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사랑을 기억하며 남은 삶도 하나님과
역경 가운데서 서원하며 하나님 뜻 찾는 것이 진정한 감사의 의미
 

 

배경

매년 찾아오는 추수감사주일(Thanksgiving)에 대한 의미는 깊다. 그 기원은 당연히 성경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바라볼 때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부정적인 측면은 세속 문화에서도 추수감사제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추석과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은 성경에서 그런 절기를 지켰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시대에 여러 절기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3대 절기라 하여 유월절(무교절), 칠칠절(맥추절) 및 초막절(수장절) 등이 있다. 각각 유대력에 의하면 1월, 5월, 7월에 준수된다. 이 중에서 초막절은 추수감사주일과 연관을 맺는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 종교개혁의 후손인 청교도들이 신대륙인 뉴잉글랜드에 도착하여 드렸다고 한다.

유대인의 절기를 신약성경 시대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지키지 않았는데 굳이 현대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것이 추수감사절은 1621년 신대륙에 도착한 필그림 조상들(Pilgrim Fathers)이 그 해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 사실을 기념하는 것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순전한 청교도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급진파에 해당하는 자들이었고, 순전한 청교도들은 1625년 이후 영국 왕 찰스 1세(1625~1649년)의 핍박을 받으면서 신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청교도와 추수감사주일은 별상관이 없다고 봐야한다.

미국은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도 지키자고 선포하여 이 날은 기독교적 행사라기보다 국가적 명절로 지켜지고 있고, 캐나다는 1872년 국회에서 통과시켜 현재까지 국가 축제일로 지키고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기독교인들이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남는다.

하지만 구약성경에 기원을 두든지 아니면 일반 역사에 두든지 간에 성경에서는 한결같이 감사에 관한 말씀을 계속 선언하고 있다. 유대인의 절기이기 때문에 또는 근대에 와서 세속 문화와 관련되었기에 일자에 맞춰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깊게, 넓게, 높게 감사하는 주일을 정해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타당하다. 어떤 자세, 어떻게 그리고 그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차례로 생각해보자.

 
어떤 자세로

먼저 감사하는 심정은 자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18). 어떤 어려움을 직면하더라도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기뻐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감사해야 한다.

둘째, 초대교회의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이다(행 2:46~47). 특별히 “기쁨과 순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경건한 자들의 기쁨은 임무를 완성하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곧 성령의 열매와 관련을 맺으면서 감사와 관련을 맺게 된다.

셋째, 감사하는 심정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심정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보자. 초대교회 교부들 중 가장 존경받는 한 분은 아타나시오스(296~373년)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반삼위일체론자들의 핍박 속에서 목회 46년 동안 6차례, 즉 24년 동안 추방당했다. 세 번째 추방을 당할 당시(356~362년)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356년] 2월 8일 목요일 아타나시오스는...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인... 데오나스 교회에서... 성찬식을 준비하는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가 포위되고 교회당 문이 부서졌습니다. 이런 명령을 내린 자는 시리아누스였습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오스는... 조용히 제단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집사님에게 시편 136편을 낭송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회중들은 낭송되는 각 구절마다 큰 목소리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무장한 군인들은 성단소(聖壇所, chancel)를 에워쌌습니다. 하지만 회중들과 감독은 두려워하지 않고 아타나시오스의 예식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가 기도로 시작하자고 권하자 군인들은 회중들과 예식을 인도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모두 교회당 밖으로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타나시오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예식을 이끌었습니다. 교회당 밖으로 끌려 나온 그는 6년 14일 동안 회중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6월 아타나시오스를 증오하는 적대감이 다음과 같이 일어났다.
 
[356년] 6월 13일 목요일 아침, 심야 집회가 마친 직후, 몇 명의 여인들을 제외한 모든 회중이 떠났을 때 시리아누스의 명에 따라 데오나스 교회는 폭풍이 몰아쳤고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인들은 살해당했고, 교회당은 이교도들의 난폭한 행동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왜 굳이 시편 136편을 낭독하라고 명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26절까지 매절마다 반복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

하나님의 선하심(톱, בוֹ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좋았더라”는 표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곧 아버지의 사랑을 의미한다. 모든 만물을 준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또 주기도문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문맥에서 보호자 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신뢰하는 면에서 아타나시오스는 이 시편 136편을 낭독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리고 시편 23편은 누구나 애송하는 성경구절이다. 특별히 6절을 읽어보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한다. 시편 136편과 같은 맥락이다. 그분은 아버지로서 그분의 자녀들과 늘 함께 하셨음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헤세드, ד󰘑󰖒)이란 문구는 언약의 혜택이 나타나는 곳마다 표현된다. 그래서 경건한 자를 보호하시는 분이 곧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 감사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오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란 단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롬 2:4, 11:22; 벧전 2:3). 대신 ‘사랑’이란 단어가 사용된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깊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감사하는 심정도 달라진다. 특별히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요일 4:9).

 
감사의 참된 의미

‘감사’라는 단어는 성경 중 시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데 75번 사용된다. 그런데 감사라는 단어는 서원 또는 감사제와 함께 등장하든지 아니면 고통 가운데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는 구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감사제란 화목제를 의미하는데(레 7:15; 시 50:14) 어려움과 힘든 역경 가운데 서원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서원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겠다거나 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에 맞서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느끼면서 회개에 이르고 그 회개를 통해 평생 베푸시는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함을 깨닫게 된다(시 119:71).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지만 감사제 또는 화목제는 그 제물을 드리는 자도 함께 먹는다. 화목제는 감사와 서원의 요소로 구성된다(레 7장). 이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7:3). 어려움을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이하여 그분과 함께 긴 터널을 능히 지나가겠다는 자세를 서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평생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남은 삶도 그분과 함께 살겠다는 것이 서원으로 나타난다(시 50:14, 56:12; 욘 2:9).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사의 의미이며 헌신으로 그 감사를 나타내게 된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