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석 목사(전주 서부중앙교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여, 당당합시다
구원 받은 성도는 영원한 권속, 서로 격려하며 힘이 되어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사진가 조선희씨는 “사진은 뺄셈”이라고 했는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것을 빼버린다면 선명하게 강조돼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19절은 우리를 ‘시민’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국민, 백성이란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지금 여기 와 있는 영적인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 사명이고, 성도는 그 나라의 시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기 때문에 이 세상과는 다른 삶의 가치와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는 것도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내가 속한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방법이 종교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인류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은 세상과는 다른 영적인 질서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면서, 그 나라의 백성을 계속 불러내신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은 내 인생의 체계와 목적과 가치가 달라졌다는 의미인 겁니다.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나라가 되었다는 이 말씀이 갖는 엄청난 특권이 무언지 아시겠습니까? 결국 ‘여러분 뒤에는 국가가 있음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그냥 시시한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가 없는 거대한 나라요, 역사 속의 모든 나라가 다 망했어도, 한 번도 망한 적이 없이 도도한 물결처럼 역사를 가로지르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내 인생의 배후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민이란 것은 바로 나를 그 나라의 최고 통치자요,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묶여진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분이 여러분을 책임지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 신앙은 너무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에만 묶여 있기 때문에 흔들리고, 혼란을 겪습니다. 즉, 내가 하나님께 잘못했을 때는 버리신 것 같고, 내가 하나님께 잘해서 인정받으면 떳떳하고 안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는 시민이요,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요 시민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호하시되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세상 나라에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소망이 되고, 우리를 당당하게 하며,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생명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를 믿으면, 쌀독에 쌀이 안 떨어지고, 비행기에서 맨몸으로 떨어져도 솜이불을 준비하셨다가 멀쩡하게 받아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혼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민에 빠지게 해서라도 그를 구원하시고야 말 것이며, 그 삶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성도의 신분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나를 그 나라의 시민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었고, 이제 와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내 삶의 배경이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이기도 합니다. 시민이 이 세상에서 성도의 소속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한다면, 권속이란 말은 성도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권속(眷屬)이란 말은 돌아볼 ‘권’, 엮을 ‘속’을 써서 성도란 서로에게 엮인 존재들이요, 서로를 돌아봐야 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 어디서 확인됩니까? 본문은 구원받은 사람은 교회당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교회라는 가정에 권속으로 엮이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면 당당하고, 알 수는 없지만 뭔가 모르는 기쁨이 내 속에 있고, 힘든 것은 서로 나누게 되고, 하나님과 나, 나와 그리고 누군가가 엮여 있는 권속인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4~25절을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하는데 이 격려하라는 말은 박차를 가하라는 말입니다.

교회란 그런 겁니다.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일을 하지만, 교회 안에 1, 2, 3급 신자라는 구분이나 차별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가족이고, 자녀요, 형제자매인 겁니다. 가족들끼리 돈 많은 것으로 등급을 나누는 것을 봤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정치판이 아니고, 가정이요. 교회는 법을 따지는 곳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을 공유한 생명의 관계요. 교회는 군대 같은 수동적인 집단으로서 남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내 집을 드나드는 식구들인 겁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 가정의 일원으로 용납되고, 받아들여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서로 다투면서도 용서하고, 내 욕심이나 말을 절제하고, 내 요구사항을 안 들어줘도 불만을 절제하고, 심지어는 남이 슬퍼하면 내 기쁨조차도 절제하고, 누군가가 불편하면 웃음을 속으로 참는 것, 이게 가족이요, 그런 성도가 있기 때문에 교회에 오면 편안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기쁨이 되고 힘이 되는 그런 교회를 이루십시다. 조직을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형제애로 충만한 교회가 됩시다. 권위주의적인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십시다. 물질주의, 샤머니즘적 기복주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복음적이고 따뜻한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시민과 권속이라는 말 앞에 “성도들과 동일한”이란 표현이 붙었습니다. 바울 시대는 아직 신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 즉 아브라함이 나와 동일한 시민이요, 권속이며, 모세가 나하고 동일한 시민이요 권속이라는 말입니다. 야곱,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에스더 등 이런 사람들이 나와 동일한 시민이요, 다니엘, 바울, 베드로, 요한이 전부 나와 한 권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처음부터 하루아침에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고, 거짓말쟁이였지만, 이삭을 바치는 믿음의 조상이 됐어요. 야곱은 속이는 자였는데 이스라엘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실패자였는데, 하나님을 대면한 자가 되고, 여호수아는 남의 밑에서 일하던 사환이고 종이었는데, 한 국가를 세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요, 간음자, 살인자였는데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고, 사울은 핍박자였지만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권속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나도 그렇게 간섭하시고 그렇게 만들어 가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선언이며, 하나님의 결심이고, 약속이며 능력과 고집이 그리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시련 때문에 시계 제로의 상황이 벌어져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내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시나니”라고 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이었으면 합니다.


결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셔서 내가 시민이요, 권속이 되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간섭과 포기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당당함이 있고, 위로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외인도 아니고 손도 아니요 시민이요 권속이라 낙심해서도 안 되고, 포기해서도 안 되고, 자책해서도 안 되고, 다만 주님의 훈련을 받아 자라가는 성도들이 되고, 바른 교회를 이루어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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