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이 있으라" 암흑 같은 세상 속에도 빛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2000년 전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야를 향해 나아가던 소망의 빛, 자신의 궤도를 한 결 같이 지키며 먼 항해를 하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믿음의 빛, 늦은 밤 귀가 길을 걷는 지친 어깨들 위로 가만히 내려와 다독여주는 사랑의 빛. 주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 받은 우리네 삶도 새해에는 반짝이는 저 빛들처럼 누군가의 희망, 누군가의 신뢰, 누군가의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월문리 GMS 본부에서 촬영한 밤하늘 별들의 궤적). 사진=권남덕 기자 photo@kidok.com
 
 
여는 글

2015년 새해를 맞아 ‘빛’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모습, ‘빛’으로 세상을 비추어야 할 교회와 성도들의 사명을 떠올리며 본지 신년기획의 주제를 ‘빛’으로 정했습니다.

100년 전 이 땅을 찾아온 복음의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었는지 되돌아보고, 과학기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가난과 어둠을 밝히는 이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주님의 뜻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또한 세상을 지으시며 첫 번째 선물로 ‘빛’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지역사회에 복음의 등대 역할을 하며 한 세기를 지내온 교회들의 모습도 계속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마침 2015년은 UN이 정한 ‘세계 빛의 해’이며, 빛고을 광주에서는 전 세계 대학생들의 축제인 2015 국제유니버시아드 대회가 개최됩니다. 치열하고 바쁘게 흘러갈 한 해 동안도, 낮아지고 스러지는 자리를 마다 않고 ‘소금과 빛’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독자 여러분 곁에 기독신문도 작은 등불이 되어 함께 하겠습니다.


‘민족의 빛’ 한국교회, ‘생명의 불꽃’ 되얏으니

언더우드의 꿈 ‘조선기독교대학’ 문 열고 수많은 민족일꾼 양성
이화학당 심슨기념관 완공 … 항일 기독인 ‘자립단’ 조직, 독립운동
‘긔독신보’ 창간, 기독언론 토대 구축 … 미국인 선교사 첫 배구시합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5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지 5년째. 교회는 민족의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실의에 빠진 식민지의 백성들을 위로하며, 이 땅에 활기를 불어넣으려 했고, 애국신앙을 키운 젊은 기독인들은 독립 쟁취를 위한 행동에 나섭니다. 그 뜨거웠던 기록을 되새기며, 오늘의 한국교회가 되찾아야할 열정과 기백을 생각합니다.<편집자 주>
 
▲ 조선기독교대학 창립 당시 기념사진.

조선기독교대학 개교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의 꿈은 자신이 1886년 설립한 경신학교를 모태로 신학교와 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1901년 평양신학교 개교 이후, 그의 꿈은 대학 설립에 집중되었고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된다.

1915년 3월 서울YMCA 회관에서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개교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대학 설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조선기독교대학 설립에는 언더우드가 소속된 미국북장로교선교부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고, 재한 남·북감리교선교부와 캐나다장로교선교부 등도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힘을 보탰다.

설립 당시 학생 수는 60명에 교직원 수는 18명이었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초대 교장에,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원장을 지낸 에비슨 선교사가 부교장을 지냈다. 하지만 개교 직후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같은 해 공포된 일제의 사립학교 규칙으로 인해 재단법인 설립이라는 난제에 부딪쳤고, 학교 설립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병세가 악화되어 미국으로 귀국한 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위기는 각 선교부가 합작해 연합재단법인을 조직하고, 에비슨 선교사가 2대 교장에 취임하면서 극복해 나간다.

이후 계속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선기독교대학은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며, 훗날 연희전문학교 연희대학교 시절을 거쳐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자라났다. 또한 뒤이어 탄생한 수많은 한국 기독교대학들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현재 한국기독교학교연맹에 소속된 국내 소재 기독교대학의 숫자는 약 70개에 이르고, 연맹에 가입되지 않은 수효도 상당하다. 하지만 정작 최초의 기독교대학인 연세대학교는 개교 100년이 지난 현재, 정관 개정을 둘러싼 정체성 논란으로 한국교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다.


항일 기독인 비밀결사 자립단

1910년대의 개신교는 일제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선봉에 서있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의 다양한 독립운동 전개 방식 중에는 혁명을 염두에 둔 비밀결사까지 존재했으니, 대표적 사례가 1915년 8월 함경남도 단천에서 조직된 자립단(自立團)이었다.

자립단의 멤버들은 교사 농민 상인 등 다양했지만, 대부분 기독교인 청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경제 진흥과 청년교육 및 계몽에 목적을 두고, 구국교육 상업경영 동지모집 등 구체적인 활동계획을 세웠다.

네이버 기관단체 사전에서는 이들이 “광복청년연성소를 설치하고 대한독립군에서 배속시킨 교관의 지도하에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단장은 방주익, 부단장은 김성익, 총무는 박승혁이 각각 맡아 단원들을 이끌었으며, 각지에서 단원들을 모집해 입단금 1원과 월회비 20전씩을 적립하고 활동자금으로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의 날개는 미처 펼쳐보기도 전에 꺾이고 말았다. 결성된 지 8개월만인 1916년 3월, 이들의 존재가 일본 경찰에 발각된 것이다. 단천헌병대에 체포된 19명의 단원들은 함흥지방법원에서 각각 6개월~1년 반씩의 형 선고를 받고, 자립단은 해산되고 만다. 안타까운 미완의 꿈이었다.


 

▲ 이화학당 심슨기념관.

이화학당 심슨기념관 건립

이화여고의 전신인 이화학당은 대한제국 시절인 1886년에 미국 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이 서울 중구 정동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 기관이다. 당시만 해도 여성교육을 기피하던 사회적 경향 때문에 초창기에는 학생 모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점점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처음 사용했던 한옥 건물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1899년에는 메인(Main) 홀과 프라이(Frey) 홀 등 양옥 건물을 신축했지만, 이것으로도 교실난이 계속되자 1914년 정동 30번지 땅을 구입하고 교사를 다시 신축했다.

이듬해인 1915년 완공된 새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 당시로서는 제법 큰 건물이었다. 비용은 미국 컬럼비아의 홀부룩이라는 인물이 희사한 기금으로 충당했는데, 당초 이 기금은 홀부룩의 여동생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나면서 위탁한 것이었다. 그래서 새 건물 이름은 심슨기념관으로 명명됐다.

앞서 지은 메인 홀과 프라이 홀이 각각 전쟁과 화재로 파괴되어, 심슨기념관은 이화여고 캠퍼스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 되었다. 심슨기념관도 6·25 당시 건물 동편이 불에 타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1961년 복원과 증축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관을 붉은 벽돌로 꾸미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갖추는 등 서양건축양식을 도입한 초창기 학교 건물이라는 점에서 심슨기념관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2월 2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중학교 교사로 사용되던 심슨기념관에는 현재 이화박물관이 들어서 있어, 학교의 변천사와 초창기 학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 및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 기독신보.

기독신보의 창간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신문은 1897년 2월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창간한 주간지 ‘조선그리스도인회보’였다. 두 달 후인 4월에는 장로교 언더우드선교사가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해 쌍벽을 이루며, 이 땅의 기독언론을 위한 토대를 구축해갔다.

이후 수많은 변천과정을 거친 후, 두 신문은 1915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 창간한 ‘기독신보(基督申報)’로 만나게 된다. 최초의 명칭은 ‘긔독신보(The Christian Messenger)’였으며,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가 발행권을 가졌다.

또한 선교사 크램(W. G. Cram)과 케이블(E. M. Cable) 그리고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최초 한국인 총회장이었던 김필수 목사가 편집진을 이루었고, 찬송가 판매 수익금과 후원금으로 발간비용을 충당했다.

기독신보에는 단순히 교회 소식만 게재된 것이 아니었다. 비기독교인 독자들까지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와 국제 뉴스를 알리며, 외세 침략에 대한 경계심을 고취하고, 남녀평등을 주창하는 등 사회 흐름을 선도하는 매체 역할도 했다.

삼일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는 항일논조를 전개한다는 이유로 네 차례나 압수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고,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편집장 박동완 목사는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기독신보는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하며 1937년까지 계속 발행되어 가장 수명이 길었던 교회신문으로서 기록을 남겼고, 오늘날 활동하는 수많은 초교파 기독언론들의 원조로서 인정받는다.

▲ 배구 도입 초창기의 경기 모습.

배구의 시작

겨울 인기스포츠로 각광 받는 종목 중 하나인 배구는 언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배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15년의 일이다. 당시 성서공회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선교사 베이커가 입수한 배구 규칙서를 이원용이 번역해, 동료들과 함께 코트를 만들고 12인제 경기를 한 것이 이 땅에서 벌어진 첫 배구시합이었다.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기독교청년회(YMCA) 체육지도자로 활동하던 윌리엄 G. 모건이 배구를 고안한 것이 1895년의 일이니, 배구 탄생 20년 만에 우리 땅에 상륙한 것이다. 송강호 김혜수 주연의 ‘YMCA야구단’이라는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근대화시기에 YMCA는 수많은 서양스포츠를 한국 땅에 소개하고 보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배구도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공식 배구경기도 1916년 조선중앙YMCA와 선교병원인 세브란스병원 직원들 간의 시합이었다고 전해진다. 그해 3월에는 YMCA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배구지도를 시작했고, 이듬해인 1917년 3월 30일에는 YMCA회관에서 한국인과 서양인간 경기가 열린 기록도 있다.

이후 배구는 점차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고, 특히 1990년대 무려 92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남기며 매 경기 ‘기도하는 배구팀’의 모습을 보여준 김철용 감독의 ‘호남정유 배구단’(현 GS칼텍스배구단)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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