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인터뷰] 도원욱 목사(서울 한성교회)

▲ 도원욱 목사(한성교회). 그는 실천력이 강한 목회자다. 그 실천력은 목회에 놀라운 몰입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다. 부족하기에 더 엎드리고 배운다는 그의 말에서 역동적인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목회에 대한 몰입과 열정은 침체와 퇴보의 시기에도 아름다운 복음의 열매를 맺으며 성장하는 교회로 나타나고 있다.

예배 통해 힘을 얻고 변하며 전도하는 선순환 중요
교회는 행복 만드는 공장, 예수 만나게 적극 도와야
나는 부족한 그릇, 창의적 하나님 만나려 노력한다



‘성장’에는 양면성이 있다. 성숙을 동반하지 않는 성장은 부실하고, 반대로 성장이 없으면 생명력을 잃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교회가 성장의 양면성이라는 블랙홀에 빠져있는 양상이다. 경제성장과 맞물려 ‘교회성장학’이 상륙하면서 맹목적인 성장을 추구해 오다가 내실을 기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그 결과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교인 감소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게 된 것이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교회에 대한 배타성이 커지면서 전도의 문이 급속도로 좁아졌다. 영혼을 구원할 해산할 힘마저 상실해 가는 상태에 이르렀고, 이제는 인위적인 성장을 하려해도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교회가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표출될까? 바로 ‘예배’와 ‘전도’다. 예배에서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된 삶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전도로 이어질 때 교회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따지고 보면 예배와 전도가 교회 본연의 핵심사역이다. 나머지 행위들은 이들을 강화시키는 기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도원욱 목사(한성교회)의 목회는 단조롭다. 매주 드리는 예배의 분위기와 설교에 매우 민감하게 준비를 한다. 또한 교회의 전도 동력화와 정착화에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목회의 모든 역량을 예배와 전도에 두고 있다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예배와 전도, 그 단조로움은 오히려 역동성으로 나타났다. 밋밋한 신앙에서 뛰쳐나와 활기찬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늘어나고, 꾸준한 전도로 성장도 폭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목회집중력에서 찾을 수 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현수막조차도 최고의 작품을 내걸기 위해 장고(長考)할 정도다. 목회집중력은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목회 외에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하나고, 무수한 사역 가운데 교회가 추구해야 할 핵심사역에 ‘몰입’한다는 뜻이다.

부족함을 알기에 더 엎드리고, 더 읽고, 더 노력한다는 도원욱 목사의 목회열정에서 교회가 추구해야 할 본질사역이 무엇이며, 교회가 생명의 역동성을 회복하기 위한 길을 찾는 여정으로 떠나본다.
 
 
▲ 도원욱 목사
▲얼마 전에 전도축제가 끝난 것으로 안다. 어떤 열매가 있었나.

=1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 ‘행복한 사람들의 축제’라는 전도행사를 열고 있다. 봄에 비해 가을 전도축제는 가볍게 실시한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한성교회 부임해 10번째로 실시한 전도축제였다. 전도축제를 마치면 평균적으로 120~400명 정도 정착을 하는 것으로 통계에 잡힌다. 해마다 두 차례나 전도행사를 갖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성도들이 잘 참여해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라 생각한다. 그러한 열정이 있기에 열매도 크다고 본다.
 
▲많은 분들이 목사님을 두고 목회와 교회성장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평가한다. 아마도 경산중앙교회에 이어 지금의 한성교회에서 보여준 성장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급성장하는 교회를 이끈 목회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나 스스로 돌아보아도 부족하고, 단점이 많은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은혜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담기 위한 노력이 있기에 그 은혜가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적 고백을 기본으로 삼는 질문으로 받아 달라.

=그렇다면 잘 정리해 달라. 자칫 오해를 사는 부분이 많은 질문과 답변이기 때문이다.

굳이 말한다면 ‘성장’은 좋고, 나쁨을 떠나 실상은 어려운 일이다. 정체와 퇴보의 시기인 지금은 성장이 더욱 어려운 현실이다.

그동안 본질에 충실하려 했다. 교회의 변화는 시대적 사명이며, 생존의 문제가 담겨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교회가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늘 고민하고 있으며, 교역자들과 논의를 한다.

본질에 충실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예배였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교회의 특화는 ‘예배’다. 살아있는 예배를 위해 지켜야할 것과 변화시켜야 할 부분을 늘 점검해 왔다. 다시 말해 예배에 모든 역량을 모았고, 앞으로도 여전히 예배에 집중할 것이다. 예배에 대해 오랜 기간 집중하고 긴장하며 내린 결론이다.

교회는 단순하다. 예배에서 감격하고 감동을 받는다. 예배를 통해 힘을 얻고, 나가서 힘 있게 살고, 전도하는 선순환이 이뤄지는 곳이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전도)가 되는 것이다. 예배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예배자로 다시 세워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 있어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 사역 중에도 더 핵심적인 부분을 단순화하고, 집중하고, 매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목회에 있어 예배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는 말인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중요한 것을 진짜 중요하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교회는 예배공동체다. 그러므로 예배가 중요하고, 중점을 두고 신경 써야 할 것도 예배다.

예배는 목회자의 영성과 비전, 논리, 일관성, 성경적인 것을 담아내는 결집체다. 예배에서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영적 깊이를 찾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봐도 그렇다. 교회 구성원 가운데 무려 70퍼센트가 주일예배만 드리고 간다. 그런 이들에게 단 한 번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케 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회에 있어 예배는 툴(도구)이 아니다. 본질이다. 그래서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꾸준함과 일관성이 목회에 중요한 요소다.
 
▲예배와 설교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 같다. 그러나 예배와 설교에 대한 기준이나 척도가 없기에 호불호를 가름하기란 애매한 면도 있을텐데.

=예를 들어 커피가 좋다든지, 밥이 맛있다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답이 없다.
그런 측면에서 설명해 보자. 예배와 설교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그러나 항상 같이 간다. 그만큼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예배와 설교에 있어 진정성과 진실함이 요구된다. 설교의 중요성을 진정성 있게 느끼고 준비해야 한다. 기도가 호흡이라면 살기 위한 절감성을 갖고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예배와 설교가 중요함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잘 준비하게 된다. 시간과 고민을 투자하는 것을 보면 설교나 기도나 예배의 질을 읽을 수 있다. 중요성을 알아야 마음의 기준의 높이가 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중요성이 정리되었다 하더라도 안도하지 못하기에 항상 피드백을 받는다. 그래서 최고의 작품을 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아내 역시도 나에게 최고의 피드백 대상자다. 좋은 자극제다. 덕분에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하게 된다. 이처럼 늘 피드백을 받는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진심으로 받으려 노력한다. 그렇게 되면 예배와 설교에서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만지심이 있다고 본다.

 
 
▲한성교회가 갖고 있는 ‘그 무엇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전도를 하고, 사람들이 정착한다고 본다. 한성교회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반복되는 말이지만 전도와 예배라 생각한다. 다른 교회보다 전도를 많이 하다는 것이 강점이다. 더 나아가서 전도를 해서 교회에 남는 것(정착)은 결국 예배에 매력이 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담임목사의 친근함 등을 말하기에는 교회 규모로 봤을 때 사실상 어렵다. 그러므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식당은 건물과 외형에 상관없다. 음식의 맛에 따라 결정지어진다. 교회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교회에 왔는데 예배에 만족함이 없다면 영적으로 배고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교회 성도들이나, 전도를 받아 정착하는 사람들이나, 잠시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예배가 좋다는 평가를 많이들 하신다.

또 하나의 매력이 있다면 카페가 아닐까 한다. 교회의 카페는 집으로 말하면 거실이다. 그저 커피를 파는 하나의 가게로 생각한다면 그리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거실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실은 가족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공간이며, 그 공간에서 사랑을 주고받는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찾는 이들을 위해 교제하고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이유다.

카페는 비단 교인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지역주민들이 카페에 와서 행복감을 얻게 하는 효과도 크다. 우리 교회 카페가 <그릿시냇가>인데, 여기서 평일에는 300잔, 주일에는 600잔 이상의 커피가 꾸준하게 판매되고 있다. 행복감을 주기 위해서 교회 입장에서는 손해가 크다. 손익을 생각하지 않고 운영하기 때문이다. 고급원두와 재료를 사용하되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또한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전문바리스타를 고용해 최고의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카페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서도 행복감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운영하고 있다.(실제 한성교회는 고급스런 인테리어의 카페 외에도 <제이콥스레더>라는 서점을 운영해 카페와 책을 연계한 북카페의 기능도 함께 추구하는 등 고급화 전략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외에도 새벽마다 뜨겁게 기도하는 것, 신앙적으로 고민하거나 방황하는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주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교회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목회 방향성은 무엇인가. 목회철학을 묻는 것이다.

=균형이다. 교회는 건물 아니라 생명이며, 유기체다. 건강한 생명, 건강한 유기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나 있듯이 예배, 양육, 교제, 봉사, 선교가 균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려고 애를 쓴다.

복음을 받아들인 결과는 ‘행복’이다. 교회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육간 행복을 만드는 공장이다. 이를 위해 예배를 드리고, 예수를 만나고, 교제권에서 정착하고, 관계 속에서 훈련을 받고, 나아가 봉사와 섬김 그리고 선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교회니깐 그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선교에 자원을 투입하기 위해 다른 요소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복음으로 행복해진 사람이 행복해진 복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에 대해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신명기 10장 13절 말씀이다.(신명기 10장 13절 말씀은 이렇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에덴에 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했다. 죄가 들어오면서 그 행복은 깨졌다. 에덴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가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행복이다. 인생이 불행하니, 돈과 유흥과 먹는 것 등으로 채우려하지만 답이 아니다.

물고기는 물이 있어야 산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예수를 만나야 행복하게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삶에 젖어들면 불편하던 세상이 오히려 편안해 진다. 아울러 행복을 전달하는 통로의 관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효과를 거둔다. 끊임없이 복음전도를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행복의 통로이기 때문에서다. 성경말씀이 행복의 매뉴얼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복음의 정통이다.
 
▲행복은 관계성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성도간의 관계도 중요한 요소인데, 규모가 급속히 커져서 충족이 힘들 것으로 보이는데.

=설교가 잘 고려가 되면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목사와 만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설교를 통해 성도 개개인이 터치를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되겠다. 성도들이 갖고 있는 실질적인 고민들을 늘 살피고, 집중하고, 그것을 말씀으로 풀어주려 한다.

아울러 교제 요소를 강화하려고 한다. 소그룹, 다락방, 교구별 친목모임 등을 통해 유기적인 관계를 개선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완벽한 것은 없다. 늘 배워야하고, 바꿔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래서 노력하는 것이다.
 
▲인터뷰에 앞서 여러 사람들에게 목사님에 대한 평가를 물었는데, 교회성장, 목회집중력과 열정, 전도 외에도 다수가 금요철야기도회를 꼽았다.

=나는 일관성도 그렇고 집중력이 약하다. 다양한 감각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집중이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금요철야기도회는 굉장히 파행적인 프로그램이다. 목회 흐름에 있어 금요기도회는 리듬을 깨는 집회다. 주일 준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철야기도회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하게끔 하는 장점이 있고, 은혜의 추억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현재 청년들도 많이 참석해 기도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목회집중을 위해 내려놓아야 할 부분이라면 금요기도회가 될 것이다.
 
▲지금은 교회가 성장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다. 특히 수평이동이 아닌 순수한 전도에 의한 성장은 더욱 그렇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다. 여전히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영적 상황은 더 절실해 진다. 그러므로 전도를 꾸준히 해야 하고, 꾸준하게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진 것이 전도에 있어 치명적이다.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을 오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오기 싫어하는 사람을 오게 하는 것은 더 어렵다.

21세기는 직접적인 전도방식보다는 관계전도와 이미지 전도다. 한성교회가 카페와 갤러리, 서점 등을 운영하는 것도 이미지 차원에서 하는 것이다. 꾸준하되, 최고를 사회에 제공하는 것이 교회에 대한 호감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배타성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런 때에 교회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좋은 일을 하되 일관성 있게 펼칠 필요가 있다. 교회들이 네트워크로 지역에 도움을 주는 방법이 좋을 것이다. 순기능 측면에서 교회의 아름답고 선한 일들을 자연스럽게 알리며 지역 주민들에게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스며들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마다 전도가 안 된다거나,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교회적으로 전도를 동력화했다. 전도동력화를 위한 비법을 소개한다면.

=비법은 없다. 동력화에 있어 숨겨진 힘은 바로 리더십이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라는 매개체에 투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전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중요성을 능가하는 인식이 필요하다.

전도를 프로그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아는 분명한 자기인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하게 해야 한다. 전도를 하는 것은 자기 확신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근거하기 때문이다. 전도는 교회의 당연한 사명이다. 이것을 인지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전도에 집중하면 교회는 변한다. 체질이 변한다. 여기서 변화란 교회 전체가 다 변화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도에 매진하면 교회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리하자면, 전도의 확신, 이를 끌고 갈 리더십, 끝으로 핑계대지 말고 꾸준함으로 체질화해야 한다. 여기서 노하우도 생긴다. 교회가 건강하고, 전도하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현실적으로 성도 입장에서 전도가 어렵거나, 회피하고픈 마음이 클 것이다. 성도들이 전도를 어려워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전도는 은사가 아니라 사명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은사가 아닌데 하라고 하니 어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것이다. 공부하기 싫은데 공부하라하면 힘들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교회가 전도하는 분위기로 갈 수 있도록 은사별 재편 등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목사님께서는 교회성장론자인가.

=성장론자? 아니다. 하지만 확신하는 것은 있다. 생명의 특성은 자라는 것이다. 부피도 그렇고, 내용도 자란다.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성장을 추구하자는 말이 아니다.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한성교회 성장도 어느 선에서 멈출 것이다. 멈추는 것이 결국 나의 그릇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평생을 노력하려 한다. 그래서 생명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려는 것이다.
 
▲2000년도에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의 지나친 성장일변도에 따른 부작용과 비판들이 쏟아졌다. 성장에 목표를 삼은 것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그래서 현재 분위기상 교회성장을 이야기하기란 어색한 면도 없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를 두고) “성과주의자다”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현상적으로 봤을 때 맞다고는 할 수 있다. 일을 하면 결과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사 점검을 한다. 그렇다고 결과만 보지 않는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 생각한다. 부교역자에게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적당한 자세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다. 교회가 침체하고 있는 시대에 변화를 위해서는 이곳에서 배워나가 극복할 체력을 길러주기 위함에서다.

또한 이벤트한다고 말하는데, 실상을 보면 틀린 말이다. 본질사역에만 집중하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하나의 요소에서 쓰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함이다.
 
▲목회에 보람은 무엇이며, 한계는 무엇인가.

=교회가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이 보람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자리에 나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그리고 좋은 사역자들 만난 것, 여기서도 행복을 느낀다.

완벽함, 철저함, 탁월함, 영리함, 충직함 등등. 이 모든 부분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목회자다. 그럼에도 쓰시니 감사하다. 그래서 행복하다.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나.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단점을 극복하려 약을 먹는 심정으로 독서를 한다. 어떻게든 읽으려 노력하고 있다. 실력을 쌓기 위해 뒤늦게 공부도 했다. 설교와 기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다. 사람마다 그릇이 있다. 영성, 지성, 인격, 감성이라는 그릇이 있는데, 나는 부족한 그릇이다. 그래서 깊이는 몰라도 기도의 시간과 분량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나에게는 포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욕심이 많다.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름 알려진 목회자는 됐지만, 그 이상의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포기하고 노력할 게 너무 많다.

▲목회 동역자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를 꿈꾸지만 목회자의 다양성을 보고 생각해야 한다. 획일화해서는 안 된다.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본질을 추구함에 있어 경계할 부분이 있다. 그 본질을 관념적이거나 막연하게 생각해도 안 되며, 그것으로 핑계 삼는 것을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예배와 전도를 단순하게 단어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움직일 수 있는 그 무엇을 파내는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목회함에 있어 감각도 중요한 요소라 본다. 목회적 감각 향상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나.

=급소와 같은 질문이다. 감각과 노련미는 구별돼야 한다. 그러나 감각을 가진 노련미가 필요하다.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있다.

우선, 감각적인 사람을 만나 배우는 것이다. 좋은 리더를 만나 배워야 한다. 둘째로, 독서다. 초감각파들이 남겨놓은 것을 습득해야 한다. 셋째로, 감각을 계발할 수 있는 자리에 가는 것이다. 여행, 영화, 인문학, 클래식 음악 등이 그러한 자리다. 네 번째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것은 바로 가장 창의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새벽마다 하나님의 만지심(터치)을 받으려 노력한다. 느헤미야의 기도가 좋은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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