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가다 (1)
에티오피아 기독교문화유산을 찾아가다 (1)
에티오피아 역사문화 시간여행
  • 에티오피아 = 송상원 기자
  • 승인 2014.12.01 09: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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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항공사와 여행사 에티오피안 홀리데이즈의 초청으로 5박 8일간 에티오피아 북부 역사문화탐방을 다녀왔다. 에티오피아 현재를 상징하는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명소와 과거의 영욕을 간직한 바하르다르 곤다르 랄리벨라 악숨으로 이어지는 시간여행,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기독교문화유산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 주>


수도 아디스아바바서 국가 지탱해온 기독교 영향력 체감
초기 한국교회 풍경 담긴 바하르다르 예수 수도원 인상적
‘독실한 신앙’ 곤다르 왕조 찬란한 유산은 영욕의 역사 품어

 

 

‘마라톤의 나라’, 에티오피아 취재를 의뢰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마라톤이었다. 두 번의 올림픽과 한 번의 장애인올림픽을 석권한 ‘맨발의 아베베’를 위시해 그의 후예들이 마라톤 시상대 맨 윗자리를 독차지하곤 했다.

에티오피아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기아와 질병이다. 1985년 미국의 명 프로듀서 퀀시 존스는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라이오넬 리치 등 팝스타들을 불러 모은다. 에티오피아 빈민 구호 목적으로 <유에스에이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 유명한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가 이 앨범의 수록곡이다. 당시 ‘위 아 더 월드’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던 앙상한 뼈만 남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모습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에티오피아=기아’라는 등식이 여전히 뇌리에 박혀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사람들, 그러니까 이번 취재의 주최측은 마라톤은 인정했지만 기아와 질병은 거부했다. 오래전 이야기라는 말이다. 에티오피아가 아직까지 세계에서 GNP가 가장 낮은 축에 들지만 개발붐이 일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찬란한 역사에 힘입어 위대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을 보노라면, 이번 기회에 ‘못 사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벗어내고픈 간절함이 엿보였다.
 


뉴 플라워의 두 얼굴

16시간의 비행 끝에 아프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하루를 넘겨 다음날 오전 6시 30분, 드디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했다.

아프리카의 허브로 통하는 아디스아바바공항을 비집고 나오니 한국의 가을보다 더욱 청명한 적도의 하늘이 취재진을 환영했다. 아울러 아디스아바바산 매연향이 코를 찔렀다.

도로로 나오자마자, 차내에서 “우와”라는 소리가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왔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도로는 겹겹이 쌓인 출근차량으로 정체 중이었다. 아디스아바바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들은 출퇴근시간마다 이렇게 교통체증을 겪는다고 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선잠에서 깨니 첫 번째 행선지 엔토토산에 당도했다. 해발 3000m의 엔토토산은 아디스아바바 천도 직전에 수도였다. 서울로 치면 남산격인 이 산은 아디스아바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망터로 제격이었으나, 공항에서 첫 선을 보였던 자욱한 스모그가 여기에서도 방해한 점이 옥에 티였다. 나귀에 나무땔감을 실어 운반하는 아낙네들을 인상적으로 보는 사이에 살며시 찾아온 고산병 증상에 머리가 핑 돌았다.

▲ 기즈어 성경.

엔토토산 바로 밑으로 유엔ECA본부 아프리카유니온본부 대통령궁 국회본회의장 에티오피아정교회 그리고 아디스아바바대학이 운집해 있다. 에피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살라시에가 궁터를 기증하여 설립된 아디스아바바대학은 최고의 지성들이 모이는 상아탑이다. 캠퍼스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황제궁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서양풍의 박물관에는 황제와 여왕의 의복과 집무실 침실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아울러 수백 년을 거친 기즈어 성경과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담은 그림이 전시되어 있어 이 땅을 아우르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 에티오피아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루시.

아디스아바바대학 바로 옆 에티오피아 국립박물관, 이곳에서 ‘루시(Lucy)’를 만났다. 약 320만 년 전, 최초의 인류로 추정되는 유골화석 루시는 에티오피아 하다드사막에서 발견되어, 여기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루시라는 이름은 발굴 당시 비틀즈의 노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가 조사대의 캠프에서 흘러나와 붙여졌다. 그 이름처럼 여성이고 신장은 1m 가량. 뼈대만으로도 굉장한 기운을 뿜어낸 그녀의 앞에 서니, 인류의 조상님께서 살며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자네, 왜 이제야 왔는가!”


숙소로 향하는 길, 곳곳에서 건물을 올리고 있었다. 건설현장의 일꾼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특히 여성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리고 보니 첫 날부터, 에티오피아는 두 가지의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아디스아바바는 ‘새로운 꽃’이라는 뜻처럼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발전하는 에티오피아의 오늘을 보여줬지만 한편으로, 건설현장의 여성, 땔감을 팔아 하루벌이 하는 아낙네, 구걸하는 아이들의 얼굴은 태양에 그을린 민낯을 숨길 수 없었다. 심각한 빈부의 격차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는 사람들이 여기에 살았다. 맑은 하늘에 섞여 있던 스모그처럼 말이다.

에티오피아의 양면성은 숙소인 데브라 자이트의 최고급 리조트에서도 발견했다. 번잡한 아디스아바바와 달리 화산호를 끼고 문을 연 쿠리프투 리조트는 안락함을 선사했다. 하지만 ‘과연 이 리조트를 이용할 수 있는 에티오피아 사람이 몇이나 될까’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적막한 호수의 기운은 감성을 자극했고, 피로가 밀려왔다. 낙조를 향해 날아오른 새들이 까마득히 사라질 쯤 어둠이 찾아왔다.


에티오피아의 한국스러움

▲ 타나호수의 낙조.

새벽 5시 기상. 긴 비행의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강행군이 시작됐다. 잘 닦인 중국산 고속도로를 달려 다시 아디스아바바 공항으로 가는 길,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들이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 엔토스 예수 수도원.

비행기로 50분 걸려 안착한 곳은 에티오피아 제3의 도시 바하르다르. 곧바로 바하르다르의 자랑 타나호수로 향했다.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이 호수는 유서 깊은 수도원을 품고 있다. 뱃길로 30분, 섬 위에 솟은 엔토스 예수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운드형 건축물인 엔토스 예수 수도원은 남녀 모두 입장할 수 있지만, 남자와 여자의 출입구가 다르다. 한국 선교 초기 남녀를 구별했던 ㄱ자 교회와 유사하다.
 

▲ 엔토스 예수 수도원 동굴 입구.

수도원 내부는 성경말씀을 새긴 벽화가 둘러싸고 있다. 베들레헴이라고 칭하는 기도장소는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베들레헴 안쪽은 언약계 복사본을 보관한 지성소인데, 관광객의 출입을 금했다. 섬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900년 된 수도원 동굴은 전등 없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빛을 비추자 동굴 안쪽 기도실 침실 주방 등이 서서히 드러냈다. 한걸음씩 다가갈수록 외부와 격리돼 짙은 어둠 속에서 지냈던 고행자들의 사연이 어렴풋이 스쳐지나간다.
 

▲ 수도원에서 수행하는 사제.

엔토스 예수 수도원은 지금도 100여명의 에티오피아정교회 수도승이 수도 중이다. 수도 방법은 한국의 예수원처럼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수도승들은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거나 혹은, 실을 짜 만든 머플러와 옷가지를 관광객에게 판매한다. 일행에게 머플러를 판 수도승이 싱긋 미소를 내보였다.

바하르다르 여정은 에티오피아의 한국스러움을 물씬 느꼈던 하루였다. 옛 수도원은 초기 한국 교회처럼 남녀를 구별하는 방식을 택했고, 거리에서 티코 다마스 등 한국의 중고차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또 공항에서 비행기가 연착되자 ‘빨리빨리’의 대명사 한국인보다 더 급하게 움직이는 에티오피아 사람들. 단 이틀 만에 에티오피아에 정이 들은 이유랄까.


영광과 상흔

▲ 곤다르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목동.

 

▲ 우물가의 남매.

다음날 한계령을 몇 차례 넘었다. 3000m 넘는 고산을 굽이굽이 넘어 175km를 이동한 덕분이다. 세 번째 행선지 곤다르 여정은 유일하게 육로로 이용했다. 고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결코 아니다”다. 북부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일상을 만끽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시골장터의 풍경과 온 마을주민이 북적이는 전통 장례식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산중턱에서 마주친 목동들은 정겹게 손을 흔들었다.
 

▲ 데브라 베르한 셀라시에 교회 내부 모습.

4시간 넘는 이동 끝에 곤다르에 다다랐다. 이름마저 매력적인 도시 곤다르는 1632년부터 1855년까지 에티오피아의 수도였다. 그 280여년이 에티오피아 황금기였던 만큼 아름다운 궁전과 교회, 정원을 자랑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곤다르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해발 2769m에 성채도시를 건설했던 것은 말라리아 때문이었다. 파실리다스 황제는 말라리아를 피하기 위해 고산지대로 도성을 옮겼다. 약 2만평의 성지 위에서 파실리다스 황제의 궁전과 도서관, 요하네스 1세의 법원, 이야수 1세의 궁전 등이 하늘을 찌른다. 마치 서양의 고성을 보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스페인에서 전해진 가톨릭의 영향과 악숨제국의 영향을 받아 혼합됐다는 설명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이 주류였던 곤다르 왕조는 성 안팎에 7개 교회도 지었다. 그중 백미는 데브레 베르한 셀라시에 교회이다. 이야수 1세가 남긴 최고 업적으로 평가되는 이 교회는 외부에서 평이해 보이지만,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장관이 펼쳐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가 북쪽 벽면에, 성모 마리아가 남쪽 벽면에, 그리고 예수의 일생을 기록한 그림이 동쪽 벽면에 펼쳐져 있다. 천정에서 에티오피아 풍 천사 얼굴 144개가 아래를 응시한다. 신기한 점은 얼굴표정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성 밖 북서쪽에 자리한 왕가의 목욕탕은 경탄하고도 남았다. 넓고 깊었다. 이렇듯 화려한 유산은 서쪽으로 수단, 동쪽으로 예멘과 무역이 성행했던 상업의 주요 거점 곤다르의 융성기를 짐작케 했다.

하지만 곤다르 성은 온전히 보전되지 못했다. 19세기 수단과의 전쟁으로 단 한 채의 성만 생존했고, 2차 세계대전 때도 폭격을 받아 그마저도 무너져 내렸다. 곤다르는 에티오피아의 영광의 시절과 쓰라린 상처가 중첩되어 있는 터전이다. 그럼에도 곤다르는 아름다웠고, 꼭 다시 방문하고픈 도시였다. 다음날 아침, 광활하게 펼쳐진 고산도시 곤다르의 절경은 영욕의 역사를 잠시 잊게 할 만한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 곤다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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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2014-12-20 10:34:28
흥미로운 기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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