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인터뷰] 김대훈 목사(초량교회)

▲ ‘색시’라는 별명을 가진 김대훈 목사는 별명답게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 부분에서는 직설화법으로 일침을 가한다. 한강 이남의 최초 교회로서 종갓집 교회 목회자다운 교회를 향한 애정과 열정을 가진 목회자다.

지켜야 할 전통이 ‘신앙 본질인가, 신앙 습관인가’ 먼저 살펴야
이벤트 장사하는 교회 아닌 진정성 있게 전통 세우는 교회돼야
세상이 할 수 없는 ‘십자가’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교회에 온다



2015년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첫 목회자 인터뷰의 대상자 선정에 고민이 컸습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고, 고민한 끝에 부산의 초량교회를 시무하고 계시는 김대훈 목사님으로 정했습니다.

초량교회는 한강 이남 최초로 세워진 124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입니다. 신앙절개와 나라사랑, 구국운동의 산실로, 한국교회사에 빼놓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이러한 각설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교회가 있겠습니까만 역사적 의미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교회의 담임목회자는 그 교회의 목회 사명뿐 아니라 교회가 갖는 역사성과 그 의미마저 운명처럼 안고 살아가야하는 '또 하나'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새해 첫 신문에 초량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목회자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김대훈 목사님은 초량교회가 갖고 있는 믿음의 유산을 자랑으로 여김과 동시에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은 교회로 세워도록 날마다 긴장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인터뷰이로 손색이 없습니다.

 
▲ 김대훈 목사
김대훈 목사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종갓집 맏며느리 같다는 느낌을 받을 겁니다. 나긋한 목소리부터, 걸음걸이마저 다소곳합니다. 누구든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함과 배려심 또한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무언가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까? 아주 오래된 한강 이남의 종갓집 같은 교회에서 담임하는 맏며느리 같은 목회자 말입니다.

새해를 맞았습니다. 너도나도 희망을 꿈꾸며 행복을 기원해보지만, 새로운 달력의 첫 장을 내걸을 뿐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교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팎으로 큰 시련을 거듭해온 한국 교회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겨지지 않고 훼파된 이스라엘의 성전과 성벽처럼 느껴집니다. 새해가 되었지만 이를 재건하기 위한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같은 인물도 나타나지 않고, 회개와 재건 운동도 일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한강 이남 최초의 종가(宗家)와 같은 교회를 담임하는 김대훈 목사님과 함께 성경적 교회 회복의 핵심과 이를 위한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그려보는 기회를 함께 가져보기를 원합니다.
 
▲부교역자 시절까지 포함해 초량교회에 오래 시무했다. 초량교회와의 여정은.

=부교역자 기간을 합해 20년이 되었다. 위임목사가 된지는 벌써 17년이나 됐다. 부임 당시 청년부, 교구, 중등부 등등 여러 부서를 동시에 맡았다. 지금도 주일이면 파김치가 되었던 그 때의 기억나곤 한다. 하루에 아이들, 청년들, 어른들에 맞춘 설교를 계속 해야 했으니... 참 꿈같은 세월이었다. 초조함과 악몽과 같은 꿈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름다운 꿈이었다. 요즘에야 사역이 세분화되고, 부교역자들의 자기주장과 권리가 많아졌지만, 그때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했다. 그러다 담임으로 청빙을 받았다. 제일 미안한게 있었다. 함께 사역했던 동료 부목사님들한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크다. 안에 함께 있다가 혼자만 간택되듯이 되어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
 
▲지금이야 원천적으로 금지돼 있다고는 하지만, 부교역자가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 선정 받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도 보편적인 방법으로 담임목사로 청빙받기가 어렵지만, 당시 부교역자가 담임으로 선택되는 것은 말처럼 쉽거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기에 크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요, 성도들이 콩깍지에 씌인 것이다. 그 콩깍지는 사랑의 콩깍지라 생각한다. 청빙 당시에 허물 많은 저를 돋보기로 세세히 보지 않고, 사랑으로 봐주셨기 때문에 선택한 것 같다. 그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져 실망할까봐, 저를 쳐다보는 눈이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때의 부담감이 지금도 있으니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부교역자 시절 어떤 탁월함을 보여준 것으로 이해되는데.

=당시 담임 청빙에 지원한 후보자들이 많았다. 부목사로서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잘 안다. 초량교회 이름에 걸맞은 분을 찾으려 온 교회가 많은 노력을 했고, 부결되는 것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다른 사람이 없나 찾던 중에 나를 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마지막 포도원 일꾼이었는데, 성도들이 그 마지막 품꾼을 쓴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내세울 만한 스펙이 없다. 내가 나를 더 잘 안다. 은혜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성도들한테도 이 부분에 대해 100번 넘게 이야기한 것 같다. 은혜를 맛본 사람이 은혜를 맛깔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고, 이 자리 자체가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은혜 자체와 그 은혜를 입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힘주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시 초량교회에 내로라하는 장로님들이 교계에 활동하고 있었고, 교회가 지닌 상징성과 영향력이 있었기에 쉽지 않은 청빙과정이 진행됐다. 당시 나는 수영로교회 부목사로 갈 준비가 다 돼 있었다. 두 주간 사이에 나를 두고 초량교회 담임으로 투표해 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설마 되겠나 싶었는데 덜컥 된 것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외에는 없다. 그러기에 어떤 무게도 은혜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경험하고 누리며 살고 있다. 주님 은혜로 초량교회를 떠날 때까지 그렇게 살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인간적인 질문을 해 보자. 목사님의 장단점과 트라우마와 같은 것이 있다면.

=예전 별명이 ‘색시’였다. 나의 장점도 인간이고, 단점도 인간이다. 내 속이 어떻든 간에 사람을 따뜻하게 한다. 반대로 사람을 참 무서워한다.

모든 사람에게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크다. 나로 하여금 권위가 아니라 따뜻함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렇다.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이를 악물고 나를 통해 예수님을 바라볼 때 권위의 예수가 아니라 따뜻한 예수이기를 바랐다.

반대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저기 있는 산을 곡괭이로 파서 옮기라면 하겠는데, 사람을 만나고 대하라면 그것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어떨 때는 빙하도 녹일 만큼 따뜻하다가도, 어떨 때는 차갑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훈련돼 저울추가 좋게 바뀌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과거 가난한 집 맏이로 태어나다보니 부모님한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철이 들고부터는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했기에 중증이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 외할아버지께서 가족을 두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가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거절과 두려움 속에 있다가 결혼해 나를 나았다. 남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소아적 생각이 무의식 속에 굉장히 많다.

나도 모르게 남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제일 두렵다. 그래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단점도 쓰셨다. 그 트라우마까지도 은혜로 쓰셔서 하나님 앞에 잘해야겠다는 것으로 승화돼 감사하다. 허튼 목회자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초량교회 성도들이 나를 거절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 교회를 위해 내 발로 나가는 것은 괜찮지만, 성도들이 거부하면 견디기 힘들 것 같다.

사람이 참 좋고, 사람이 참 부담스럽고 두렵다. 이런 인간을 쓰신다는게 주님의 은혜 아닐까?(웃음) 이것 역시 우리 성도들과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 김대훈을 알아야 성도들이 목회와 설교를 이해할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 이야기로 가보자. 초량교회를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초량교회는 올해로 124년 역사다. 1892년 미 북장로교 윌리엄 베어드(배위량) 선교사가 설립했다. 초기에는 정식 교회가 아니라 한글서당으로 시작됐다. 서당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것이 발전해 교회가 됐다. 초량교회는 순교와 나라사랑으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다. 초량교회 3대 목사가 주기철 목사님이셨다. 주 목사님께서는 목사안수 후 첫 담임 목회지가 초량교회였고, 5년간 시무하셨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옥고 치르신 분들이 많았다. 그 대명사가 한상동 목사님이셨다. 또한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댄 회사가 ‘백산상회’였다. 백산상회 재정부장 맡은 사람이 윤현태 형제로, 초량교회 안수집사셨다. 일제 때 구국의 전초기지였다. 이후 6.25전쟁 때는 구국기도회의 본산이었다. 초량교회 역사 자체가 민족의 질곡을 두 눈을 뜨고 보아왔고, 두 발을 담갔던 교회다. 그런 의미에서 초량교회가 귀하고 아름답다.

초량교회는 ‘한강 이남의 어머니교회’라는 별칭이 있다. 자식들은 달라고 보채지만, 어머니는 주려고 한다. 엄마는 화려하지 않고, 묵묵히 아침밥을 차리고, 식구들이 다 먹을 후에 식사하셨다. 가족을 부양하는 어머니 모습이 초량교회와 닮았다. 자식이 잘 되고 출세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엄마다. 모판처럼 그 역할을 하며 한국 교회가 잘 되고, 부흥의 연기 날 때 기쁨이고 감사다. 그럼에도 초량교회가 지금까지 노화되지 않고 건강하게 밥 지으러 부엌에 들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어 감사하다. 기꺼이 민족과 나라와 지역사회를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교회라는 자체가 감사지 않는가? 이것은 스스로 하는 위안이 아니다. 자식들 굴뚝에 밥 짓는 연기 나는 것이 기쁘고, 여전히 어머니로서 허리가 꼬부라지지 않고, 아프지 않고, 함께 걸어갈 수 있기에 감사하다.

초량교회는 핵심가치 다섯 가지가 있다. ‘예배와 찬양’, ‘생명구원’, ‘순모임’, ‘다음세대’, ‘이웃사랑’에 온 힘을 다하는 교회다. 예를 들어, 지난 123년간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렸겠는가? 하지만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예배가 생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예하자는 의미에서 예배를 핵심가치로 삼은 것이다. 영혼구원도, 다음세대를 살리는 일에도 그렇게 하자는 의미다. 핵심가치 하나하나가 오랜 역사를 가진 초량교회로서 큰 의미와 역사성을 지닌다. 핵심가치의 마지막은 “온 힘을 다한다.”는 동사가 뒤따른다.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다.
 
▲말 그대로 상징성이 있는 교회에서 목회한다는 점에서 긍지와 동시에 무게감이 있을 것 같다.

=20년이나 됐으니 이제 익숙하겠다고 말하는 분도 계시지만 초량교회라는 상징성이 주는 목회의 무게감, 솔직히 200년 지나도 김대훈에게는 이 무게감을 벗기지 못할 것이다. 은퇴할 때까지 중압감이 클 것이다. 아니 나의 후임자가 잘 해야 된다는 마음이 있을 것 같아, 눈 감을 때까지 그 무거운 무게감을 가질 것 같다.

반대로 어쩌면 이런 중압감이 있었기에 나 스스로 책이라도 한 자 더 보고, 더 엎드리게 된다. 어느 교회든 목회의 중압감에서 해방되면 목회자로서 끝이라 생각한다. 여유부리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초량교회에 대한 긍지가 크지만, 중압감과 무게감, 거룩한 부담감은 더더욱 크다. 하루하루가 부담감 때문에 탈선하지 않고 긴장하게 된다.
 
▲담임목회자들이 고민하는 부분 중 하나가 ‘전통’이다. 전통은 그 교회만의 역사요 문화인 동시에, 변화와 열정에 장벽이 되는 상충되는 부분이 적잖다고 한다. 실제 그런가? 경험적으로 이야기해 달라.

=대개 보면 성도들이 말하는 전통은 신앙의 줄기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려온 습관이다. 그러므로 지키라고 하는 전통이 과연 신앙 본질인가? 아니면 신앙습관인가? 이걸 잘 살펴야 한다. 전통 수구가 성경에서 말하는 전통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100년 이상의 굳은살과 같은 익숙해진 관습이었다. 관습대로 안하고, 덜 익숙한 방법으로 이끌어 가기에 전통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 하나가 있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다. 전통은 반드시 뜯어 부수는, 마치 새마을운동을 하듯 없애야 할 초가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초량교회는 전통이 바뀐 것이 아니라 방식이 바뀐 것이다. 목회자 입장에서 전통을 철거대상의 구조물로 보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큰 오산이다. 잘못된 구습의 전통은 철거해야겠지만, 지켜야 될 전통은 아름답게 세워가야 한다.

지역의 유서 깊은 교회를 보면 과거의 것을 없애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로 인해 힘들어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무조건 과거와 전통을 부정하면 그동안 그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은 허탈감과 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가 필요하다. 부족함이 물론 있겠지만 무작정 재개발 형식의 과거부정이나, 뒤엎는 목회는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초량교회에서 버렸던 관습, 지켰던 아름다운 전통은 무엇인가.

=글쎄. 굳이 말한다면 역사가 깊은 교회가 갖는 보편적인 요소가 바로 ‘타성’이다. 타성은 좋게 말하면 앞으로 가려는 탄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형식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량교회가 잘했던 것이 형식을 버린 것이다. ‘온 힘을 다한다’는 다섯 가지 핵심가치를 둔 이유는 타성에 젖은 예배와 섬김, 교제 등이 진정성 있게 바뀐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부분, 다시 말해 예배, 구제, 기도, 시스템, 조직 등등 이런 것들도 전통적인 정신을 지키되 개선해 왔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1년, 2년 하다가마는 단기적인 이벤트하는 장사하는 교회가 아니라, 진정성 있게 전통을 지키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정신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

우리 교회는 아직까지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다. 기도회는 명절을 막론하고 금요기도회를 이어왔다.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는 없어도 일제 강점기부터 기도해왔던 교회다. 바쁘지만 더 기도하며 기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도 무수한 기도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오랜 전통과 역사적 자부심을 지닌 교회에 젊은 나이에 담임 목회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가장 어려웠던 목회적 장벽은 없었나.

=개인적으로 두 가지가 생각난다. 먼저 조급증이었다. 빨리 무엇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두 번째는 역사가 오래 된 만큼 무엇을 시행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분노가 컸다. 이러한 조급증과 분노가 젊은 시절 많았다. 보통 1개월 걸릴 일이 1년이 걸릴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다른 것이 장벽이 아니었다. 목회현장에 장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장벽이었다. 이것을 뛰어 넘는다면 모든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목회자가 바뀌면 현장이 바뀐다는 것을 20년 지난 지금에서야 이해하게 된다. 조급증과 분노는 어쩌면 목회자 개인의 장벽이다.
 
▲그 장벽을 어떻게 뛰어 넘으셨나.

=역사가 있는 교회는 ‘강태공’ 자세가 필요하다. 한참 기다리다보면 잉어 입질이 온다. 그때까지 힘들더라도 쳐다보는 인내와 참음이 필요하다. 얕은 입질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인내하고 오래 참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성도들이 알아준다.

덧붙인다면 역사가 오랜 교회일수록 성도들 속마음을 제대로 안 드러낸다. 그러므로 스스로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주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다 풀어진다. ‘목회’부터 하려하니 부딪힌다. 프로그램부터 들이미는 것을 버려야 한다. 낚시꾼 이상의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으면 한다.

 
 
▲상징성과 대표성이 있는 교회에 시무하기에, 화제를 돌려 한국 교회 이야기를 해보자. 평소 초량교회와 목사님께서 한국 교회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있나.

=우리 교회가 나라와 교회를 위해 기도 많이 한다. 가장 대표적인 기도가 한국 교회의 지도자에게 거룩한 회개의 영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잘못은 지도자의 죄가 크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기도제목은 한국 교회 강단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의 강단이 되도록 기도한다. 강단이 목사 개인의 토크쇼와 이벤트를 하는 장소가 아니라 온전한 복음과 말씀이 선포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구국적 차원의 기도를 하고 있다. 이처럼 두루뭉술하게 한국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기도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안팎으로 근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분명 원인이 있을 터인데, 개인적 견해는.

=아프지만 지도자의 잘못이라 본다.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설교한다. 짠 맛을 내는 소금이 그 역할을 잃어버리면 버려져 밟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짠 맛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짠 맛은 세상과 차별화된 탁월함이라 생각한다. 세상이 반찬이라면, 소금은 반찬이 될 것이 아니라 짠 맛만 주면 된다. 규모의 탁월함, 세련미의 탁월성이 아니라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는 차별화된 탁월성을 가져야 한다.

목회 역시 그렇다. 교회답게 목회해야 한다.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목회를 해서는 안 된다. 목사님도 목사님 같으면 좋겠다. 장로님보다 더 달라야 한다. 목사는 ‘목사소금’을 가져야 한다. 소금의 짠 맛은 차별성의 맛이다. 목사다운 목사 맛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 나 역시 포함된다.
 
▲얼마 전 설교에서 회개는 반성이 아니라 돌이키는 것이라 하셨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부분이 있다면.

=결국 본질의 문제다. 돌이킴 보다는 본질을 찾으면 돌이킬 필요가 없다. 의사는 암환자에게 잠시의 고통을 덜어줄 약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 병에 맞는 약을 갖고 처방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보면 표피적인 처방만 하고 있다.

회개에는 항목이 있지만, 회개를 뒤집으면 본질이다. 하나님 사랑, 은혜, 십자가다. 바울이 십자가 말고 자랑할 게 없어 모든 것을 똥으로 여기고 버렸다. 할례를 받고, 베냐민지파며, 가말리엘의 문하생 등 모든 스펙을 버리고 십자가만 남겨뒀다.

그런데 우리는 아닌 것 같다. 바울이 남겨둔 십자가는 오간데 없고, 바울이 버린 것만 들고 자랑하고 있다.

고상한 것은 세상에 다 있다. 행복론, 웰다잉, 긍정, 성공 등등. 그러나 세상이 다해도 세상이 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십자가’ 이야기다.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 교회에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결국은 사람이 오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말씀 그대로 지키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적으로 본질 즉,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로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 사랑을 알린다. 그것만이 오직 사람을 고치고 치유할 수 있다. 십자가는 세상에 없다. 분명 없다. 고로 교회는 십자가 밖에 없다. 이것을 위해 마지막까지 달려가고 싶고, 그렇게 되는 교회를 만들고 싶다.
 
▲목회함에 있어 분명 현실 목회와 성경적 교회상의 괴리감이 클 것이라 사료된다.

=괴리감에서 결단하는 것이 믿음 아닌가? 십자가가 아닌 것에 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브라함의 떠남에 있어 하나님 말씀 뿐 아니라 여건과 환경적인 요소도 분명 있다. 그러나 결단해서 떠났다.

십자가 안에 흔히들 바라는 잘 되고, 잘 살고, 행복하게 하는 방법 다 있다. 흥정할 필요가 없다. 목사가 십자가 진리의 핵심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집착하면, 목회자는 목회를 못한다. 성도들도 문제지만 성도들 앞에 믿음으로 결단하지 못한 목회자의 잘못도 크다. 십자가로 지적과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싸매는 균형을 잘 이해하고 잘 전한다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

예언자는 아니지만, 이런 혼란을 겪는 시대에 교회는 구조조정하고 있다고 본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즉, “너는 십자가의 사람이 되겠느냐”에 응답하는 목회자, 성도가 필요하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사랑하는 목회자와 교회를 남기실 것이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성도를 남겨 놓으셔서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처소를 만들어 가실 것이라 믿는다.

다시 말하지만 십자가 말하는 것, 절대 무미건조하지 않다. 십자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성도와 환경에 탓하지 말고 설교한대로 믿음으로 목회를 하면 좋겠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다. 믿음은 단순하다. 수학의 기하학이 아니다. 너무나 단순하다. 말씀대로 믿으면 된다.
 
▲목회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다른 프로그램이 없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주일예배다. 예배를 등한시하고 다른데 분주하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예배 1시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도록 강조한다. 온 힘을 다하는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하려 애쓴다. 예배에 중점 두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건다. 말씀 준비와 성령이 역사하기를 목사가 목숨 걸고, 성도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 만나는데 목숨 거는 것이 필요하다. 사역의 90퍼센트가 주일예배에 역량을 쏟는다. 하나님 만나도록 한다. 예배 후 목사한테 기도 받는 것이 아니라 예배 중에 하나님이 안아주는 경험을 하도록 독려한다.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요청하는 성경적 가치가 있다면.

=두루뭉술한 감은 있지만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 반대가 자기만족이다. 우리 교회는 흔히 하는 제자훈련이 없다. 투박한 목회를 한다. 말씀을 먹듯이 들으라고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가치는 하나님의 기쁨을 기준으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도록 한다. 그래서 자주 묻는 것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동의하시고, 인정하는가이다. 이것은 성도 뿐 아니다. 목회자도 해당된다. 그 말 앞에 모두가 두려움으로 다가가야 한다. 수많은 성경공부와 설교를 하지만 마지막에 주인 앞에서 서있을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20년 목회 가운데 슬럼프는 없었나.

=교회 때문에 슬럼프에 빠진 적은 없다. 진심이다. 지상에 발을 딛고 사는데 당연히 침체와 슬럼프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내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시험과 유혹이 온다. 거룩한 중압감을 가져야 한다.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방심을 버려야 한다. 목회자가 방심하면 이제는 성도들이 다 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부터 시리즈 설교를 시작했다. 나 스스로에게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양떼 소떼 외에는 다른 일에 관심 안두면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후배 목사님들에게 격려하고 싶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핵심은 ‘갈채’다. 갈채의 유혹, 박수의 유혹에서 벗어나면 목회자의 본질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새해에 변화되는 목회가 있다면.

=교회에 젊은층이 많다. 5대 핵심가치 가운데 다음세대 살리는 차원에서 4부 예배를 신설해 젊은이들에 집중할 예정이다. 외부 집회 포기하고 젊은이 예배를 직접 인도하려 한다. 초량교회 담임목사로서 최선을 다해보자는 의미 외에는 없다.
 
▲끝으로 새해 첫 신문인만큼 <기독신문> 독자에게 새해 인사를 부탁한다.

=<기독신문>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 우리 너무 복잡하게 계산하고 꼼수 부리지 말고 삽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전능하시다는 것을 믿고 살아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계십니다.

새해에도 여전히 복잡다단한 삶이 계속될 것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고 걷는다면 은혜가 풍성할 것입니다. 함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결단,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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