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선 (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토착화 과정으로서 추도 예배 발전과정] 논문 원본 내려받기

Ⅰ. 들어가는 말

천주교와 기독교가 중국과 한국에 들어올 때 가장 갈등을 빚었던 문제가 조상제사였다. 기독교는 인간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믿기 때문에 조상제사가 없었다. 기독교는 4계명에 따라 살아있는 부모에게 효도를 강조하지만 죽은 후에 부모에 대한 의례가 없었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조상제사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부모에게 효를 표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수용한 사람들이 유교의 전통문화인 조상제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화적 갈등의 요인이었다.

따라서 천주교와 기독교가 중국과 우리나라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조상제사는 우상숭배로 규정되고 금지되어 천주교의 경우에 많은 순교자를 내었고 기독교에서도 많은 문화적인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갈등과정에서 제사에 대한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 추도예배였다. 그러한 가운데 천주교는 1940년대부터 조상제사를 인정하였고, 기독교 안에서도 한국에서 선교목적을 위해 추도예배에서 절을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현재까지도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조상제사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이다. 첫째는 기독교가 조상제사를 허용하지 않고 추도예배만을 드리게 함으로 전도하는데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전도를 위해 추도예배에 제사를 좀 더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둘째로 가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제사를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직도 설이나 명절에 제사지내는 가정의 비율이 80%정도이고, 기독교식의 추도예배를 드리는 가정은 11%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명절에 가족 모임에서 제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셋째로 기독교가 한국 문화 안에서 민족종교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 한국문화를 어떻게 포용하고 변혁시킬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기독교가 한국 전통문화를 배척함으로 한국인들에게 아직도 기독교는 외래종교라는 인식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전통문화인 조상제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제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기독교 안에서 조상의례에 대한 관심은 아주 늦게 발전되었다. 정진홍은 1980년대에 한국개신교는 조상의례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조차 구체화하지 못하여 조상의례를 다룰 때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식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1980년에 간행된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조상숭배’의 항목은 있어도 ‘추도식’과 ‘추모예배’와 ‘추도예배’의 항목은 없었다. 그 이후 각교단에서 예식서를 만들면서 그 안에 추도예배순서를 작성하였고, 최근에 류동식과 김경재같은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 토착화가 시도되어 조상의례의 일부가 한국개신교 의례의 일부로 수용되었으며, 이정배는 제례신학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기독교와 제사 문제, 추도예배의 상호관계를 토착화의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고, 오늘날에서 기독교의 효의 실천과 추도예배와의 상관관계를 연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천주교가 제사를 배척하거나 수용한 과정을 역사적으로 분석해 보고 다음으로 기독교에서 제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배척하거나 수용했는지의 과정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기독교 안에서 효신학과 추도예배가 시작되어 발전되어온 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추도예배가 어떻게 개선될 때, 기독교의 효의 실천과 함께 한국인들에게 효과적인 전도의 문이 열릴 것인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II. 천주교회와 제사문제

천주교회에서 명나라 때 활동했던 마테오리치(1552-1610)는 적응주의의 방식을 취하여 제사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와 공경이라고 보아 제사를 허용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의 옷을 입고 중국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중국인들이 천주교인으로 개종하는데 제사를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 청나라에 들어왔던 도미니크회(1631년)와 프란체스코회(1633년) 수도사들은 원칙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교황청에서는 인노센트 10세가 종래의 제사에 대한 타협적인 정책을 중지하고 1645년에 위반하면 파문하겠다고 규정하면서 제사를 금지하였다. 그런데 교황 알렉산더 7세는 다시 예수회측의 요구를 승인하여 “비도덕적인 것이 아닌 한 어떤 민족의 관습과 전통도 배척하지 않고 상처를 입히지 않는 신앙을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고 권유하였다. 그 후 인노센트 12세(1691-1700)와 클레멘트 11세(1700-1720)는 다시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금지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자 1742년에 베네딕트 14세(1740-1758)는 입교의 제일요건으로 제사금지를 규정하였다. 이후에 청나라의 강희, 옹정, 건륭 황제가 천주교를 강하게 핍박하였고 천주교는 포교의 자유를 잃어버렸다가 남경조약을 체결할 1845년 이후에 회복하였다.

이러한 중국에서의 제사를 금지한 여파로 조선에는 1790년의 진산사건으로 부모의 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되었다. 그 이후 1801년의 신유교난으로 300여명이, 기해교난(1839)으로 130여명이 처형되었고, 병인박해(1866)에서는 8000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이들이 당시에 처형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노론의 벽파가 중심이 되었던 세도정치가들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 남인과 시파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무군무부의 종교라 하여 처형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 천주교가 조선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제사문제는 유교중심의 사회질서와 커다란 충돌을 일으켰다. 여기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죽은 조상에 대한 효를 어떻게 실천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장자들의 제사권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를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부모에 대한 효였고, 죽은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으로 제사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는 살아있는 부모에 대한 효는 강조하였으나 죽은 부모에 대한 제사는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금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제사 금지로 많은 희생을 치렀던 천주교는 1919년 교황 베네딕트 15세와 1926년 비오 11세의 회칙을 통해 제사의 고유한 사회문화적 가치를 인정하는 토착화론을 전개했다. 교황청의 태도변화는 일본황실과의 관계에서도 발생하였다. 교황청은 1910년과 1930년에는 신도를 종교라고 선언했는데, 일본에서 신사참배를 강요당하고 있던 1936년 신사참배는 일본 황실의 조상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조상에 대한 제사와 함께 허용될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이 때 한국천주교회는 신사참배를 합법화하였다. 1939년 교황 비오 12세는 현대에 와서 과거의 전통적인 습관의 의미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중국 유교의 제사도 종교 의식이 아니라 조상을 공경하는 효를 표현하는 민간적 의식이라고 인정하였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1940년 2월 경향잡지의 발표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리고 조상 제사에서 향을 피우고 절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천주교는 1940년에 교황청이 반포한 「중국예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종교적 공경’을 나타내는 의식과 ‘민간적 예식’을 구분하면서 종교와 문화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아래 ‘제사의 문화화’ 혹은 ‘제사의 비종교화’를 통해서 유교적 조상제사를 수용했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20세기에 복원된 예수회가 교황청에 영향력을 미쳐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교황 요한 23세는 1959년에 발표한 사목헌장에서 선교적 과제에 대해 “마테오리치의 방법을 본받으라”고 결론을 내렸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의 거룩한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 제37장은 “예전에 있어서 교회는 엄격한 획일성을 강요하기를 원치 않는다. 교회는 여러 종류의 인종과 국민들의 영적 의식과 표현들을 존중하고 선양한다. 교회는 미신이나 오류와 관련되지 않는 생활양식을 동정적으로 취급하고 가능한 한 그대로 유지한다. 사실 때에 따라서 교회는 그와 같은 의식들을 성례전 안에 포함시킨다”고 하였다. 이 조치는 신앙 교리에 위배되거나 바른 경신례에 반대되지 않는 한 각 민족의 문화와 풍습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해서 활용하도록 권고하고 있기 때문에 제사에 대해 적극적 조치로 해석된다.

이렇게 제사를 미풍양속으로 인정하면서 1958년에 천주교는 제사에서 귀신숭배와 연결된다고 판단한 의식들을 제외시키고 나머지 의식들을 인정하였다. 천주교 제사에서 제외된 가장 중요한 의식은 유식과 합문을 비롯한 조상의 혼령이 제사에 와서 음식을 먹는 것을 뜻하는 의식들을 미신으로 평가하여 폐지했다. 천주교는 제사가 문화라고 인정한 부분은 허용했는데 허용한 가장 중요한 의식은 조상들을 위해 음식을 차리고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며 축문을 읽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1995년에 발표한 사목지침서에서는 “전통 제례의 아름다운 정신은 복음의 빛으로 재조명하여 계속 살려나가되, 한국 주교회의는 그 표현양식을 시대에 맞게 개선한다”고 언급하면서 제사에 대한 금지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천주교의 제사허용은 천주교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가 제사를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교 교리와 제사가 일정부분 조화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천주교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성인통공이라 하여 죽은 조상들과의 교통을 인정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고, 신위를 모시는 것도 성상을 공경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의 연옥에 있는 기간이 단축되고,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하면 그들이 자신들의 공적을 가지고 예수님께 기도하여 지상에 있는 사람들의 보속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죽은 영혼들과의 교제가 가능하고 그러한 교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천주교의 교리는 제사허용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III. 중국 기독교회와 제사문제

천주교보다 후에 중국에 들어갔던 기독교 선교사들은 천주교가 이미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금지하고 있던 것에 영향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제사를 금지하게 되었다. 19세기 초에 중국선교사들이 Chinese Repository에서 제사와 우상숭배의 관계를 논한 글이 45편정도 되는데 대부분 제사 금지를 주장하는 내용이다. 중국에서 제사를 금지했던 대표적인 소책자는 메드허스트(Walter T. Medhurst)의 『淸明掃墓之論』(청명소묘지론, 1826), 네비우스(John L. Nevius)의 『社先辨謬』(사선변류, 1859), 두리틀(Jestus Doulittle)의 『寒食淸明論』(한식청명론, 1855) 등 이다. 이러한 서적들은 제사를 금지한 신학적인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하였다.

메드허스트는 영국의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1820년부터 자카르타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다가 1843년에는 중국 남경으로 들어와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자카르타에서 활동하던 1826년에 『청명소묘지론』을 저술하여 제사를 금지하였다. 중국에서 조상들에게 제사하는 날인 청명절과 관련하여 제사를 금지하는 이유를 6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청명절에 묘지의 풀을 베고 청소하고 효성을 표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희생을 드리고 제사를 올리는 것을 금지한다. 조상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은 효성을 표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제물을 드리는 대상은 하나님일 뿐이며 조상은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부모님에 대해 생전에 효도를 하고 돌아가시면 제사로 모시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대해 그것은 그 때의 일이요 지금은 제사드릴 대상은 하나님이시므로 조상에 대한 것은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는 오래된 풍습인데,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나빠지는 일이 있는데 제사가 그런 경우이다. 제사 비용이 많이 들어 폐단이 많고 조상의 영혼이 죽은 후에 와서 음식을 먹을 수 없으므로 제사는 허례이다. 청명의 좋은 날씨에 즐기는 것은 좋으나 조상에게 제사해서는 안 된다. 부모에게 생전에 효도하고, 사후에 묘지를 돌보는 것은 좋은 일이나 제사는 우상숭배이므로 해서는 안 된다.

중국에서 40년간 선교했고 1890년에 조선에 와서 장로교 선교사들을 교육했던 네비우스가 조상제사의 오류를 지적한 책이 『사선변류』(Errors of Ancestor Worship, 1859)이다. 『사선변류』는 전도지침서인 『宣道指歸』(선도지귀)와 함께 장로교 신학반 교제로 사용되었고 1893년에 시작된 감리교 본처 선교사 교육교재로 사용되어 한국의 제사 금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책이다. 네비우스는 신은 유일한 상제만 있고 상제와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예수뿐이므로 우상은 복을 줄 수 없는데, 어찌 그런 귀신에게 제사지낼 수 있는가? 공자도 예기에서 음사(淫祀)는 복을 내릴 수 없다 했으니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버리고 올바른 길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의 제사의식은 허례허식이 많으며, 신주에 제사하는데 나무에는 靈氣(영기)가 없고 神奇(신기)로 변하기를 바라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조상제사의 음식은 조상이 음식을 먹는다면 매일 안 드리니 그들이 허기질 것이요 왜 제사 드린 후에 음식의 양에 변화가 없는가? 조상의 도움을 바란다 하나, 진정한 도움은 상제에게서만 온다. 예수교는 생전에 부모에게 효하고 세상을 떠나면 예로서 장사하고 비를 세우며 사모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살며, 부모 이상의 친족들을 부모같이 대하고 부모 이하의 친족들은 형제같이 대하는 것은 모두 부모의 남은 혈육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곤경을 구제하는 것이 효도의 실상이다. 부모의 언행을 약술하여 망각하지 않고 초상화로 늘 사모한다. 생전에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지 않다가 돌아가신 후에 제사하는 것은 헛된 효도이다. 네비우스는 공자 시대의 제사도 원형에서 벗어난 것이며, 중국의 원래의 제사는 상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는 제사와 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가 있었는데, 죄를 위한 제사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필요 없어졌다. 따라서 조상제사는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네비우스 부인의 예수교문답 혹은 그리스도 문답 148번에서도 예수교에서는 제사지낼 필요가 있는가? 묻고 예수께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으니 제사드릴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1877년, 1890년, 1907년의 선교사 대회에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금지하였다. 물론 1907년에는 소수의 의견으로 제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당시 중국의 기독교 선교사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보수주의자들로 중국에 1807년에 왔던 모리슨과 그가 조직했던 내지선교회 소속 선교사들로 기독교 교리를 고수하고 직접 선교에 힘썼으며 중국문화에 부정적이었고 특히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판단하여 금지하였다. 반면에 마틴이 중심이 된 자유파들은 문화, 출판, 교육 활동 등을 통한 간접전도 방식에 더 치중하였고 제사에 대해 훨씬 더 수용적인 입장이었다. 1877년의 제1차 선교사 대회에서는 보수적인 선교사들의 입장이 주류를 이루어 제사에 대해 금지 입장을 채택하였다. 이 때 중심이 되었던 선교사는 에이츠(Matthew T. Yates)로서 제사제도의 우상숭배적인 요소들을 강조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을 제사를 통해 평안을 구하고 화를 피하려 하여 부모에 대한 孝親(효친)을 넘어 종교의식이라고 지적하였다. 당시 회의과정에서 20여명의 선교사들이 발언하였는데, 세 명 정도가 제사에 대해 비교적 타협적인 입장이었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반대 입장이어서 결국은 제사반대로 결정되었다.

1890년의 제2차 선교사 대회에서 마틴(William Alexander Parsons Martin)은 제사에 대해 적극적인 변호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자신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Worship of Ancestors: A Plea for Toleration을 통해 제사에 관용적인 입장을 주장하였다. 그는 제사에 약간의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있지만 중국인 자녀들은 제사를 통해 부모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고 가족제도의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에 제사는 죽은 자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제사의식을 변형시켜 기독교와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사의 세 가지 요소인 拜(배), 敬(경), 祭(제)에 대해 검토하였다. 배는 중국인들이 무릎을 꿇어 존경을 표하는 예절과 같은 것이고, 경은 기복의 요소가 있으며 우상숭배이나 중국인들은 그러한 요소보다 고인(古人)에 대한 존경의 염이 강하고, 제에서 서양인들은 무덤에 백합꽃을 드리나 중국인들을 음식을 차례 예를 표하는 것이므로 제사 금지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때 만주에서 한글성경 번역을 통해 우리나라의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던 존 로스도 제사의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조상숭배에 대한 연구위원회” 설치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면에 중국 원로 선교사 테일러는 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상숭배이고 여호와 이외에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공경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으며, 마틴의 입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2차 선교사 대회에서도 마틴의 입장은 소수자의 입장이었고 테일러의 주장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제사는 금지되었다.

당시 테일러가 조직한 중국 내지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의 제사의식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제사를 통해 복을 구하고 화를 피하려 한다고 파악하였다. 이들 선교사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중국기독교인들은 예배의 유일한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중국 하층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면서 중국문화를 기독교 문화로 바꾸고자 하였다. 최근에 이러한 선교사들의 태도에 대해 옥성득과 류대영 등은 동양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이자 심지에 문화제국주의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 제3차 선교사대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은 1907년에 열렸다. 이 대회에서도 조상제사는 중요하고 어렵고 미묘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더구나 1900년의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 민족주의 의식이 고조되고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로 비판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틴을 비롯한 제사에 관용적인 사람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조상숭배에는 조상공경의 뜻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예배의 의미도 들어 있으므로 제사 대신 중국인의 관점에 근접하는 추도회를 허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묘지에 비석을 세우고 아름답게 가꾸어 조상에 대한 공경을 표하는 것을 허용하고 추도회에서 모아진 돈을 고아원을 비롯한 자선단체에 기부하여 죽은 자에 대한 기념을 후세대에 물려주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는 기독교 선교사들은 조상제사에 대해 공식적으로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제사를 금지하였고, 1907년 제3차 선교대회에서 추도식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허용하였다.
 

IV. 조선 선교사들의 제사 금지 정책

우리나라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결정하고 시행했던 제사금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여 시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1886년에 최초로 세례받은 노춘경은 세례를 받으면서 제사를 포기하였다. 1891년에 아펜젤러는 제사를 포기해야 한다면 세례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양반의 경우를 기록하면서 자신은 1890년 상해 선교사 대회의 결정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였다. 만주에서 선교하던 로스도 개인적으로는 제사의 장점을 인정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제사를 반대하는 정책을 수용하여 그가 지은 『예수성교문답』(1878)에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제사금지를 설명한 『청명소묘지론』과『사선변류』두 권의 한문책을 번역하여 우리나라 조사들의 교육용 교재로 사용하여 한국에서 제사금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제사 금지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네비우스는 중국에서 제사금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1890년 6월에 우리나라에 와서 2주간 머물면서 선교사들에게 선교방법에 대해 교육하는 과정 가운데 제사금지도 주요한 내용으로 교육하였다. 그래서 제사금지가 우리나라에서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공조하여 제사를 금지한 이유를 옥성득은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제사는 죽은 영혼에 종교적인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위반하는 우상숭배이다. 기독교의 유일신론과 제사에 함의된 다신교는 양립할 수 없다. 둘째는 제사는 영혼불멸을 가르치지만 영혼이 신주라는 나무 조각에 거하고 음식을 먹으며 후손에게 복을 준다고 하는 유교의 가르침은 비경성격이다. 셋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교류를 주장하는 제사는 천주교의 성자숭배와 연옥설의 변형으로 보았다. 선교사들은 신부사죄권, 성자공적전이설, 연옥설 등을 전면 부정했다. 넷째로 천주교의 미사는 제사이고, 화체설을 비성경적이라고 보았던 선교사들은 제사도 그러한 시각에서 이해하였다. 다섯째로 제사는 제주를 확보하려는 한국의 조혼풍속, 처첩제, 여성차별, 허례에 국가적인 재정 낭비로서 개혁되어야 실제적인 윤리적인 악습의 문제였다. 제사개혁은 사회윤리적인 개혁의 차원에서 추진되었는데 중세적인 성리학적인 사회질서를 개혁하겠다는 반봉적이고 근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선교사들과 조선의 조사들이 제사문제를 논의한 것은 1893년 이었으며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1895년 마펫이 네비우스의 저술을 한국의 실정에 맞게 번역한 『위원입교인규됴』(爲願入敎人規條)가 세례문답서 및 생활안내서로 제작되었다. 이 문서는 제1조에서 귀신숭배, 우상숭배, 제사를 금지했다. 제사를 유일신 하나님 숭배에 어긋나는 귀신숭배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제사를 금지한 반면에 제3조에서는 부모님을 살아 생전에 봉양하여 효도할 것을 강조하였다. 감리교도 같은 해 스크랜튼이 매클레이의 저술을 번역한 「세례문답」제1조에서 마귀와 마귀의 일인 ‘우상을 섬기는 일’과 ‘불효’를 거절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무렵에 세례문답의 규정이 제정된 것은 청일전쟁 이후에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생활을 올바르게 지도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인 스왈론은 제사를 지낸 2명의 교인에게 성찬 참여를 금지했으며,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당시 제일 중요한 제사 문제에 좀 더 엄격한 입장을 취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당시 원산지방 교인들은 게일의 지도에 따라 스스로 제사를 우상숭배로 이해하여 금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개종자들은 제사를 포기하는 표시로 신주를 불사르거나 땅에 묻어야 했다. 선교사들은 고전 10장 21절, 행전 15장 29절, 요한계시록 2장 14절과 20절 등에 근거하여 제사음식을 우상제물과 동일시하여 먹지 못하게 하였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인물들을 비롯해 러일전쟁 직후에 여러 양반층이 교회에 입교했는데, 이들도 제사를 포기하였다.

그렇지만 선교 20주년을 맞이한 1904년에 이르면 일방적인 제사 금지에 대한 신중론도 대두된다. 20주년 기념 선교대회에서 호주 선교사 엥겔은 선교사들이 제사 금지를 비롯하여 한국의 여러 풍습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바꾸는 것보다는 한국교인들이 성령의 인도 하에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신중론을 제시하였다. 엥겔은 제삿날에 촛불을 켜 놓고 복음을 듣지 못한 조상을 위해 기도한 교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이 복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생활의 풍속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니 기다릴 필요가 있으며, 서양문화의 폐단이 한국에 유입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토론에서 무스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며 그러한 이해의 조건에서 제사를 포기했다고 하였고, 게일은 한국인들을 부드럽게 대하며 그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할 것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마펫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조상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니며 교인들은 그러한 기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에 다수의 선교사들은 마펫과 같은 입장이었으나 엥겔과 무스같은 소수의 선교사들은 신중론을 제기하였다. 게일은 1909년에 신임선교사들에게 제사문제에 대해 조선 신자들의 성숙을 기다릴 것을 주문했다.

당시에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제사는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 그들은 제사를 우상숭배로서 포기하면서 가족공동체에서 추방당하고 많은 박해를 당해야 했다. 1890-96년 사이에 나온 선교사들의 글들은 유교와 성리학에 대해 주로 두 가지 입장을 취했다. 하나는 원시 유교는 하늘에 제사하였다는 것으로,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그 타락이라는 것이다. 언더우드는 『권중회지』라는 책에서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아펜젤러도 우상숭배 금지를 논한 『묘축문답』에서 요순시대에서는 상제에 대한 제사만 있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조선유교는 주자학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유교 최고신으로서의 상제 개념을 잃지 않고 단군신화와 같은 전통적인 하나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격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선교사들은 조선유교에 대해 인륜은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수용하고 천륜은 원시 유교의 상제숭배사상을 회복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고 문명론에서는 서구의 것을 수용하라고 권고하였다.

당시 가족공동체 사상이 강했던 조선인 개종자들에게 조상들 특히 믿지 않은 부모가 지옥에 간다는 것은 상당한 실존적인 고통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들은 사람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활발하게 논의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조상들의 구원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있었다. 노병선은 『파혹진선론』을 저술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우상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면서도 예수님이 전파되기 이전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하였으면 천국 갔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최병헌은 추석에 대해 「그리스도인회보」에서 논하면서 추석은 주후 33년에 하늘에 감사하는 가배절기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조상제사로 변하였으니 다시 한 번 하늘에 제사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겠다는 시세변화론을 주장하였다. 사도신경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구절이 처음에는 있었으나 후에는 삭제되었다. 이 구절이 삭제된 이유는 이 구절이 연옥을 연상시키거나 아니면 사후 구원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에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1901년의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들어 있었는데, 「신학월보」의 만사문답에서는 사람들의 오해를 방지하고자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 있는 “옥에 있는 신들은 홍수 때에 재앙을 당한 사람들의 령혼들이요 신으로 가서 반포하였다는 말은 성신께서 노아를 감동하사 홍수 때에 전도한 말이요 예수께서 삼일 동안 무덤에 있을 때 친히 지옥에 가서 전도한 말은 아니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V. 효도신학의 발전과 추도예배의 제정

기독교가 제사를 금지하면서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효도신학을 발전시키고 추도예배를 제정하였다. 제사 금지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선교사들은 기독교가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를 하는 종교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효문화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효문화운동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반대를 완화시켜 나갔다. 먼저 효도신학을 살펴보면 1890년대의 책자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함께 천지의 창조주요 만인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천부(天父)’로 예배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1890년에 올링거가 매클레이의 책을 번역한 『신덕통론』은 “상제를 믿음에 마땅히 어린 아이 그 부모를 믿음같이 하라”하였고 천지 만물의 주재요 뭇 사람의 영혼의 아버지이니 “상제께 효성함을 알지 못하거든 어찌 능히 부모에게 효성함을 알며 --- 상제를 공경하며 사랑하는 자는 다시 능히 부모를 생각하고 효성할 줄 아는 자이니라”라고 주장했다. 만물의 근원이요 주재이신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고 효도(믿음)로 공경하는 것은 자신의 가까운 근본인 가족과 부모를 공경하는 기초가 된다고 하였고 그렇게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복주신다고 가르쳤다. 「조선그리스도인회보」는 “영혼이 육신보다 백배나 더 귀하거늘 육신을 낳으신 부모는 공경하되 영혼을 주신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니 어찌 불효가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가장 근본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4대까지 혹은 수십 대 위의 시조만 섬기는 제사는 나무의 뿌리는 배양하지 않고 나무의 꽃만 사랑하는 것으로 비유했다. 인륜인 오륜의 핵심에 효도가 있고, 효도의 뿌리는 천륜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부모의 뿌리가 하나님이니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이 근본과 조상을 참으로 섬기는 자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대효자였으므로 세례받고 나올 때 성부는 성자를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아바’라고 불렀다. 그리고 예수님을 형제를 위해 대신 죄를 갚아주신 형님이라고 설명하면서 그에게 순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국교회는 유교의 오륜과 수신의 법도를 기독교 윤리로 수용하고 실천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죽은 부모에 대한 제사 대신에 살아 계신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하였고, 이렇게 살아계신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산제사라고 불렀다. 당시 교회는 부모에 대한 제사와 효도의 문제를 제1,2계명뿐만 아니라 5계명과 연결시켜 이해하였다. 이러한 효신학의 제창은 한국인들의 도덕심에 호소력을 가졌고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제사제도 대신에 추도예배를 점차로 정착시켜 나았다.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추도식은 1896년 7월이 이었다. 원산지방의 오씨는 제삿날이 되자 스왈론 선교사를 초청하여 간단한 추도식을 드리고 나서 마당에 불을 피우고 신주를 비롯하여 각종 제기와 부적을 불태웠다. 이것은 스왈론 선교사가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그리스도인 회보」의 1897년 8월 11일자 회즁신문에 리무영씨의 추도식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추도 예배는 전통 제사의 요소를 간직한 것과 기독교적인 특색을 가진 것을 함께 가지고 있다. 전통 제사의 요소는 모인 날이 어머니의 기일 날이고, 등촉을 밝히고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통곡한 점이다. 기독교적인 예배의 요소는 기일에 선교사와 교중 형제들을 초청하여 기도하고 찬미하였고 대부인 생존시에 믿음과 현숙한 모습을 기억하였고 다시 기도한 점이다. 이러한 추도예배의 모습은 우상숭배의 요소는 배제한 제사의 요소들을 보존하면서 기독교 예배의 요소를 가미한 특색을 보여주는데, 이 후 추도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가면서 고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배제되었다.

1903년 5월 신학월보에 기재된 노다부인의 추도예배를 보면 제물포의 손우정은 모친상 일주기에 음식을 마련하고 수십명의 교우를 밤에 초청하고, 찬송, 기도, 성경봉독, 모친 노다 부인의 신앙과 행적 회고의 순으로 추도회를 드렸다. 그렇지만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행해지고 있었으므로 1911년 이천의 남감리회 첫 번째 목사였던 김흥순은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글을 게재하고 있다. 김흥순 목사는 조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조상 제사와 다름없고, 죽은 후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으며, 성경에 없는 법이고, 장례식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산 자를 위해 기도하러 모이는 것이라 지적하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1920년대에 조상제사를 둘러싸고 또 한 번의 논쟁이 일어났다. 1920년 9월 1일자에 영주 권성화의 아내 박씨가 “남편이 예수를 믿고 제사를 폐지하자 자살한 사건”을 보도하며 “애매무지한 기독교인의 희생자”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월남 이상재는 조상신주를 우상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옳다 할 수 없고, 제사는 “부모를 그리며 사모하는 효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교와 아무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하나님의 가르침에 크게 적합 되는 일일 것이라” 하였다. 이 상재는 제사를 부모공경의 표현으로 기독교와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감리교목사였던 양주삼은 제사는 “일종의 미신적 풍속이요 의식적 도덕에 불과한 것”으로 사라져야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상재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유교측의 김윤식은 양주삼의 의견에 반대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개벽 이래로부터 시작된 정의 표현이며, 돌아간 부모를 추앙하는 생각을 간절히 하는데서 제사가 제일일 것”이라 주장하였다. 한편 이상재는 자신의 앞의 논설을 보충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안 지내고는 각자의 지각에 맡기고 기독교에서도 종교문제화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동아일보는 제사가 허례허식으로 흐른 것을 비판하면서도 유교의 제사제도는 기독교의 유일신사상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니 제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에서 교회는 양주삼 목사를 비롯한 제사금지 입장을 채택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VI. 1960년대 토착화 논쟁 이후 조상제사와 추도예배

1920년대의 제사 논쟁 이후에 제사문제에 대한 더 심도 있는 논의는 1960년대의 토착화 논쟁에서 다루어졌다.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 활동에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신학의 토착화 논쟁이 발생하였고 그 주장의 핵심은 복음과 문화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토착화논의가 처음에 신학의 토착화에서 출발했는데,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사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죄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제사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에 대해 윤성범과 변선환을 비롯한 감리교 신학자들이 신학의 토착화를 주장하면서 제사 문제를 재검토하게 되었다.

1963년에 박봉배는 효정의 표시로서의 제사제도의 근본정신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제사에 포함된 죽음과 사후상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형태가 요구된다고 하였다. 윤성범은 신주에게 제사하는 문제는 일제말의 신사참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敬天)이나 샤머니즘의 종교성을 인정해도 효친(孝親)인 조상제사의 종교성은 인정하기를 어렵다고 말한다. 윤성범은 윤리적인 문제인 조상제사를 종교적인 문제로 잘못 이해한데서 제사폐지의 동기가 발생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초기 선교사들이 제사를 우상숭배로 잘못 이해한 것을 해결하려고 토착화신학이 대두되었다. 제사는 예의 문제인데, 동양의 예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이므로 제사란 조상에게 효도하는 예에 불과하다. 우상제물을 먹는 자와 먹지 못하는 자가 있는 바와 같이 제사도 믿음이 강해 불신자와 같이 행하지 않는 자와 행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제사를 하지 않으면 부모를 생각지 않는다는 태도, 부모의 기일을 잊어버리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반감을 사기 쉬운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천주교가 제사를 수용한 것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토착화논쟁의 이론을 넘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윤성범이 제사에서 종교성을 부정하고 조상에 대한 효도의 실천으로 이해할 것을 제시한 후에 제사문제에 대한 논의가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조상제사에 대해서 세 가지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는 조상제사를 효행의 실천으로 삶의 현장에서 일상화된 문화적인 요인으로 보고 복음의 토착화라는 차원에서 개선하거나 수용하려는 조류가 있다. 이러한 입장을 주로 감리교와 기독교장로회에서 발견된다.

박근원은 신앙적인 확신을 가지고 제사와 성묘에서 절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박근원은 일제의 신사참배와 다른 차원에서 조상제사의 문제를 해결해온 천주교의 노력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개신교는 미신의 풍습을 버리면서 조상에 대한 예법표현의 경의까지 버려버리는 우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우리 문화에 대해 서구 문화우월주의에서 군림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우리 문화의 잘못된 점인 미신적인 습관은 배제하되 좋은 습관인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세는 간직해야 한다. 박근원은 제사는 조상을 하나님 혹은 신으로 숭배하고 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상숭배와 조상제사를 통해 표현되는 조상공경 의식은 그 맥락의 다름을 강조한다. 그리고 조상제사문화를 우상숭배라고 정죄하기에 앞서 우상숭배에 대한 신학화와 저급한 종교성에 기초하여 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이 선행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신경의 성도의 교제 속에 산자와 죽은 자의 교제를 포함하는 신학적인 이해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변선환은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문화로서의 조상제사는 효의 표시이며 십계명의 제일계명과 제2계명에 대한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말하여 개신교의 조상제사 금지정책을 유교와 조상제사에 대한 무지와 성경 해석에 대한 오류에서 발생한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감신대 박종천은 추도예배는 죽은 자가 아닌 살아있는 자에게 초점을 맞춰 죽은 영혼과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가부장적인 제사가 아니라 효를 표현하는 제사제도, 죽은 자와 산자를 포괄하는 공동체를 형성시켜 살아있는 자의 나눔과 화해를 형성시키는 제사제도를 주장한다. 한 상에 음식을 차리고 함께 절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수용함으로써 공동체성을 회복할 것을 제안한다.

김경재는 과거의 조상제사 문제로 야기된 불행한 역사는 서로의 종교의례의 참 의미와 문화전통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연유했다고 말하면서 유교의 제사행위를, 또한 절하는 몸동작을 우상숭배라고 정죄하고 매도했던 것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경재는 잠자는 자들의 변화와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변용을 통해 죽은 자에게도 인격이 있고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나님 안에 있기에 죽음은 또 다른 생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의 교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생하는 자와 이 땅에 있는 자가 성령 안에서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조상제사를 통해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신학적으로 뿐 만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조상제사는 조상의 신격화나 혼령과 만나는 행위가 아니라 후손들이 하나님 은총의 배려를 신뢰함으로 계명과 믿음 안에서 신실하게 살 것과 조상들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이어갈 것을 다짐하는 윤리적 다짐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1,2계명의 우상숭배의 재해석과 사후 죽은 영혼과의 교류가능성을 주장하며 제사의 수용을 주장한다.

금지적 견해는 고신과 합동측의 입장으로 제사는 조상을 숭배하는 예배이므로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종윤, 맹용길, 전경연 등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맹용길은 부모에게 공경하라는 말은 한국말로 효를 의미하며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를 할 것을 말한다고 하면서, 그러나 제사에는 신령과 혼백을 섬기는 제사는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고 하였다. 금지적인 입장은 조상제사는 1-2계명의 우상숭배와 충돌하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2010년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주최로 열린 심포지움에서 손봉호교수는 “제사가 우상숭배인가?”라는 발제에서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제사에는 아직도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제사는 허용될 수 없고 대체의식으로 추모행사를 할 것을 제안한다.

중도의 입장은 통합측의 입장으로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개혁해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박봉배는 효성의 표현으로서의 제사는 문제될 것이 없으나 조상신이 후손에게 복을 내려준다는 사상은 배척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제의적 요소와 미신적 행위는 생활양식 혹은 효성의 의례적 행위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절충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현요한은 조상제사의 제요소에 대해 수용과 수용불가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첫째로 개신교가 수용할 수 없는 제의적인 요소들로는 조상을 신으로 여겨 절하는 것 귀신을 부르기 위해 지방을 쓰는 것 제상을 차리고 향을 피우는 것 등이 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대신하여 조상의 신령이 화복을 내린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조상이 천신과 사람사이의 중보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죽은 조상의 혼령과 교통하는 것 등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라고 했다. 둘째로 조상제사에서 개신교가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인 요소들로는 부모에 대한 공경으로서의 효의 윤리, 자신을 존재하게 한 과정자로서의 조상 양육에 대한 감사, 조상이 남긴 신앙의 모본과 교훈, 생전의 삶에 대한 추모 등이 있다. 그리고 성묘를 통한 부활 소망의 인식과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들과의 연합 등에 대해서는 조상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조상의 영이 아닌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일치를 경험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통합측에서 WCC의 미시오 데이(Missio Dei) 입장에서 절하는 것을 주장하는 주장들이 대두되고 감신대의 이정배는 제사와 추도예배를 통합하는 제례신학을 주장한다. 한국일은 복음과 문화가 만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합주의는 공생적 혼합주의와 종합적 혼합주의로 구분되는데, 기독교가 샤머니즘을 받아들여 역동적인 모습이 된 것은 공생적 혼합주의라고 설명한다. 토착화에도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토착화와 비의식적이고 비의도적인 토착화가 있는데, 전자는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1960년대 신학자들에 의한 토착화 논쟁이 대표적이다. 한국 기독교는 예배의식과 교회 제도 같은 것들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서구화되어 있는 반면에 신앙내용과 형태에서는 유교와 불교와 샤머니즘 등의 한국의 전통종교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토착화된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Missio Dei)의 관점에서 제사에 접근할 때, 한국일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실 때 기본적인 정신을 지키면서 의식의 융통성을 부여하신 것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조상에 대한 효심을 가지고 정성으로 추도예배에 참여한다면 기도와 묵념하는 것으로 정착해가고 있으므로 절하는 의식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면 절하지 않는 행위자체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에 김은수는 미시오 데이의 입장에서 제사에서 절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혼합주의가 되더라도 유교문화를 가지고 제사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을 못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제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은수는 조상제사는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 재난이나 재액을 피한다는 점에서 종교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문제를 방치하고 불효막심한 종교가 되고 선교에 큰 장애가 오기 때문에 제사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부족한 토착화인 추모예배를 발전시키기 위해 제1-2계명을 새롭게 해석하고 제사에서 절하는 문제에 대해 동양문화권의 전통에 따라 조상에 대한 예절로 보는 민속양식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김은수는 바울이 자신의 동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하여도 원한다고 하였는데(롬9:3) 한국인들도 제사 허용을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제사를 허용하는 종교혼합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정순은 WCC와 로마가톨릭의 입장에 서서 조상제사의 수용을 주장한다. 죽은 조상과의 교제, 로마가톨릭의 성인들의 축일과 같이 죽은 자의 기일 지키기, 제삿날의 음식 나누는 것을 성만찬의 의식과 연결시켜 이해하자는 것이다. WCC에서 세례, 성찬, 그리고 목회에서 성만찬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 그리스도를 기억함, 성령의 임재를 기원함, 성도들의 사귐, 하나님 나라의 음식의 5가지를 정했는데, 이정순은 성도들의 사귐을 제사와 연관시킨다. 제사와 성만찬은 나눔의 잔치라는 것이다. WCC 문서에서는 성만찬을 오늘날의 사람들 사이의 교제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정순은 이것을 확대하여 죽은 자들까지 교회에 포함시켜 제사와 관련시킨다.

이 정배는 유교제사의 바탕인 초혼재생의 근원이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강조한 동아시아의 샤머니즘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조상숭배는 후손들에게 복과 화를 미칠 수 있는 제례적 행위로 발전하여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의 삶에 확고한 권위로 자리잡으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되었다. 조상들의 영혼이 후손들의 삶 속에 교류가 가능하여 내세와 현세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조상의 영혼의 세계가 있어 종교성을 가진다. 이정배는 천주교 다산의 공자의 원래의 제사정신 회복, 유영모, 윤성범의 교훈을 수용하여 제사와 예배를 통합한 제례신학을 주장한다. 그것은 제사와 예배를 통합하여 제사를 통한 조상에 대한 효의 실천과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고자 한다. 그는 제사상을 정성껏 차리고 예배를 드리며 절도 하고 조상에게 음식도 권하고 조상을 생각하는 묵념의 시간도 가진다. 이것은 유교문화의 잔량이 많은 한국에서 조상에 대한 효를 실천하고 기독교예배를 풍부하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정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실천인 반면에, 경동교회 추모제는 교회 차원에서 향불을 피우고 두 번 절을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신앙에 따라 생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고인의 추모에 시간에는 “성령님의 도우심 안에서 영적으로 교통하는 시간을 가집시다(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성도의 교통’을 믿으며 성령 안에서 고인과의 영적 대화를 마음 안에서 갖는 내적침묵기도의 시간이다. 약 1분 동안 묵상 시간을 가진다.) 현재 기독교에서 교회의 추도예배에서 향을 피우고 절하는 것과 고인을 위한 기도 시간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곳은 경동교회가 대표적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이러한 조상제사의 새로운 이해를 통해 추도예배의 변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이미 추도예배 속에도 기존의 기제사의 요소들을 수용한 토착화된 부분이 많다. 최근의 한국의 5개 교단의 추도예배 순서와 전통적인 유교의 기일제사를 비교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닌다. 차이점은 첫째로 명칭이 기제사, 기일제사, 제사에서 추도예배, 혹은 추도식으로 바뀌었다. 둘째로 여성도 동등하게 참여한다. 셋째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제사상 차리기, 지방이나 신주, 축문일기, 제사 전용음식, 문 열어놓기, 절하기 등의 여러 가지 절차와 의식이 없어진다. 신주 대신에 사진을 놓고 진행하거나 그냥 진행하기도 한다. 축문읽기에 가장 근접한 시간이라면 고인을 위한 추모의 시간일 것이다. 추모의 시간은 고인의 신앙이나 행적을 후손에게 기리며 전달하여 본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넷째로 제사는 부부를 합해 1회로 줄어드는 추세인데 기독교에서는 따로 예배를 드린다. 공통점은 첫째로 추도예배 날짜가 기일제사와 동일하고, 둘째로 장남이 주관하며, 셋째로 의식 후에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가족간의 우의를 다지고 신앙으로 살 것을 다짐하고, 넷째로 고인을 추모하는 동기와 가족의 공동체 의식을 다지려는 목적에서 동일하다. 물론 기복적인 목적에서 제사 드리는 측면은 구별될 수 있으나, 현대로 내려올수록 가족공동체 의식 형성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추도예배는 기제사의 영향을 받아 상당한 정도로 토착화되어 있다.
 

VI. 나가는 말

유교문화에서 발전된 고인이 된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으로서의 제사는 복음전파의 과정에서 새로운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이 과제에 대해 천주교는 제사제도의 절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토착화를 하였고, 기독교에서는 추도예배를 드리되 절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유교문화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남아있는 조상제사와 기독교가 보급하고자 하는 추도예배 사이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추도예배라는 명칭에서 부모를 생각하며 슬퍼하기 보다는 부모를 사모하고 그리워한다는 의미에서 추도보다는 추모라고 해야 의미상으로 더 타당하다.

추모예배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은 제사가 가지는 가족중심주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고, 절하지 않음에서 오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절하는 것에 대해 보수적인 교회는 제1-2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이해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WCC의 하나님의 선교 신학과 천주교 제사허용에 따라 기독교의 진보진영에서는 이미 절을 하고 상을 차리고 조상들에게 기도하는 경우도 있다. 진보진영에서는 제사가 유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없고 조상과 교류하는 효도의 형식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국민효에 따르면 유교에서는 동아시아 귀신 신앙의 전통에 따라 조상의 영혼이 제사의 초혼재생을 통해 자손들과 만남으로써 ‘이 세상’에서 생명이 연속된다는 사고를 발전시켰다. 여기서 제사는 어디까지나 조상에게 예와 정성을 다함으로써 조상을 기리는 것이지 귀신에게 화복을 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 해도 조상신과의 교류를 인정하는 것이고, 한국의 제사에서는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복을 비는 성격이 강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샤머니즘은 한국의 기성종교와 접합되어 모든 종교가 기복주의의 성격을 가지게 만들었고, 기독교도 그러한 요소가 많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절까지 허용한다면 신학적으로도 한국의 문화적 전통에서도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에게 추모예배의 성격을 잘 가르쳐 건전한 신앙과 함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하겠다. 교회에서 제사를 금지할 때 제사의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명확하게 제거해야 하지만, 제사가 가지고 있던 효도, 조상기림, 가족공동체 유지의 미풍양속을 잘 보존하여 발전시키는 것은 교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이다. 현대 사회의 가족붕괴의 원인은 핵가족제도와 개인주의화, 세속화, 도시화의 결과이지만, 추모예배를 통한 가족공동체 형성과 효성의 보존은 우리 교회와 사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어 130년이 지났다. 오늘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이 망한 지 12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제사가 명절마다 지내진다고 하는 것은 그 제사가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에 가족중심주의를 유지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온갖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다. 유교문화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려 양반들을 넘어 일반 평민들까지 제사를 지낸 것은 조선 후기이다. 고려 말부터 제사가 시행되었지만 당시에도 200-300년이 지나서 일반 민중들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만큼 문화의 변화속도는 점진적이다. 그러한 것에 비교하면 기독교는 훨씬 더 빨리 유교의 제사문화를 변화시켜 왔다. 앞으로 기독교는 한국문화를 성경적인 효의 실천을 통해 좀 더 건강한 가족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성경적인 효의 실천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착되어온 추모예배를 더욱 기독교신앙에 토대를 두면서 건전한 가족공동체의 형성과 함께 부모님들의 신앙유산을 이어받는 건전한 삶의 자리로 발전시켜 나아야 하겠다.

전도의 초기 단계에서 일부 가족들은 믿고 일부 가족들은 믿지 않을 때에 추모예배와 기제사를 병행하는 단계를 거쳐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된다. 이복규 교수는 이준영 목사 가정의 사례를 통해 그러한 이전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장례식을 치를 때도 기독교식으로 하면서도 사람들에 대한 대접을 극진히 했고, 추모 예배를 드린 후에는 절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도 허용을 했다. 이러한 과도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가족구성원의 신앙이 성장하면 추모예배로 점차 통일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토착화 과정으로서 추도 예배 발전과정] 논문 원본 내려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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