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석 목사(전주 서부중앙교회)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인생의 터 세웁시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 사랑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 2:21)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도 헛갈리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간다. 주일이잖아.”라고 합니다. 저도 “어제 왜 교회 안 나오셨습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셔야죠.”라고 합니다. 또 이런 말도 하죠. “자네도 나랑 같이 교회 믿지.” “나는 교회 믿기 때문에 술을 안 먹는다.”고도 하고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믿던(?) 그 교회를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19절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란 어떤 장소나 내가 믿어야 할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는 우리들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나를 믿는다’는 말과 같은 모순인 거죠.

그런데 세 번째로 20절은 교회를 터와 모퉁이 돌로 설명합니다. 그런 다음에 21절에는 “건물마다”라고 건물로 말하니까 또 다시 헛갈려 버립니다. 왜 교회를 건물이라고 할까요? 여기서 터나 모퉁이돌이나 건물이 나오지만,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 가고”, 또 “너희도…함께 지어져 간다”면 이것은 건물이 아니라 건물로 비유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바울은 왜 건물이나 터라는 말을 써서 헛갈리게 할까요? 그 이유는 성전을 절대시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성전이 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건물 이미지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1000년 동안 생활의 중심지였고,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으며, 거기서 죄 사함을 받고, 삶의 힘과 소망의 원천이 되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성전에 집착하다보니까 어떤 폐단이 생겼느냐하면, 성전이나 성전의 법궤를 하나님과 동일시한 겁니다.(삼상 4장) 하나님과 언약궤를 동일시하는 착각을 한 것입니다. 졸지에 궤짝이 하나님이 돼 버린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이 궤가 있는 성전의 시멘트, 벽돌, 이런 것들을 하나님과 가치 동일시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이며,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요 4장을 보면, 예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났을 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갇혀계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지, 장소의 문제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어떤 시멘트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전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말씀이죠.

성경의 줄기찬 싸움은 성전이 무엇이냐, 교회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이런 관점으로 보면 성경전체는 바로 이 두 가지, 성전이 건물이냐, 아니냐의 싸움입니다. 건물은 상징이고, 그림자일 뿐이요, 참 성전은 구약에서도 하나님 자신이신데 신약에서는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시라는 것이 성경의 초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순간,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 와 거주(내주)하시는 새로운 성전이 된 건데, 이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된 겁니다. 여러분이 교회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로 모였을 때 그 모인 곳이 성전입니다.
 

예수를 터로 삼는 바른 성전이 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되고 바른 성전이 되기 위해서 성전된 내 신앙과 인생의 터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 터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합니다.

고전 3장 11절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결국 성도의 터도 예수님이고, 모퉁이 돌과 초석도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터가 무엇이냐는 말은 끊임없이 이 터를 부정하는 세상 속에서 네 인생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말하는 것이고, 또 네 신앙의 기초가 무엇이냐를 도전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어 보려고 교회에 갔는데 말끝마다 돈 이야기를 한다면 이 교회는 돈이 기초가 된 겁니다. 교회에서 늘 사람 칭찬을 한다면 그 교회는 사람의 교회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겁니다. 어떤 조직에 헌신 할 것을 요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기업을 움직이는 사장이나, 이사 같은 말과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종교기업인 겁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교회고, 성전이라면서도 돈을 신으로 삼고, 인간관계에 집착해서 사람 붙잡고 무슨 일을 꾸미려고 누군가를 만나서 작업을 하고 있다면 그건 성전이 아닌 겁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인생의 기초, 신앙의 기초가 무엇이냐? 너희 교회는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상과 이념을 터로 삼고 사는 사람도 있고, 예수 믿으면서도 귀신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다니는 사람도 그 터가 수상하고, 율법에 터를 잡은 율법주의자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놓여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참으로 인간답게 대접을 해주는 곳은 없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집니다.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머릿수를 세고 있는 거지 인간으로 대접하는 곳이 얼마나 되느냐? 그러나 예수께로 들어가면, 말씀 안으로 들어가면, 인간을 정말 고귀한 존재로 그 존엄을 인정을 해주시려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던져 피 흘리시기까지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소모품도 수단도 아닙니다.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고,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인 겁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확신할 때에 아무리 부끄럽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이라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처소로서 당당해질 수가 있는 겁니다. 도종환 시인의 ‘여기 있는 까닭’이란 시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 삶이 부끄러워서 다가갈 수 없는 그대는 적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히 2장 11~18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님이고,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우리를 말하는 것인데, 다 한 근원, 즉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에 나를 형제라 부르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이고, 이것을 믿는 사람을 신자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삼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분을 믿는 것입니다. 내 삶이 부끄러울 때 그분은 내 인생의 모퉁이 돌이 되어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분을 내 반석으로 삼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그러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귀한 은혜와 사랑을 받은 내가 그 사랑과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며 인생의 근거를 발견한 사람으로서 우리도 봉사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귀하고 장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내 문제만 급급하면서 살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물질에 기초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과 신앙의 초석으로 삼았사오니 이제는 남은 평생을 그 사랑을 증거하고,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나도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성도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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