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원 교수(총신대학교)

절약 넘어 나눔이 진정한 탈물질
 

 

세계는 지금 탈물질주의 사회로 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삶이 여유로운 선진사회는 경제적 안정과 번영에 집착하던 것에서 벗어나 개인적 자유와 성취를 우선하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탈물질주의 지수는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다고 합니다.
 

물질 세상

성경과 기독교는 물질을 죄악시하거나 배격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았더라”하신 피조물입니다. 구원의 완성인 새하늘과 새땅 역시 물질적 세계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 영국의 대주교 윌리암 템풀은 기독교는 모든 종교들 가운데 가장 물질주의적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물질을 그림자나 허상으로 보는 헬라사상이나 불교와는 분명히 다른 관점입니다.

특히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신앙을 특징으로 여깁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칼빈주의의 송영이자 하나님 주권사상의 고백이고 사도신경 첫머리입니다.

물론 바른 물질관을 갖추는 것은 신앙인에게 중요합니다. 하나님 주권의식과 함께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신앙이 실질적이기 어렵습니다. 세상과 가장 동화되기 쉬운 영역이 경제와 돈입니다. 물질주의는 가장 분명하고도 깊은 세계관 충돌이 일어날 영역입니다. 따라서 거기서 잘 하면 기독교적 영향력을 분명히 드러내 하나님 나라 확장도 일어납니다.
 

물질주의

탈물질주의의 선두에 있는 스위스의 경우 직장을 택할 때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보람(51.2%)이고 안정성(20.2%), 동료(15.7%), 고소득(12.9%) 순이었습니다. 우리의 경우 참담할 정도로 정반대입니다. 안정성을 가장 중시(57.4%)하거나, 고소득(23.6%)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득과 안정성을 합하면 80%가 넘는 것은 놀랍습니다. 보람(13.2%)이나 특히 동료(5.8%)는 거의 무시됩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물질주의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흥사단이 청소년 2만1000명을 조사해보니 고등학생의 47%가 10억이 생긴다면 1년 정도 감옥에 가도 괜찮다고 답했답니다. 그 전해엔 44%였기에 올해는 50%를 넘어섰는지 불안합니다. 초등학생은 12%에서 16%, 중학생은 28%에서 33%로 해마다 수치가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생활고에 시달린 어른들이 그렇다 해도 문제인데, 청소년들의 답이 이렇다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물질이 중요하지 않지만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식민지 치하에서 가난하게 사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에 계셨더라면 교회가 안될 정도로 자주 말씀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성경에는 물질주의에 대한 경고가 지나칠 정도로 많아 보입니다. 물질주의는 경각심을 높이지 않으면 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죄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이나 간음은 모르고 범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탐욕은 인식조차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자족의 정신

우리나라에서도 부분적으로 탈물질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회 민주화와 경제정의, 남녀평등과 다문화주의나 환경친화적 사고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전히 물질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돈이 신이요 존재의 근원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물질이라고 합니다. 뭐든지 돈버는데 도움이 돼야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는 실용적 물질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대하는 드라마며 영화엔 유달리 재벌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연봉이 얼마고 어떤 집에서 살며 무슨 차를 몰고 다니는가가 우리의 가치와 존엄을 결정한다는 식의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특히 광고는 이런 정도는 갖추어야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입해 물질주의를 부추깁니다. 심지어는 목회도 이런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이 우리의 등불(마 6:22~23)이라고 하신 이유는 바른 관점을 갖는 것이 삶에 가장 중요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눈이 세상의 보화에 매여 있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세상도 탈물질주의를 지향하는 오늘날 성도는 더욱 하늘에 보화를 쌓는 심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경건이 큰 유익이 된다 했습니다(딤전 6:6). 그것은 가지고 싶은 것을 채울 때가 아니라 가진 것으로 만족하길 배워야 합니다. 개화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절약운동을 통해 사회에 모범을 보였습니다. 진정한 탈물질주의는 절약을 넘어서 가난한 자를 섬김과 나눔같이 물질을 바로 사용할 때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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