 이레는 메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장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순 두 이레(단 9:26)는 초림 예수와 한 이레(단 9:27)는 재림 예수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이 초림 하셨을 때, 병자들과 배고픈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계 211:1~8) 여기서 알 수 있는 이것이다. 70이 유대민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꿈꾸는 일’이 일어날 것을 시사하는 숫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찬송가 550장의 작사자 해스팅스(T. Hastings:1784-1872)는 시 126편을 배경으로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메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즉 선지자 예레미야 꿈꾸던 복을 온 세상 ‘만민이 다 같이 누린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일어났던 그 ‘꿈꾸는 듯한’ 일이 예수를 믿는 오늘 이 땅의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란 믿음, 이 확신을 갖는 것은 결코 억지가 아닌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꿈꾸는 일’이 일어난다. 어디에, 어떤 씨를 뿌려야 할까? ‘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 이 으뜸 되는 두 계명을 몸 된 교회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또한 뺨을 꼬집으며 ‘꿈꾸는 듯 같았도다’는 탄성을 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분,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갈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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