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욱 목사(서울 한성교회)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의로운 길을 걷는 자는 약속하신 축복의 은혜를 충만하게 입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사람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누가 복 없는 인생을 꿈꾸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아무나 축복하지는 않으십니다.

구약성경에서 복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복입니다. 여기에 쓰인 ‘바라크’라는 말은 전체적으로 415회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하거나 신적권위를 가지고 복을 주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선행이나 공로와는 상관없이 언약관계로 인해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특별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아시와르’라는 단어인데, 구약성경에만 44번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진 삶의 자세와 태도로 인해 주시는 복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받을 수도 있고 혹은 받지 못할 수도 있는 복입니다.

본문 시편 1편이 말하는 복은 ‘아시와르’의 복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시편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줍니다.


1. 복 있는 자리에 머물라

본문 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복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흔히 알고 있는 죄, 악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서 죄를 말합니다. 보통 죄악이라고 하면 율법이나 법률규정을 어기는 행위를 생각합니다. 살인이나 간음 또는 도둑질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시편에서는 죄나 악을 그보다 근본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벗어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꾀를 의지하는 사람’이 악인이며, ‘자기의 길을 스스로 가는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리고 악인과 죄인의 결정판이 오만한 자입니다. 오만한 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삶의 보좌에 자기가 주인으로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일컬어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다”라고 외치는 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그 도움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자기 꾀와 능력,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죄인이며, 악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들은 ‘악인의 꾀’로 대표되는 세상을 따라갑니다. 여기서 ‘악인의 꾀’는 ‘하나님은 없다’라는 사상과 철학을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봤을 때 성공한 사람들 그리고 인간적으로 잘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살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주장에 쉽게 휘둘립니다. 세상에 길이 있다고 믿기에 연신 세상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이 악인의 꾀를 벗어던져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은 하나님께 있다고 굳게 믿기에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2절을 통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길을 찾고 말씀을 따라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즐거워하며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 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 즉 말씀이 옳다고 인정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 귀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식을 믿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왕으로 받아들여 그 말씀 따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악인은 꾀로 살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 즉, 믿음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지침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성경은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의 제품 설명서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든 수명대로 오래 고장 없이 사용하려면 매뉴얼을 숙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대로 살면 건강하고 행복하고 장수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망가지고 힘들어 집니다. 말씀대로 살면 부서진 것들이 고침 받고 회복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바랍니다.
 

3. 모든 일에 형통함을 누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복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즉,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면 모든 일에 잘 되는 복을 누립니다. 그래서 시인은 3절을 통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나무 은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잘 자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 나무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그 땅이 물길을 찾기에 쉽지 않은 지역이라 할지라도 나무가 물가에 있다면 악조건에서도 잘 자랄 겁니다. 가끔 비가 올 때만 물이 있는 ‘와디’와 같은 메마른 땅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카디안’과 같은 끊임없이 물이 공급되는 수로만 있다면, 늘 푸르고 철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냇가’는 저절로 형성된 시냇가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입니다. 누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마른 땅을 파서 수로를 만들고 물을 흘려보내는 시냇가입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 복 받을 요소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 있는 삶의 태도로 나아갈 때 축복의 물꼬는 터집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와 삶의 원리와 근거가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시냇가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을 뚫고 파셔서 생수를 흘려보내시고 아름다운 열매로 풍성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나의 인생나무가 오늘 옮겨 심겨지기를 기대합니다. 와디에서 악카디안으로 말입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시냇가로 말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해 어떻게 역사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 가치 없는 인생으로 판명됩니다. 심판 견디지 못하며, 의인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길을 걷는 자는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인정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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