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마커스 설립, 강력한 기도와 훈련 바탕으로 한국교회 찬양예배·워십문화 이끌어
대표직 내려놓고 다음세대 사역 준비하며 창작 열정 이끌어내는 ‘네트워크 사역’ 집중


현재 한국 교회에서 찬양이나 문화사역을 담당하는 사역자 치고 마커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80년 중반, 최덕신의 <주찬양>과 두란노의 <경배와 찬양>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찬양문화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면, 지금은 마커스가 독보적인 존재로서 교회의 찬양을 선도하고 있다. 어노인팅과 디사이플스 또한 찬양문화의 한 획을 그으며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마커스에 비하면 다소 존재감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지금은 마커스가 대세다. 그런 마커스를 설립한 김준영 대표를 서울 충무로에서 만났다.

2003년 4월 26일, 김준영 대표는 샘물교회에서 6명의 단원들이 모여 마커스의 닻을 올린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설립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순탄대로가 열렸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망망한 대해를 항해하는 돛단배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너를 위해 새로운 일을 할 것이다.”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시작한 일이었다. 두려웠지만 묵묵히 순종했다. 그리고 마커스가 지금처럼 ‘큰 일’을 행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넉넉하게 생활해 본 적도 없고, 빚 없이 살아보지도 못했다. 경제적인 궁핍은 늘 꼬리표가 되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지만 누구를 원망을 해본 적도 없었다. 으레, 찬양이나 문화사역자라면 광야에 내던져진 하나님의 몸 된 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커스의 부르심이 있기까지 기독교계에서는 꽤 알아주는 괜찮은 곳에서 일했다. 한국컨티넨탈싱어즈 보컬로 데뷔하여 1998년과 1999년을 보냈다. 이어 칼라기획에서 CCM 가수의 앨범을 제작하고 공연을 뒷받침 하는 매니지먼트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천관웅 목사가 창단한 디사이플스의 총무로서 빌드업 하는데 쓰임을 받았다. 그러다가 두란노서원이 음반 사업을 시작하자 자리를 옮겨 경영과 관리를 배웠다. 이와 같은 다양한 이력이 그에게 튼실한 자양분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두란노에서 근무할 때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데 갑자기 문화사역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1996년에도 ‘네가 나의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또 다시 주님이 부르시자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내려놨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지 100일 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전한 백수의 생활을 선택했다. 무모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믿었다. 집안에 어려움이 닥쳐 전세금을 빼서 보태고, 거기다 비록 번듯하지 않았지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인천으로 터전도 옮겼다.

마커스를 설립하긴 했는데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기도하고 묵상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전부였다. 사역이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멤버 영입도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그럴수록 몇 되지 않았지만, 단원들을 독려하며 더 끈끈하게 기도하며 주님께 의지했다.

“언제든지 마커스의 영역이 확장되면 풀타임으로 사역할 것입니다. 사역의 가치가 돈보다 우선순위에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나갈 때 감사와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돈은 그 분이 알아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이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는 ‘없는 가운데에서도’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팀원들에게 늘 훈련시켰다. 음악적인 달란트는 두 번째였다. <둘로스 훈련학교>를 세워 사역자와 평신도 훈련코스를 개설하여 마커스 예배모임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런 훈련은 그가 여러 모양으로 쓰임을 받으면서 찬양사역자의 면면들을 보아 왔던 것이 기준이 되었다.

제대로 훈련을 받지도 않고 재능만 내세우는 친구들도 봤고, 대중 가수로 나가지 못해 CCM 가수라는 타이들을 걸고 우쭐대는 친구들도 봤다. ‘부르심’이라는 핑계를 대고 찬양사역자라고 호칭하는 자들이 못미더웠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도하며 훈련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준비하고, 또 준비하며 때를 기다렸다. 마커스 멤버들은 이렇게 강한 훈련을 50주씩 받았다. 사역의 기본이었다. 마커스 멤버들은 지금도 둘로스 훈련학교의 코스를 이수해야 하는데 만일 수료하지 못하면 탈락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지금은 훈련기간이 70주로 늘었다.

마커스를 설립하고 대학로 <쉴터> 출판사에서 기도모임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2005년 4월 설립 2주년을 맞아 원남교회에서 오픈 찬양예배를 드렸다. 지인 중심으로 매주 50여 명이 참석했다. 그러다가 8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200석 규모의 종로감리교회로 찬양예배 장소를 옮겼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다시 안동교회로 터전을 바꿔야 했다. 그럴 때마다 찬양예배 참석자들이 줄 것으로 생각됐는데 의외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안동교회에서는 라이브 워십 1집 앨범 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이수역 근처의 예광감리교회와 지구촌순복음교회를 거쳐 2008년부터 해오름교회에서 매주 목요찬양예배를 드리고 있다. 5명의 기도모임으로 출발한 마커스는 현재 매주 2000명이 넘게 참석하며, 지금처럼 방학기간에는 400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늘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다. 조만간 5000명, 7000명을 넘어서는 것 또한 시간문제다. 마커스는 더 이상 정착할 곳이 없어 예배모임 장소로 고민하는 떠돌이가 아니다.

“마커스는 현재 28명이 풀타임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집단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공동체를 지향하며 평생을 함께 한다는 신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멤버를 선발할 때도 이 점을 중요시 합니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김 대표는 재정 또한 동일하게 대우하고 동일하게 혜택을 부여하여 같은 멤버라 하더라도 특권의식을 갖지 않도록 교육하고 있다고 밝혔다. 거기다가 교회 후원을 받지 않는 것이 마커스의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후원을 받으면 후원자나 교회가 권리를 주장하면서 좌지우지 하려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부득불 후원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적은 재정이라도 저희가 사역하는 범위 안에서 충실하게 활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말, 그는 마커스의 대표를 전격 사임했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마커스가 흩어질 시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부흥은 더해지고 많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때가 되면 흩어져서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마커스가 열방 곳곳에 흩어져 다음 세대에 귀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11년 동안 마커스에서 있으면서 예배사역만 했지 솔직히 문화사역은 못했습니다. 현장에서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동참은 이끌어냈지만, 교육적인 이론 등을 통해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문화 영역은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네트워킹 사역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마커스를 네트워킹의 허브가 되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개교회 중심의 사역은 이미 이 시대에 힘을 잃었다며, 불필요한 시스템과 사역방향을 고수하지 않고 연합사업의 형태인 네트워크 사역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그래서 <예학당>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나의미래공작소>를 차려 문화콘텐츠와 예술을 창작하는 크리스천을 양성하는데 열정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11년 전, 초라하게 출발하여 이제 꽃을 피우려는데 마커스를 떠나는 이유를 다시 물었다.

“문화사역은 개인이 씨앗을 심고, 사회에서 꽃을 피워 다음 세대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역자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다음 세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 자유롭게 떠납니다.”

▲ 마커스 김준영 대표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찬양사역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김 대표는 지금까지 현장에서 젊은이와 동참하는 사역을 했지만, 이제는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문화사역에 힘쓸 생각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