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훈 목사(부산 초량교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게 하는 담대함의 근거,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대하 18:18)
 

 

성도의 모든 원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원리이자, 살아감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또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때 믿음으로 인해 생기는 친구가 바로 ‘담대함’입니다.

담대함은 내면의 견고함이나 내적인 강함을 뜻합니다. 간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내 영이 힘을 얻어 강하고 견고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고 외칩니다.(시31: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상과 풍파와 악한 영과 그 세력이 약해지길 원하기 전에, 우리들의 믿음과 영과 생각이 담대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삶에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담대함의 모델로 미가야를 소개하며 말씀드리려 합니다. 미가야는 선지자입니다. 그가 활동하였던 시기는 남쪽 유다왕 여호사밧과 북쪽 이스라엘왕 아합이 동맹하여 정치적인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던 시절이었습니다. 두 왕은 만나서 동맹과 연합의 결실을 위해 아람(길르앗 라못)을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9절을 보니 두 왕이 나란히 보좌에 앉아서 보란 듯이 그 위용과 힘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왕 앞에 차례대로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왕은 길르앗 라못을 치려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장면이 뻔합니다. 좋게 말하면 자문을 받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훌륭합니다. 좋습니다”라고 말하라는 과시요, 위협이었습니다.

어떻게 진행 되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모든 선지자들이 보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왕 앞에 찬양 일색이었습니다. “예스, 예스, 이기십니다, 잘 되실 겁니다”. 사실은 이 모든 예언은 가짜요, 허위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세상과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고 득을 볼 수 있을까하는 얄팍한 계산이 깔려있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선지자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참 힘들구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 다수(多數) 앞에서, 현실의 계산 앞에서, 정의롭지 못한 것 앞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 힘듭니다. 이것을 여러 선지자들이 보여줍니다.

장면이 바뀌고 두 왕은 그래도 궁금한지 미가야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람들은 현장의 정치 분위기를 알리고 미가야에게 부탁합니다. 어쩌면 위협이었습니다. 우리가 찬양했으니 너도, 우리가 ‘예스’ 했으니 너도, 우리가 이길 것이라 했으니 너도, 우리가 멋지다 했으니 너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들고 곤란한 상황을 만납니다. 하지만 미가야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가? 이게 믿음인가?”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미가야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 그대로 전하는데, “안 됩니다. 공격하시면 안 됩니다. 왕이 죽을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선지자들까지도 자기 살려고, 잘 보이려고, 득을 보려고 “예스, 예스, 됩니다, 됩니다” 하는 판에 “안 된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랍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이지만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담대함이 아니면 말하지 못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담대함의 이유입니다.

참 궁금한 것은 미가야의 이 담대함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사회심리학자 토리 히긴스는 “두려운 사람은 나무만 보지 전체 숲을 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두려운 사람은 지엽적인 것만 보고 두려워하고, 담대한 사람은 전체를 볼 수 있기에 담대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미가야가 보았던 그 전체 숲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18절). 미가야는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하늘의 만군이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군은 “모든 군대”를 뜻합니다. 천군과 해와 달과 별들 모두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거느리시는 만군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나라의 보좌에 앉은 두 명의 왕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미가야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왕이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섬뜩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평안함과 담대함의 이유가 됩니다. 이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미가야의 눈앞에는 힘과 권세를 가진 세상의 두 왕이 있습니다. 뭉쳐서 부르짖는 다수의 세력이 있습니다. 뺨을 맞는 고난과 모욕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는 순간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계략을 짜고 세상이 날뛰어도 결국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는 그분의 뜻대로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담대할 이유입니다.

사도요한은 외로움과 고통과 두려움 속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본 환상 속에 세상나라와 왕들이 권세로 교회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고, 죄가 창궐하고, 악이 이기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현실조차도 자기는 밧모섬에 유배를 와 있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오히려 담대하였습니다. 요한의 담대함의 극치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마라나타’였습니다.

사도요한의 이 담대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하나님이 장차 고난의 세월과 말세의 두려움을 환상에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면서 요한에게 맨 처음 보여준 장면이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계4:2).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인간과 세상과 죄악이 이기는 것 같지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담대함으로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었던 것입니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꾀 많은 토끼는 굴 세 개를 파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굴들을 파놓아야 안심이 되고 담대할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과 수많은 선지자들이 꾀 많은 토끼처럼 세상에 굴들을 파면서 안전을 도모하였지만, 미가야만은 세 개의 토끼굴 대신에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보좌에 앉으셔서 만군을 거느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담대하게 만들었고 세상을 이기게 만들었습니다.

 
결론

우리의 2015년도 미가야가 처한 현실과 같을 겁니다. 세상은 권력과 힘으로 두렵게 할 것이며, 거짓된 다수가 진실된 소수를 위협할 것이며, 거짓이 판을 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순간순간 느끼며 살게 될 겁니다. 그럼에도 미가야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그 담대함의 근거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통치는 참새 한 마리에까지 미칩니다. 우리는 참새들보다 귀하지 않습니까?(마10:31). 주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담대하게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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