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인공학자 ‘나눔과기술’ 대표 장수영 교수

▲ 유엔환경계획 한국위원회가 개최한 ‘2014 에코다이나믹스 원정대 적정기술 세미나’에서 장수영 교수가 적정기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희망의 빛’ 밝히는 성경적 과학기술 실천하다

세계 소외된 이웃에 꼭 필요한 과학기술 혜택 보급·지원
“기술은 모두의 것” 믿음 속 성경적 가치 나눔·섬김 앞장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14~15)

‘과학기술’이라는 빛을 필요한 곳에 가장 적절한 형태로 제공하기 위해 늘 고민하는 기독인 공학자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장수영 교수이다. 장수영 교수(포항공과대학교 산업공학과, 나눔과기술 대표)는 돈이 없어서 필요한 과학기술을 구매할 수 없는, 즉 과학기술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적정기술’ 연구와 보급에 뛰어든 공학자이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쉽게 말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과학기술’이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불행히도 과학기술은 공짜가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과학기술은 오직 돈을 지불하는 이에게만 제공된다. 생존을 위해 과학기술의 도움이 꼭 필요한 많은 이들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정작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과학기술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장 교수는 그러한 과학기술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타락했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누리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과학기술 또한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선한 일이지만,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돈이 되지 않는다. 돈을 지불할 능력이 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과학기술. 가난해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에게도 쉬운 과학기술.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말 그대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장수영 교수가 적정기술에 뛰어든 이유는 하나다. 예수님께서 교인들에게 ‘과부와 고아의 이웃이 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공학자인 그에게 과부와 고아는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다.

그가 처음 적정기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기독인 과학자들과의 모임에서였다. 2005년 10월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27명의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크리스천과학기술인포럼’이라는 모임이 생겼다. 이 모임은 과학기술 문화 속에 성경적 가치를 심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전문분야를 활용해 봉사와 섬김의 길을 나누고자 하는 기독 과학기술인들의 네트워크다. ‘과학기술 활동에 어떻게 하면 성경적 가치를 담을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 필리핀의 사회적 기업 마이쉘터재단(My Shelter Foundation)이 버려진 페트병을 활용한 햇빛 페트병 전구를 보급해 빈민가의 어두움을 밝히고 있다.(사진=www.facebook.com/aliteroflight)

모임이 시작되고 몇 년 후 이들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캄보디아 선교지에 태양열을 이용한 발전 시스템을 만들어준 후 주변으로부터 “그것이 바로 적정기술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렇게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과학기술’이라는 적정기술의 개념을 접하게 됐다. 구매력이 있는 이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과학기술의 온갖 폐해를 알고 있던 기독인 과학자들은 적정기술이야말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들은 적정기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해 2009년 12월 사단법인 ‘나눔과기술’을 설립했다.

나눔과기술의 설립 목적은 간단하다. ‘나눔과 섬김의 확산’이다. 과학기술의 전문성을 활용해 세계 곳곳의 어려운 이웃에게 필요한 적정기술을 보급하고 지원하며, 나아가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나눔의 정신이 담긴 과학기술 문화를 확산하는 것이다. 나눔과기술의 대표로 섬기고 있는 장 교수는 “과학기술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즉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존재해야 한다”며 “과학기술을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바로 적정기술”이라고 말한다.

좋은 아이디어와 목적에 사용되는 과학기술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이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몇 킬로미터씩 걸어가서 물을 날라야 하는 아프리카 지역에 어린아이도 빠르고 쉽게 굴릴 수 있도록 만든 도넛 모양 물통, 전기 없이 낮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항아리 냉장고, 물을 쉽게 끌어올릴 수 있게 제작된 펌프,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는 1인용 정수 장치, 낮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을 위해 빈 페트병으로 만든 태양광 전구, 태양전지와 LED를 이용해 만든 랜턴 등을 제작해 준 일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모든 적정기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과학기술이 사용하는 이들에게 철저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적정기술은 단순히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기술을 무작정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이 사용될 특정 공동체의 문화적 사회적 환경적 조건과 맞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생산과 소비가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 질문들을 생각해보자. 과학기술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주기는 했는데, 막상 그들에게는 그 과학기술이 어려워서 활용하지 못한다면? 보급한 과학기술이 그 지역 환경에 맞지 않는다면? 기계가 고장이 났을 때 현지에서 수리를 할 수 없다면? 가난한 이들이 과학기술을 활용해 밥벌이를 하기 어렵다면? 결과는 뻔하다. 그 기술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사실 나눔과기술도 그간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2010년 아프리카 차드 특허청의 요청으로 사탕수수대를 재활용해 숯을 가공하는 기계를 제작했을 때의 일이다. 처음에는 사탕수수대로 숯을 만들기 위해 사탕수수대를 죽처럼 끓여서 숯 모양 틀에 넣어 압축하는 기계를 만들어 보급했다. 문제는 그 기계를 만드는 기술 자체가 현지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는 최첨단 기술이라는 점이었다. 숯의 모양을 잡는 틀을 한국에서는 흔하디흔하고, 그래서 저렴한 ‘레이저 커팅’을 사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에 레이저 커팅을 하는 곳은 드물었고, 있다 해도 지나치게 비쌌다. 결국 현지인들은 긴 봉에 사탕수수대 반죽을 채워 넣어 칼로 써는 방식을 자체적으로 고안해냈다.

▲ 나눔과기술이 아프리카 차드의 연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한 숯탄제조기 사용법을 주민에게 설명하고 있다.(사진제공=나눔과기술)


장 교수는 그것이야말로 기술의 마땅한 위치라고 말한다. “기술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정기술은 필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사용하고 변형하기 쉬운 과학기술이어야 한다. 과학기술을 전해준 후, 그것을 현장에 남기고 떠날 때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적정기술이 해당지역에 ‘비즈니스’를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특정 지역과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기술을 보급해서 그들이 스스로 가난을 타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적정기술의 역할인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세상을 떠나 승천하셨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전히 기독인들의 삶에 길잡이가 되어 매 순간 예수님 말씀에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인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장 교수는 적정기술과 관련한 희망의 빛을 곳곳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를 가장 감격시키는 빛은 ‘미래의 과학자’들이다. 적정기술이라는 말을 어려워하고 관심이 없을 줄 알았던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적정기술을 접한 후 “적정기술을 통해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감사를 전할 때의 감격은 늘 새롭다. 그 아이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갈지를 생각하면 늘 가슴이 뛴다. 특히 적정기술 강연을 다니면서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강연이 끝난 후 “교수님, 교회 다니시죠?”라고 물어올 때, 장 교수는 성경 속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는 빛’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섬길 때, 스스로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그 선한 행위로 주위를 밝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빛의 참된 의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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