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유물은 신앙 전통과 대화
그 감동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32년 코트라 근무 중 70개국 돌며 발품 팔아 1만 3000여점 모아
전국 돌며 전시회 큰 호응…제대로 된 상설전시관 비전 키워
충북 제천에 박물관 부지 어렵게 마련… “기도하며 완공할 터”

 

그는 지금도 꿈이 있다. 얼추 그 꿈이 마무리되고 있어 기쁘지만, 돌아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은퇴를 하고 5년이 지났는데도 삽으로 땅을 고르고, 리어카를 끌며 직접 흙을 퍼 나르고 있다. 터널의 끝이 보인다. 세계기독교박물관 건립이 곧 현실화 될 것 같다. 김종식 장로(62·이서교회). 그의 꿈은 세계기독교박물관을 우리나라에 짓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모하다고 말하지만, 이제 그가 평생 일궈 온 꿈이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

그는 소싸움으로 유명한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소싸움을 하는 원형 스타디움이 집과 불과 200미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소와는 누구보다 친숙했다. 다른 친구들은 장기나 바둑을 두고 골목 어귀에서 공을 찰 때도 그는 어김없이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고 소와 함께 자랐다. 한 번은 소에게 풀을 뜯게 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누워 있는데 비행기가 날아갔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커서 어른이 되면 비행기를 타고 멀리 다니는 직장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꿈이었다. 비행기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고, 요동쳤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직전에 독감도 아니고 장티푸스도 아닌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다. 한의사도 병명을 몰랐다. 학교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큰 병원에 가서 입원할 처지도 못 되었다. 집에서 소일거리로 매일 성경을 읽었다. 참 흥미로웠다.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는 묘미는 그에게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달쯤 지나자 병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학교에 다시 나갔다. 중학교 2학년과 3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병이 다시 도졌다. 그는 다시 성경을 펴들었다. 그럼 병이 나았다. 그래서 병이 나으면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다. 그 다음부터 병은 사라졌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그는 아버지를 따라 당연히 농사를 짓는 것이 그의 생업인 줄 알고, 농고로 진로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친한 누나가 인문계 고등학교로 가라고 권유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뤄졌다. 비록 시골 고등학교였지만, 상위권의 성적을 놓치지 않아 예비고사에 합격을 하고 계명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때도 기적의 연속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했는데 과 교수가 불러 학도호국단을 맡아 보라하여 학생회장이 되었다. 그것 또한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일이었다. 대학교 졸업직전 KBS, 국가안전기획부,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등 세 곳에 합격을 했다. 보기 드문 축복이었다. 연수를 받기 위해 KBS에 첫 출근을 했다. 그러나 몸은 KBS에 있었지만, 어느 직장을 선택해야 할 지 머릿 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여의도 KBS 로비에서 안내를 맡은 데스크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KBS가 좋아요? 코트라가 좋아요?”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아가씨는 코트라가 좋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발길을 즉시 코트라로 돌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비행기를 타던 꿈이 비로소 이뤄졌던 것이다.

코트라에 다니면서 방황을 많이 했다. 다른 종합상사에 가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월급도 국영기업체라서 여타 기업보다도 적었다. 돌파구란 오로지 해외지사로 나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결혼을 했다.

“당시 외국 발령을 받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십이조를 드리겠다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매달렸습니다.”


이스라엘 등 성지에서 생활

첫 부임지는 오만이었다. 인구 60만에 불과한 그곳에서 그는 성탄절이 되면 양말을 사들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선물을 전했다. 채 3년을 채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집트로 발령이 났다. 해외 무역관 근무자 중 성적이 1등이라 런던 근무가 예상됐는데 이집트 발령은 의외였다. 그러나 거기에 그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브엘세바를 방문했는데 당시 가이드가 겨자씨를 보여 주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 성경에 나오는 식물을 보고 그 자리에서 성경의 유물을 모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시간이 나면 무조건 벼룩시장과 엔티크를 찾아 유물 찾기에 나섰다. 32년 동안 코트라에 근무하면서 해외출장만 70개국을 돌아다녔다. 오만 이집트 이스라엘 폴란드 뉴질랜드 등이 그의 주 거주지였다. 그가 발품을 팔면서 모은 유물은 총 1만 3000점이다. 비파와 수금, 등경과 말, 두루마리 성경 에스더서, 물매와 방패, 저울과 추, 토라, 눈물병, 옥합과 연보궤, 일곱 촛대와 맷돌 등 유물도 다양하다. 비행기를 좇던 소년이 세계기독교박물관을 세우게 된 것도 다 뜻이 있었다. KBS나 종합무역상사에 가지 않고 코트라에 근무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세요. 코트라 직원이기 때문에 자국의 문화유물을 반출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일반인들은 가지고 나올 수도 없어요.”

그는 이와 같은 유물을 혼자 간직하기가 너무 아까웠다. 국내는 물론 세계인이 함께 보기를 정말 희구했다. 그런데 전시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봇짐장수 마냥 인천 광주 익산 대구 양평 서울 등지를 전전긍긍하며 수 개월씩 전시했다. 반응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대구의 경우 딱 한 달을 ‘이스라엘 유물전시회’란 이름으로 열었는데 두 시간 줄을 서서 관람하는 것은 약과였다. 관람객들로 늘 인산인해였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상설 전시할 공간은 정녕 없었다. 한 번은 인천에서 전시회를 하는데 미국인 흑인목사 3명이 찾아와 미국에도 없고 이스라엘과 유럽에도 없는 유물이 어떻게 한국에 있는 지 묻기도 했다. 그만큼 그가 가지고 있는 유물은 ‘세계적’이다.


기독교 박물관 꿈 무르익어
 

“한국에 돌아오기 오래 전부터 기독교박물관을 짓겠다는 꿈을 꾸며 부지를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쉼을 얻기 위해 놀러가는 곳이란 고작 온천가서 목욕하고, 바닷가 주변에서 회를 먹는 것이 전부입니다. 옛날에 다리 밑에서 개잡아 먹는 것을 보고 참 충격을 받았는데 제대로 된 문화탐방을 실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박물관 건립입니다.”
 

▲ 브엘세바를 방문했는데 당시 가이드가 겨자씨를 보여 주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 성경에 나오는 식물을 보고 그 자리에서 성경의 유물을 모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는 강화도 용인 홍천 인제 문경 청도 할 것 없이 전국 150곳을 찾아 나섰다가 결국 제천에 안착하게 되었다. 골짜기를 낀 6만평 규모의 박물관 부지를 찾기가 참으로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는 계획을 진작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치밀하게 인도해 주시는 줄은 정말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는 성경유물을 찾아다니는데 거의 모든 삶을 다 쏟고, 은퇴 후에는 박물관 부지 마련에 올인했다.

“박물관을 지어 유물을 전시하는 꿈을 꾸며 나도 모르게 우쭐거린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데 제가 하는 것 처럼 앞섰던 것입니다. 성서식물원부터 만들고 차츰차츰 영역을 넓혀 기독교박물관을 짓겠습니다.”

그는 성경 유물을 모으고, 박물관 부지를 마련하고, 최종 건축 단계에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느낀다고 말한다. 소에게 꼴을 먹이던 시골 촌뜨기를 사용하여 기독교박물관 건립을 추진토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며 수도 없이 고백했다.

“이제는 돈으로 박물관을 건축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무릎으로 기도하며 박물관을 짓겠습니다.”
 

글=강석근 기자 harikein@kidok.com
사진=권남덕 기자 photo@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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